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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환 Jun 23. 2016

의식 1

<낯선 여행자의 시간 | 개정판> 연재 #6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서 발생하는 사태들에 대해 논리적이어야 하는, 최소한 상식적이어야 하는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야만 한다


이에 투사된 진실이 과연 진실인가 하는 문제에 부딪혔을 때 나는 도구로서의 이성 그 자체에 대해 회의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회의를 통해 또 다른 존재자인 타자로서 ‘너’라는 ‘나’에 대해 회의적인 추론을 해보고자 한다.


‘너’일 수밖에 없는 너는 인식하는가? 그리고 인식하는 너는 너 자신인가. 너는 너 자신임을 알게 하는 의식의 공간으로부터 끊임없는 이탈, 즉, 저항하는 인간의 의지를 보유한 존재자인가. 또한 너는 욕망하는가. 너는 생각하며 그 생각으로 인해 욕망의 분출과 억압에 대해 혼란을 겪으며 이에 대해 번민하는가.


나는 이러한 해괴한 비약을 통해 내가 이 글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나름대로 찾아보고자 한다.


나는 내가 써나가고자 하는 이 글이 굳이 논리적이어야 할 필요성은 느끼지 않는다. 만일 나의 생각이 논리적이고 그러므로 생산적인 어떠한 가치 지향적인 목적을 가져야 한다면 내가 속한 사회의 논리적 생산성을 위한 가치 규범성은 무엇보다 국가 체계에 먼저 그 상식적인 잣대가 적용될 수 있어야 한다. 사회 혹은 국가라고 말한 체제, 체계 구성원의 의식과 지성의 현실이 과연 ‘그럴 능력이 있는가’라는 회의에 대해 나는 ‘그렇지 못하다’라는 매우 심각한 자문자답을 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내가 속한 ‘사회적 의식의 현실’이다.


비논리적이며 비이성적이고 또한 비상식적인 생산성만 추구하던 폭력적인 어느 때의 계보를 이어받은 이 비생산적인 야만의 시대에 지금 분노를 표출하지 못한다면 나는 그냥 생각하는 그러나 거세된 한 마리 짐승일 뿐일 것이라는 자괴감에서 헤어날 수 없을 것 같다.


인간은 오류를 범할 수밖에 없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시간에 비례하여 혹은 우연한 사건, 사고에 의해 소멸할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그의 이성적 능력 역시 유한하다. 이러한 비참은 인간의 오류를 매우 자연스러운 속성으로 만들어 준다. 언제부터인가—그것은 기록이 가능해지기 시작한 아득한 고대의 어느 때로부터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논리가 등장하고 이 논리의 등장으로 인해 인간은 오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희망을 품기 시작했다. 그 희망은 프로메테우스가 신전에서 훔쳐 인간 세계에 가져다준 불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논리의 모든 과정이 반드시 논리적인 결과에 도달하고 맺어지는 것만은 아니다. 단순한 그러나 그 단순성으로부터 이루어지는 직관에 의해, 우연한 그러나 순리에 의해 당연하게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 사태에 따라 이루어지며 그것을 논리적으로 입증하는 것이 진리의 발견보다, 새로운 명제의 창조보다 더 어려울 수도 있다.


인간의 이성은 오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또한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서 발생하는 사태들에 대해 논리적이어야 하는, 최소한 상식적이어야 하는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태를 이루는 개별 사실에 대한 인식의 기본 문제이다.


우리 사회는 이념으로 나누어져 있다고 믿고 또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나는 이것이 이념의 문제 즉, 이성적 이념, 사상이나 철학의 문제가 아니라 집단의식으로 굳어진 권력에 놀아나는 편집적이며 미신적 광란에 불과한 것이라고 본다. 어떠한 ‘주의자’들이 권력 쟁투에 성공하여 집권하고 그것에 저항하는 사람들, 그것을 수긍하지 못하는 사람들과의 대결에서 발생하는 현상들은 세상 어느 곳에서도 흔히 생기는 권력 추종적 의식의 일부이다. 미신적 이념은 이성적이고 논리적 사변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억압이나 지배적 폭력 의식의 세습에 의해 이루어지는 맹목적 확신과 정체불명의 믿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우리는 고도로 발달한 현대 문명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의식은 이 고도의 문명과는 정 반대편에 있는 고태적 부족 중심의 집단의식으로 퇴행하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문명의 이기가 가져다준 편의가 이성을 나태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굳이 나태하지 않은 분야가 있다면 어떻게 좀 더 편리할까 하는 쾌락적 집착에, 어떻게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가 하는 변태적이며 편집적 사고에 집중하는 것뿐이다.


이러한 의식은 이해관계와 쉽게 영합한다. 이해관계 자체에 대하여 당, 부당의 잣대를 댈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이해관계가 추구하는 것이 어느 편의 파괴적 몰락을 전제로 한다면 이것은 필연적으로 사회 체제 전체를 불행하게 만든다. 어느 한 부류의 편의와 이해 관계를 위해 공동의 체제를 파괴한다면 그 사회는 스스로 붕괴하고 말 것이다. 따라서 편의적 이해관계만을 추구하는 사회는 결국 그 자체의 파멸을 초래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인간 내면의 모든 것은 무의식의 심연으로부터 출발한다. 어떤 때에 의식과 무의식은 충동과 융합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충동에 의해 지배될 것 같던 인간의 행태는 대부분 의식, 무의식과 결부되어 행위 하게 마련이다. 본능적, 감정적 충동들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 같지만, 또 그것이 어떤 행태 혹은 행위의 동력으로서 단초가 될 수는 있겠지만 그것 차제가 전체 인간 행태와 행위를 지배하는 것은 아니다. 이 모두가 의식의 영역을 거치며 이성에 의해 제련되어지기 때문이다.


의식은 현실 사태를 이루는 사실들을 인지하여 그것들을 인간 존재 내면에 도달하도록 끌어당기고 인식의 중력에 의해 인간에게 도달한 어떠한 사태와 현상들이 자리 잡는 영역이다. 한 인간의 의식에 오류가 자리 잡게 된다면 그 존재자의 행태는 오류일 수밖에 없다. 물론 의식이라는 것이 단순한 사태와 현상의 입출력 통로인 것만은 아니다. 의식의 복잡하고 심오한 작용을 낱낱이 밝히는 것은 매우 어려운 만큼 단편화해서 이야기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인간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의식을 지배해야 한다. 인간을 억압하기 위해서는 의식을 억압해야 한다. 인간을 불행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의식에 불행의 씨앗을 뿌려야 한다. 인간이 존재자로서 가장 원초적인 체험을 하고 원초적 원형이 자리 잡는 곳은 무의식이지만 의식은 그의 존재 형태의 고유성을 선택, 결정하게 하고 존재자 행위의 이성적 고유성을 지배하는 곳이다.


인간은 고유한 존재자로서 정체한 상태로 고착화된 삶을 살아가지 않는다. 인간은 끊임없이 욕망하며 또한 추구한다. 추구한다는 이성적 의지 의욕과 욕망한다는 본능적 욕망 욕구가 인간을 살아가게 하고 또한 인간 존재의 삶은 이것들로 인해 버무려지게 마련이다.


존재자의 무의식 속에 지배욕이 원형의 형태로 자리 잡았을 경우 인간의 삶은 파멸의 과정으로 이행해 나아갈 수밖에 없다. 자신에 대한 파괴와 이를 보상하기 위한 타인에 대한 파괴는 서로 번갈아 가면서 고통을 가하게 된다. 자신에 관한 것은 타인에 대해 우월적 쾌감을 느낄 수 있는 것들로만 치장한다. 타자나 자신이 속한 체제를 위한다고 하는 것들은 최종적으로 자신만의 성취를 위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고통에 대한 보상, 즉 보복으로써 망상과 소 영웅적 번민에만 휩싸여 앙심을 품게 된다. 이 망상의 최종 목적은 자신을 위한 것은 망상적 명예이며 타인에 대한 것은 폭력적 지배이다. 자신에 대해 부당한 것은 허상이고 타자에 대해 부당한 것은 그 자신의 내부에 매우 잔인하게 실재한다.


명예와 지배는 힘에 의해 융합되어 하나의 일방적인 권력 행태로 드러난다. 또한 그 행태의 행위를 지배하는 의식 속에 탄생하게 되는 것이 바로 맹목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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