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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환 Jun 24. 2016

의식2

<낯선 여행자의 시간 | 개정판> 연재 #7

인간 내면의 모든 것은 무의식의 심연으로부터 출발한다. 어떤 때에 의식과 무의식은 충동과 융합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충동에 의해 지배될 것 같던 인간의 행태는 대부분 의식, 무의식과 결부되어 행위 하게 마련이다. 본능적, 감정적 충동들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 같지만, 또 그것이 어떤 행태 혹은 행위의 동력으로서 단초가 될 수는 있겠지만 그것 차제가 전체 인간 행태와 행위를 지배하는 것은 아니다. 이 모두가 의식의 영역을 거치며 이성에 의해 제련되어지기 때문이다.


의식은 현실 사태를 이루는 사실들을 인지하여 그것들을 인간 존재 내면에 도달하도록 끌어당기고 인식의 중력에 의해 인간에게 도달한 어떠한 사태와 현상들이 자리 잡는 영역이다. 한 인간의 의식에 오류가 자리 잡게 된다면 그 존재자의 행태는 오류일 수밖에 없다. 물론 의식이라는 것이 단순한 사태와 현상의 입출력 통로인 것만은 아니다. 의식의 복잡하고 심오한 작용을 낱낱이 밝히는 것은 매우 어려운 만큼 단편화해서 이야기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인간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의식을 지배해야 한다. 인간을 억압하기 위해서는 의식을 억압해야 한다. 인간을 불행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의식에 불행의 씨앗을 뿌려야 한다. 인간이 존재자로서 가장 원초적인 체험을 하고 원초적 원형이 자리 잡는 곳은 무의식이지만 의식은 그의 존재 형태의 고유성을 선택, 결정하게 하고 존재자 행위의 이성적 고유성을 지배하는 곳이다.


인간은 고유한 존재자로서 정체한 상태로 고착화된 삶을 살아가지 않는다. 인간은 끊임없이 욕망하며 또한 추구한다. 추구한다는 이성적 의지 의욕과 욕망한다는 본능적 욕망 욕구가 인간을 살아가게 하고 또한 인간 존재의 삶은 이것들로 인해 버무려지게 마련이다.


존재자의 무의식 속에 지배욕이 원형의 형태로 자리 잡았을 경우 인간의 삶은 파멸의 과정으로 이행해 나아갈 수밖에 없다. 자신에 대한 파괴와 이를 보상하기 위한 타인에 대한 파괴는 서로 번갈아 가면서 고통을 가하게 된다. 자신에 관한 것은 타인에 대해 우월적 쾌감을 느낄 수 있는 것들로만 치장한다. 타자나 자신이 속한 체제를 위한다고 하는 것들은 최종적으로 자신만의 성취를 위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고통에 대한 보상, 즉 보복으로써 망상과 소 영웅적 번민에만 휩싸여 앙심을 품게 된다. 이 망상의 최종 목적은 자신을 위한 것은 망상적 명예이며 타인에 대한 것은 폭력적 지배이다. 자신에 대해 부당한 것은 허상이고 타자에 대해 부당한 것은 그 자신의 내부에 매우 잔인하게 실재한다.


명예와 지배는 힘에 의해 융합되어 하나의 일방적인 권력 행태로 드러난다. 또한 그 행태의 행위를 지배하는 의식 속에 탄생하게 되는 것이 바로 맹목이다.


맹목의 탄생은 곧 악의 탄생을 의미한다. 맹목에게 이성이나 상식이나 좀 더 차원을 달리하는 논리적인 것은 아무런 쓸모가 없거나 거추장스러운 장애물일 뿐이다. 맹목이 지배하는 의식에는 억압에 의해 인식의 통로가 닫혀 있거나 순수한 주체적 의지에 의해 굳세게 잠겨 있다. 우리는 이것에 의해 노예근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부조리한 탐욕적 쟁취를 용납하며 추종하고 찬양한다. 그렇게 행해지는 영웅적 과감성에 탄복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맹목이 결심하는 비이성적이고 냉혹한 확신에 최면에라도 걸린 듯이 순종한다. 이것이 이해관계를 통해 결속되어 있다면 그것이 비록 파괴적일지라도 원인이나 이유는 묻지 않고 순교적 찬양의 대상이 된다. 우리의 현대 발전사가 그러했으며 아직도 그 피지배의 향수에 모두가 미쳐 있다.


인간 존재의 의식은 생각보다 미개하다. 동시에 인간의 의식은 생각보다 훨씬 더 미지의 영역에 속해 있다. 그 의식은 또한 생각보다 단순하며 이것은 생각보다 훨씬 덜 인간적이고 훨씬 더 야만적이다. ‘인간 존재의 의식’은 그렇기 때문에 그가 존재자로서 노예적 인간인지 아니면 ‘주체적인 자아 인식 작용’에 동기를 부여하며 인식하는 인간 존재인지를 알 수 있는 판단 근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존재자 대부분의 행태에 지배적 영향을 미치면서도 설명하기 난해한 영역이기도 하다.


지배자들에게 인민이라 불리는 시민의 의식은 언제나 군침 도는 먹잇감이 아닐 수 없다. 외형적으로는 법적 제도를 통해 무언가를 하는 듯하지만, 실제 목표는 인민을 주권자에서 피지배자로 몰락시키고 그들의 의식을 물리적으로 지배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피지배적 의식으로 잠식된 대중들을 제외하고 폭력적 지배자에게 반항하고 저항하는 존재자는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인간의 지배적 욕망은 <반항하는 인간>1에 비해 훨씬 동물적이며 기만적인 사회적 생존 생태에만 부합한다. 또한 이러한 원초적 탐욕은 자연상태보다 훨씬 더 비이성적일 수도 있다.


맹목에 저항하는 인간에 비해 맹목으로 폭주하며 인간을 지배하고자 하는 인간 존재의 의식은 야만 그 자체일 수 있다. 지배욕에 지배되는 인간, 힘에 굴종하는 존재, 금력과 완력에 의해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고 확신하는 인간 존재,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재료로 위대한 인간이 되고자 욕망하는 존재자는 적어도 본능적 욕구에 순응하는 그리고 겉만 인간이면서 동물의 생태에 그대로 부합한다고 단정할 수 있다.

<계속>



알베르 카뮈의 저서 <반항하는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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