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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도 Feb 16. 2023

사고로 멈춘 KTX 기차 안에서 만난 인도 아저씨

며칠 전, 대전에 볼일이 있어 KTX를 타고 혼자 당일치기 출장을 다녀왔다.


아침에 일찍 서울역에서 대전역으로 출발을 하여, 대전 충남대에서 오후에 있는 일정을 마치고 예정 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다시 서울로 돌아오기 위해 대전역에 도착을 했다.


기차 시간을 조금 앞당겨 예정보다 약 40분가량 출발 시간이 빠른 기차로 바꿨다. 


그래도 약 30분 정도 시간이 남아 1층에 있는 라면집으로 갔다.


뭔가 대단한 맛집처럼 홍보하고 있었고 사람들도 빼곡해서, 맛있어 보이기는 했지만 텅 비어있는 일본 라면집 앞 '일반 라면'집으로 갔다. 


원래는 콩나물 국밥을 하던 집에서 라면을 한다고 하니 뭔가 육수를 써서 라면을 끓이는 것 같다.


라면은 그럭저럭 맛있었지만 함께 나온 김밥은 차갑고 딱딱하게 굳어서 몇 알 먹다가 남겼다.


탄수화물을 좀 많이 먹었나 싶은 더부룩함이 있었고, 기차를 타러 가는 길에 생막걸리를 포장해서 파는 곳이 있어 잠깐 기웃거렸다.


막걸리 치고는 가격이 좀 있고, 내 앞에 아주머니가 너무 오랫동안 이런저런 질문을 하는 바람에 왠지 김이 새서 그냥 기차를 타러 플랫폼으로 내려왔다.


대전에서 KTX를 타고 서울로 올가는 시간은 1시간 남짓, 사실 잠이 들기도 애매하고 무언가 일을 꺼내서 하기에도 촉박한 시간이다.


그래서 그냥 핸드폰으로 게임이나 하면서 올라가야지 싶었다.


오늘 만나 명함을 교환한 분들을 명함을 정리해서 가방에 넣어 놓고 내일 어플로 다시 저장을 해야지 생각을 했다.


한 20분 정도 달렸을까, 기차는 왠지 속도가 더뎠다. 


그리고 천안 아산역을 앞두고는 앞선 열차가 '미확인 물체'와 충돌이 있어 천천히 운행하고 있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별일 아니겠거니 하면서 아이들과 요새 한창 함께 하고 있는 핸드폰 게임에 열중했다.


그런데 영 기차의 속도가 나지 않는다.


한참을 가다 서 다 하더니 천안 아산역에 한참만에 도착했다.


함께 서울까지 가는 사람들은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기차 안에는 다시 한번 


'앞선 열차가 미확인 물체와 충돌이 있어 조치 후 다시 출발할 때까지 지연운항을 하겠다'며 사과하는 안내문이 나왔다.


아무래도 그 '미확인 물체'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수습하는데 시간이 좀 걸리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미 한 30분 정도 정차를 하고 있노라니, 사람들은 초조해했고 무언가 객실밖으로 나가 승무원에 항의하는 모습도 보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처럼 별일 아니거니 하면서 각자 보고 있던 휴대폰을 열심히 들여다보았다. 


나처럼 출장을 갔다 온 사람들이 고단한 하루 일정을 마치고 혼자서 콘텐츠에 빠져있는 시간이었으리라.


화장실에나 다녀올까 싶어서 좌석 뒤쪽으로 걸어가는데 외국인 한 명도 보였다.


아까부터 계속 비상 안내방송은 한국어로만 나오고 있는데 한국어를 할 줄 알려나 싶었다.


인도나 파키스탄 쪽 사람인 것 같은데, 멀끔하게 정장을 차려입고 있는 것을 보니 외국인 주재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무심코 지나쳐 화장실에 다녀왔다.


자리에 돌아오면서 다시 그 외국인 아저씨를 봤는데 약간의 초조함이 있어 보였지만 동요하지 않는 주변의 한국 사람들을 보며 크게 걱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나도 자리로 돌아와 인터넷 뉴스 기사를 찾아봤다. 


혹시라도 KTX가 지연되고 있는 것에 대한 기사가 나오지 않았을까 싶었다.


하지만 안내방송처럼 '미확인 물체와 충돌로 지연 운행'한다는 상보만 나왔을 뿐이었다.


그러면서 또다시 시간이 한 30분 정도 지났을까?


열차 안에서는 다시 안내 방송이 나왔다.


'선행 열차에서 사상사고로 인해 지연 운항되고 있습니다.'라는 안내방송이었다.


'사상사고'라면 누군가 다치거나 죽었다는 뜻인가?


그렇다면 충돌했다는 '미확인 물체'가 사람이었다는 뜻인가? 


안내방송은 연거푸 나왔고, 대기 시간이 1시간 이상 길어지자 사람들은 조금씩 초조해하기 시작했다.


열차 대기를 포기하고 나가서 다른 교통수단을 찾는 사람들도 보였다.


천안아산역의 다른 레일에 서있는 다른 열차들도 모두 멈춘 채로 대기 중이었다.


나는 아내한테 상황을 전했고, 회사 동료들에게도 내 상황을 전했다.


살면서 겪어본 적 없는 일이기에 얼마나 기차가 늦어질지, 집에는 언제 들어가고 내일 회사는 정상적으로 갈 수 있을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잠깐 열차 연결통로로 나와 상황을 봤다.


금연구역인 플랫폼으로 나와 담배를 태우며 서로 짜증 내며 위로하는 연인에, 어딘가로 전화를 하며 약속을 늦추거나 취소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뭔가 디스토피아적 영화에나 나오는 장면들이 보였지만, 이미 열차가 기차역에 정차하고 있는 상황이고 비상상황이면 언제든 열차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생각에 나는 크게 동요하지는 않았다.


연결통로에 있는 승무원도 계속해서 무전기를 통해 상황에 대한 지시를 기다리며 초조해하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에, 특별히 승무원들도 언제 출발할지는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리를 돌아오려는데 아까 봤던 그 외국인 아저씨가 나왔다.


그리고는 심각한 표정으로 여기저기를 보는데, 그 아저씨가 볼 수 있는 정보는 아무것도 없었다.


마침 한국어로 다시 반복되는 '사상사고로 인한 열차 지연'방송이 나왔다.


무언가 집중해서 들으려고 하는 아저씨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왠지 홍콩에 살 때 광둥어로만 나오는 안내방송에 당황해하던 나의 모습이 떠올라, 결국 오지랖을 부리고 말았다.


"지금 나오는 안내방송 알아들어요? Do you understand the announcement?"


갑작스러운 영어에 화들짝 놀라며 나를 돌아본 아저씨는,


"아니요. 대체 무슨 상황인 거예요? No. I have no clue. What's going on here?"


그렇게 나는 앞선 열차에 사고가 있어 사고를 수습할 때까지 출발을 못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언제 출발할지 모른다고 하자 여기서 서울까지 택시로는 얼마나 걸리냐고 물어, 2시간 정도 걸리고 한 20만 원 정도 내면 가지 않을까 하고 대답해 줬다.


그리고 한참을 고민하더니, 나에게


"당신은 어떻게 할 참이요? So, What are you going to do?"


하고 물었다.


나도 살면서 처음 있는 일이라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지만 섣불리 다른 방법을 택하는 것보다는 기다려보려고 한다고 이야기했다.


그 사람도 체념한 듯 기다려야겠다고 하며, 괜찮으면 내 옆자리에 앉아도 되겠냐고 해서 흔쾌히 허락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싱가포르에 살고 있는 인도인 아저씨이며, 한국에는 출장을 왔고 내일 다시 싱가포르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가족들에게는 내가 설명한 대로 상황설명을 했고, 비행기 시간은 내일 밤 비행기라 그전에는 서울로 돌아갈 수 있지 않겠느냐며 한결 여유를 찾은 모습이었다.


아이폰을 충전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며 혹시 충전기를 빌릴 수 있겠냐고 하여 빌려주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 보니 그가 하고 있는 일이 내가 했던 일과 겹치는 것도 있고, 나중에 서로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자며 명함도 교환하고 링크드인에서 친구도 맺었다.


이윽고 기차는 출발했고 30분 뒤 우리는 아수라장이 된 서울역에 도착했다.


"생각지도 못한 열차 사고로 정말 긴 하루였네! It was a long day with an unexpected accident!"


헤어지기 전 이런 말을 꺼내자,


"그러게 말이야 그래도 넌 대전에서 탔지만 난 부산에서 타서 거의 10시간을 기차에 있었어 말이 돼? That's what I'm saying. You departed from Daejon but I came from Busan. Almost 10 Hours on the train from the morning. Can you believe that?"


"듣고 보니 그러네. 그래도 기차가 늦은 김에 당신하고 만났으니 그나마 즐거웠어. You are right! But pleased to meet you though!"


"아, 나도 그 얘기할 참이었어. 가서 아내한테 얘기하려고 했었거든, 좀 더 밝은 면을 말이야! Yes, I was going to say that! I'm going to tell my wife - the bright side of it!"


그렇게 우리는 피곤하지만 반갑게 작별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외국에서 생각지도 못한 일을 겪으면 정말 답답한 경우가 많다. 대충 눈치껏 살아남을 수는 있겠지만, 가족과 함께 있을 때는 더더욱 불안한 마음이 크다.


그래도 뭔가 외국인 아저씨에게 도움이 되고, 한국에 대해 좀 더 좋은 기억을 갖고 살아갈 수 있게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천안아산역 인근서 KTX에 치여 1명 사망…열차 연쇄 지연 중 | 연합뉴스 (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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