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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찐작가 Oct 07. 2020

 첫 회식 대성통곡하다

신규 간호사 첫 회식, 서럽게 운 사연

지금은 간호사로 2년 동안 일하면서 나름대로 회식자리의 막내 역할을 톡톡히 하는(?) 회식의 달인이 되었지만 아찔한 회식 에피소드가 있다. 그건 바로 신규간호사로 입사 후 1달 차 때의 첫 부서회식 자리였다.


한 달차 간호사로 프리셉터십 기간이었던 나는 항상 엄청난 긴장상태로 내 능력의 150%를 끌어다가 근무하고 있었다. 하지만 프리셉터 선생님이 가르쳐준 것도 실수하는 일이 있었고, 대단한 센스와 대처능력을 요하는 상황들이 많았다. 간호간병 통합병동인지라 콜벨이 울리면  뛰어가기 바빴는데 올드 선생님 담당 환자들의 응대에 실수해서 혼이 많이 났다. 안 그래도 조금 소심한 면이 있는데 선임들의 가시 돋친 말에 상처도 많이 받았다.    





어느 날 근무 중인 선생님들을 제외하고 약 40명의 간호사와 10여명의 조무사가 모여 첫 회식이 시작되었다. 역시나 술이 문제였다, 신규들은 선임들이 따라준 소맥만 연달아 4~5잔을 받아마셨다. 원래 술이 약한 편은 아니지만 데이 근무를 마치고 피곤한 상태로 급하게 마셔서인지 금새 취해버렸다. 평소 다소 감정적이 되는 주사가 있는 나는 화장실에서 갑자기 눈물이 터졌다. 화장실에서 문을 잠그고 안에서 계속 울었다. 화장실이 매우 협소했던 탓에 내가 우는 걸 부서선생님들은 금방 알아차렸다.       


서러운 건 참 많았다, 첫째, 부서에서 나보다 먼저 입사한 동기가 9명이나 되었는데 일 잘하는 동기들과 비교되는 게 서러웠다. 심지어 경력직 신규인 동기들도 있어서 이들과의 실력차이는 정말 하늘과 땅처럼 느껴졌다, 나는 아직도 옵져(observation, 관찰하는) 단계인데 액팅을 뛰는 동기들은 대단하게 느껴졌다.

둘째, 프리셉터 선생님은 ‘엄마’ 라는 데, 우리 프리셉터 선생님은 엄격하고 완벽주의자 같았고, 칭찬을 해주는 일도 가뭄에 콩나는 것 같았다. 느리고 뎌딘 나를 매번 채찍질 했다. 나중에 독립할 때가 돼서는 응원도 많이 해주시고 실수를 덮어 주실 때도 많았지만 처음 일을 배울 때는 차가운 엄마처럼 느껴졌었다.

셋째, 그냥 모든 게 다 낯설고 새로워서 힘들었다. 잘 짜인 업무 환경 속에 나만 이방인 같았다. 액팅을 나갔다가 들어오면 간호사 스테이션에서 선생님들 끼리 하는 모든 대화가 내 뒷담화처럼 느껴졌을 때도 있다.


서러운 만큼 펑펑 울었고 눈물샘은 조절이 되질 않았다. 분명 다음날이면 후회할 걸 알면서도 눈물을 그칠 수가 없었다. 착한 선생님들은 계속 달래주셨고 수간호사 선생님 옆자리에 앉혀두고 술을 더 마시지 못하게 막아주셨다.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겨우 진정이 되었다.      




다음날은 야속하게도 데이 근무였다. 택시를 타고 출근하면서 기사님과 대화를 하는데, 택시 기사님은 우리병원에 대해 잘 모르는 분이었다. 기사님도 환자로서 병원생활을 오래 하셨던 분이어서 어떤 병원이 직장으로 적당한지에 대해 대화했다. 우리 병원이 저 멀리 보일 때쯤 기사님이 말씀하셨다,

“저 정도 병원이 일하기 딱 좋은 병원이지.”

힘들다고 한참을 얘기했던 병원이 바로 저 병원인데. 그래도 남들이 보기엔 일하기 좋은 병원으로 보였나 보다.     


출근 전 부서 선생님들에게 죄송스런 마음을 담아 사과의 의미로 음료수를 한 박스 샀다. 평소보다 20분은 더 일찍 출근했는데도 먼저 출근하신 차지 선생님이 있었다. 어제 일이 죄송해서요, 이거 드시고 잊어주세요, 라는 말과 함께 음료를 건네 드렸다. 돌아온 반응은 ‘응, 왜? 무슨 일 있었어?’ 라는 말이었다. 어제 울었던 얘길 하니 ‘뭐 그럴 수도 있지,’ 라며 웃으셨다. 다른 선생님들도 어제 별일 없었다는 듯 대해주셨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기억이 안 나는 선생님들도 있었겠지만, 한 명도 나무라거나 무안 주는 사람이 없었다. 참 다행이었다. 그 다음 부터는 병동 회식 때 가급적이면 과음하지 않으려 애썼던 것 같다.      




신규시절 참 많이 울었다. 울면 지는 것 같아서 허벅지를 꼬집으며 눈물을 참았다는 동기들도 있었지만 나는 그 정도로 강한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퇴근하면 기숙사까지 엄청 천천히 걸어가곤 했는데, 눈물을 뚝뚝 흘리며 걸어가는 10분 내내 소리 없이 울었던 적도 많았다. 병동에서 참았던 눈물이 수도꼭지를 튼 것처럼 줄줄 흘러나왔다.     


정말 힘든 날이면 기숙사가 아닌 집으로 가는 빨강 버스를 탔다. 집까지 가는데 거의 1시간 정도는 걸렸지만 집에서 가족 중 아무나 붙잡고 울고, 하소연하고, 욕하면 다음 날은 어떻게든 출근 할 수 있었다.       


집에 가지 못하는 날이면 기숙사 룸메이트들이 많은 위로가 되었다. 기숙사 룸메는 내 대학 동기이자, 휴학한 나보다 1년 먼저 졸업한 다른 병동의 2년차 선배 간호사였는데, 고민도 많이 들어주고 라인 잡는 팁을 알려주기도 하는 좋은 친구였다. 또 옆방에는 나와 같은 해에 입사한 중환자실 동기가 있었다. 그 친구와도 서로 근무 중에 실수 했던 얘기, 어이없게 일어났던 많은 일들을 털어놓았다. 신규 간호사라는 힘든 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건 내가 잘나서 라기 보단, 옆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무거운 짐을 나누어져서 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첫 회식 때 있었던 일을 웃으면서 이야기 할 수 있지만, 첫 회식 때는 정말 대성통곡을 하지 않고선 못 버틸 정도로 힘들었던 것 같다. 지금도 신규들 중에선 나보다 더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신규들도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이야기 해주고 싶다. 너는 충분히 잘하고 있고 이 모든 시간은 언젠간 지나갈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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