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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배 Mar 31. 2020

불행을 가져오는 예지력

나에겐 불행을 가져오는 예지력이 있다. 10여 년 전쯤 회사 출근길이었다. 주말 숙직이라 아침 일찍부터 서둘렀다. 평소와 달리 뻥 뚫린 길에 기분 좋았는지 별생각이 다 났다. '이리 운전 오래 했는데, 사고도 안 나고 참 대단해.' 순간 앞에 신호등이 깜박이며 빨간불로 바뀌었다. 나는 천천히 차를 멈췄다. 그때였다. 갑자기 '쿵'하는 충격에 몸이 잠시 들썩였다. 오른쪽 허리에서 찌릿한 전기가 흘렀다. 차를 멈추고 나갔다. 얼굴에 당황함, 가득한 상대편 운전자가 보였다. 연신 고개를 숙이며 미안하다고 했다. 김밥 먹느라 앞에 차가 멈출 줄 몰랐다는 것이었다. 차 수리는 보험 처리했고, 한의원에서 몇 달간 치료받았다. 그때의 영향인지 지금도 오른쪽 허리는 주기적으로 나를 괴롭힌다. 사고 타이밍도 참 기가 막혔다.

어제 오후였다. 일선에서 여러 문의가 이어졌고, 나는 제법 능숙하게 처리했다. 머릿속에 '음. 나도 이제 업무에 나름 익숙해진 것 같아. 여태 큰일 한번 나지 않았잖아.'라며 자축했다. 그때였다. 옆에 계장님이 전화받고 얼굴이 사색되었다. 그리곤 지난주에 000에게 연락받지 않았냐고 물었다. 그때 재택근무였고 급하게 처리해달라는 일이 있었다. 혼자 처리하기에 그래서 나와 같은 업무 수행하는 동료와 유선 연락하고 처리했다. 우리는 그 일에 대해 크게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무척 중요한 일이었다. 자칫하다가는 후반기에 직원 급여도 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조정을 위해 서둘러 000에게 연락했더니 이미 늦었단다. 사정 이야기하고 연말에 지장 없도록 하겠다는 다짐받았지만, 확실치 않았다. 좀 더 신중하게 생각했어야 했다. 저녁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몰랐다. 축 처진 어깨 부여잡고 퇴근했다. 씻고 누웠건만 쉬 잠이 오지 않았다. 익숙하긴 개뿔, 자책하는 마음이 온몸 가득 퍼졌다.

몇 번의 우연이라고 하기엔 기가 막힌 타이밍에 번번이 일어난다. 자만하지 말라는 신호일까. 신기하게 그런 생각 할 때마다 반대 상황이 벌어졌다. 마치 불행을 가져오는 예지력 같다.

아침 출근길, 무거운 마음으로 나섰다. 별일 없어야 하는데, 며칠간은 내내 이런 생각으로 괴로울 것 같다.

이런 예지력 필요 없는데, 어디 갖다 버렸으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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