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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사람 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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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배 Mar 16. 2020

A와 B.

요상한 셋방살이 중이다. 일주일의 반 이상은  큰방에서, 나머지는 작은 방에 생활 중이다. 마치 내 안에 두 가지 자아가 존재하는 듯 각자의 삶에 충실하다.

주중의 나는 정신없는 A이다. 출근 즉시 비상사태 돌입이다. 총 대신 계산기 옆에 끼고 연신 숫자를 쏘아댄다. 젠장. 왜 이리 아직도 천 단위, 백 단위는 헷갈리는지. 지난주는 제주도로 보낼 숫자 묶음을 안양으로 보냈다. 당황한 담당자의 연락에 간신히 급한 불 껐다. 몇 번 확인했음에도 실수는 친한 친구처럼 꼭 붙어있다. 매일 새로운 난제가 터진다. 혹시 나를 비밀 요원으로 키울 요령은 아닐까. 모니터로 매일 감시하고, 느슨한 모습이 보일 때마다 과제 하나씩 던져주는 것 같다. 데드라인 걸린 메모가 수시로 온다. '몇 시까지 해주세요.', '언제까지 꼭 제출해야 합니다.', '000 님 지시사항입니다.' 제기랄. 욕지기가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다. 나는 급히 일선에 똑같은 메모 보낸다. 기안은 받은 메모보다 훨씬 타이트하다. 그들도 나를 고리 대부업자로 생각하지 않을까. 하나를 마무리 지을 때쯤 다른 일이 쌓이니 퇴근은 매일 늦어진다. 문제는 주변에 누구 하나 집에 갈 기미가 안 보인다는 것이다. 혹시 등 뒤 거죽 벗기면 안에는 기계가 튀어나오는 것이 아닐까 의심스럽다. 화장실은 가는 걸까. 숨은 쉬는 거겠지. 모두 똑같은 모습으로 종일 일하고, 퇴근이 훌쩍 지난 시점에 발길은 자연스레 밥집으로 향한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나도 기계처럼 변해간다. 내 안의 휴머니즘이 바닥날 때쯤 금요일에 도달한다.

다른 자아 B는 서둘러 A를 몰아낸다. A가 큰방에 남긴 쓰레기는 치우지도 않은 체, 얼른 작은 방에 간다. 그 안엔 좋아하는 물건이 가득하다. 벽 한편 가득 책이 있다. B는 책 욕심도 많다. 지난주엔 책을 4권이나 주문했다. A라면 엄두도 못 낼 여유 속에 보낸다. 특히 책장 한편엔 소중한 우주가 펼쳐진다. 수억 광년 지나 지구에 도달한 별이 지구에서는 볼 수 없는 영롱한 빛을 내뿜는다. 큰 별은 다소 가칠한 면이 있지만, 속은 마그마보다 뜨겁다. B와 닮은 구석도 많아 잘 통한다. 작은 별은 말할 것 없이 귀염 가득하다. 보고만 있어도 B의 눈은 동공 지진이다. 두 별과 있으면 B는 시간이 멈춘 듯한 착각에 자주 빠진다.

B는 요즘 주말이면 카페에 간다. 작은 방보다는 책 읽기가 참 좋다. 커피 향은 책 읽게 만드는 묘약이다.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긴 후 슬며시 종이와 펜을 꺼내 든다. 월말에 제출할 원고의 글감이 떠올랐다. 글 쓸 땐 요렇게 손글씨가 당긴다. 오늘따라 면발 뽑듯 술술 나온다. 에헤라 디야.


아침 출근길. 아직 하늘에 떠 있는 달이 보였다. 지금 내 삶을 반영하듯 정확히 반으로 나뉜 반달. 언젠가 보름달이 되면 나의 지긋한 셋방살이도 끝이 날 것이다.

그날이 올 때까지 A는 A대로, B는 B대로 각자의 삶에 충실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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