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에서 노트 필기를 하지 않으면 불안한 당신을 위해
한국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면 (나 역시도 그렇지만), 한 가지 잘하는 것이 생긴다.
바로 ‘노트 필기’.
노트 정리를 잘하는 것으로 수행평가 점수를 주기도 하며, 잘 정리된 노트 필기는 친구들끼리 돌려볼 정도로 뛰어난 참고자료가 되기도 한다.
마치 공부를 잘하는 사람의 비법은 빼곡히 정리된 노트필기 인양 생각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렇게 자란 우리가 회사에 들어가게 되면 발군의 필기능력으로 크고 작은 회의에서 노트 필기를 한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여럿이 들어가는 회의는 여럿이 들어가는 대로, 직속 상사와 1:1 면담을 하더라도 노트필기는 나에게 필수적이었다.
노트필기를 하는 이유는 ‘내가 해야 할 일을 빼놓지 않고 하기’ 위함이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굉장히 많은 회사 사람들이 그렇게 일을 하고 있었고, 선배들은 ‘To-do list’라는 멋진 이름으로 하나씩 해야 할 일을 지워가며 꼼꼼히 일을 하는 방법을 가르쳐줬다.
그런 식으로 일을 하며 7년 정도의 경력을 쌓았다.
나름 중간관리자로서 탄탄한 커리어를 쌓고 있었고, 능력도 인정받아 해외 프로젝트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해외 프로젝트를 하는 곳은 홍콩, 홍콩 사장에게 직속 보고를 하게 되었다.
홍콩의 사장은 나보다 한 살 많은 여성리더로 중국계 일본인이었다.
군대를 가지 않았다 하더라도 나랑 경력이 3-4년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는데 사장이 되었다니, 꽤 빠른 편이었다.
‘저 사람은 어떤 능력이 있기에 저렇게 빨리 승진을 할 수 있었을까?’
‘나와 저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
‘나도 3-4년 뒤에 저렇게 사장이 될 수 있을까?’
‘내가 군대만 안 갔으면 1년 안에 사장이 될 수 있을까?’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프로젝트 특성상 거의 매일같이 1:1 면담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 사장이 내게 말했다. (우리는 영어로 대화했다)
“아니 그런데 왜 그렇게 필기를 열심히 해? 뭘 그렇게 열심히 쓰는 거야?”
평소에 직설적인 화법으로 사람을 당황하게 하는 면이 있을 정도인 사장이 내게 물었다.
“응 우리가 논의하면서 내가 해야 할 일들, 잊지 않으려고.”
나는 어이없다는 듯이 너무나도 당연한 것을 왜 묻냐는 투로 대답했다.
“내가 너한테 제안하는데, 딱 2주일만 미팅에 들어갈 때 필기를 하지 말아 봐. 변화가 느껴질 거야.”
왠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대로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정말 나는 미팅에 들어가면서 아예 필기구를 갖고 가지 않았다.
처음에는 좀 불안했다.
내가 무언가 놓치면 어떻게 하나, 과연 내가 잊지 않고 잘 follow up 할 수 있을까 등등.
하지만 노트필기를 멈추고 회의를 참석하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미팅에서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가 더 잘 이해가 되고, 표정과 말투 등을 보면서 미팅의 흐름이 더 잘 보이기 시작했다.
저 사람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과연 내가 이 일을 해야 하는지 안 해도 되는 일인지, 뭐가 중요하고 뭐가 중요하지 않은지가 훨씬 명확하게 이해가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미팅을 하고 나니 이 미팅의 결론이 무엇이고, 내가 해야 할 일이 좀 더 단순하고 명확하게 정리가 되었다.
필기를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정말 중요한 내용들은 오히려 더욱 집중해서 기억하기 위해 애를 썼다.
물론 미팅에서 논의되었지만 생각이 안나는 부분들도 있었지만 생각이 안 날 정도로 중요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이 되었다.
필기를 하지 않는 대신, 나는 다시 자리로 돌아와서 미팅에서 있었던 내용들을 한번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기 시작했다.
머릿속에 이해된 내용들을 정리하며, 미팅의 장면들을 다시 떠올리며 내가 해야 할 일을 순서대로 정리하며 나의 스케줄을 정리했다.
언제 누구와 이야기를 어느 정도로 하고, 내가 혼자 해야 할 일은 무엇이며, 언제까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언제까지 누구에게 답을 줘야 할지 등등.
이렇게 일정까지 정리를 하다 보면, 나의 일정상 어떤 업무가 더 우선인지를 정리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노트 필기를 하지 않고 미팅에 들어가기 시작하기를 2주,
그 뒤로도 한 달이 지나고, 5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미팅에서 필기를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업무와 하루 일과는 훨씬 명료해졌다.
나의 이런 노트 필기를 그만둔 경험을 회사의 동료 직원과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 동료는 내게 업무 특성마다 다른 것이 아닌지, 하는 역할마다 실무자와 관리자가 다른 것이 아닌지 등등을 물었다.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 역시도 그런 노트필기를 그만두기 직전까지 미팅에서 꼼꼼히 메모를 하지 않으면 너무나도 불안했던 사람이다.
딱 2주만, 미팅에서 필기를 하지 않고 들어 보자.
미팅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생각이 보이고, 나의 생각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