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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수 Aug 28. 2020

프롤로그 - 동방신기, JYJ 남팬의 덕질 인생기

동방신기라는 이름의 기억

지금은 비록 세상의 눈치를 보는 가련한 월급쟁이이지만 이래뵈도 우리는 대한민국 최초의 x세대였고, 한땐 오빠들에 목숨 걸었던 피끓는 청춘이었으며, 일류 역사상 유일하게 아날로그와 디지털 그 모두를 경험한 축복받은 세대였다. 70년대 음악에 80년대 영화에 촌스럽다고 비웃음을 던졌던 나를 반성한다. 그 음악들이 영화들이 그저 음악과 영화가 아닌 당신들의 청춘이였고, 시절이였음을. (중략) 뜨겁고 순수했던 그래서 시리도록 그리운 그 시절. 들리는가, 들린다면 응답하라. 나의90년대여
 - <응답하라 1994> 마지막 회, 성균의 나레이션


과거 5인조 시절의 동방신기 ⓒSM Ent.


음악은 추억을 저장한다. 철 지난 곡을 들을 때면 그 노래를 한창 듣던 시기의 기억들이 떠오른다. 그것은 아마도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 일상의 감정과 느낌들을 운율 속에 끼워넣기 때문이리라. 그렇게 무의식의 악보에 그려진 기억들은 음악과 함께 되살아나 나를 간지럽힌다.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도 소멸되지 않는 음악의 생명력은 여기에서 나온다.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곡들이 반드시 눈물콧물 쏙 빼는 발라드 곡이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 누군가에게는 의미 모를 일본 노래도, 처음엔 난해하기에 그지없는 SM엔터테인먼트 특유의 댄스곡(SMP)도 그런 추억의 악보가 될 수 있다. 내게는 동방신기가 그런 존재다.


동방신기 1집 <Tri-Angle> ⓒSM Ent.


동방신기가 처음 데뷔했을 때만 해도 나는 그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이제 와서 솔직히 말하자면, 약간은 거부감이 들기도 했다. 그것은 같은 남자로서 꽃미남 아이돌에게 느끼는 시샘과는 다른 종류의 감정이었다. 동방신기가 원래는 동방불패라는 이름으로 데뷔할 뻔했고, 그와 동시에 거론된 후보군이 오장육부 내지는 전먹고(전설을 먹고 사는 고래)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정말 경악스러운 느낌이었다.


거기에 더해 스스로를 '최강', '영웅'으로 칭하는 예명이나 해괴망측한 헤어스타일, 그리고 부모님과 함께 음악방송을 시청하기에는 민망한 망사옷(Tri-Angle)은 나를 비롯한 주변 남자 친구들의 반감을 사기에 충분했다. 여느 남중남고 출신들에게 그렇듯 그 시절 우리에게는 SG워너비나 버즈, 윤도현 같은 락발라드 가수들이 최강이고 영웅이었다. 


동방신기는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즈음 한국에서의 활동을 접어두고 일본 활동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물론 나는 동방신기의 <오정반합>이나 <풍선> 같은 노래들을 잘 알고 있었고, 그들의 인기가 한때 우리나라 연예계를 정복했던 H.O.T에 버금간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눈에서 멀어지니 존재감 또한 자연스레 엷어져갔다. 당시 좋아하던 여자애가 시아준수의 열렬한 팬이었던 탓에 이따금 대화에서 거론되기는 했어도 내가 그들의 노래를 찾아듣거나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때까지는 동방신기를 그저 대형기획사 소속의, 잘 생긴 아이돌 정도로 여겼을 뿐이었다.


2년 가까운 시간이 흐르고 2008년 가을이 되었을 때, 그들은 오랜 공백을 깨고 돌아왔다. <주문(MIROTIC)>과 함께. 적어도 나에게 그 곡은 그동안의 인식을 바꾸는 일대 전환이었다. 많은 아이돌들이 립싱크 내지는 과한 AR로 빈축을 사던 시기, 동방신기는 과격한 안무에도 흐트러짐 없는 가창력을 선보이며 나를 비롯한 남성들의 마음도 사로잡았다. 특히 2008년 MKMF(MAMA의 전신, Mnet KM 뮤직 페스티벌의 약자다) 무대가 그랬다. <Wrong number>와 <주문(MIROTIC)>을 말 그대로 생 라이브로 소화하는 그들의 무대를 보면서 나는 귀신에 홀린듯이 동방신기에 빠져버렸다. <Hug>나 <Rising sun>으로 어렴풋이 기억하던 것보다도 한층 더 성장한 모습이었다. 사람들은 그들에게 완성형 아이돌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나는 그제야 동방의 신이 일어난다는 그 이름에 내재된 함의를 인정할 수 있었다.


2008년 MKMF ⓒMnet (https://youtu.be/mHsKB9NPLSI)


당시 나는 대학교 신입생이었는데, 주변에는 동방신기를 좋아하는 여자 동기들이 꽤 있었다. 아니다, 상당히 많았다고 해야겠다. 아무튼 그녀들은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올라와서 그런지는 몰라도 여전히 소녀 감성을 간직하고 있었다. 한 번은 여럿이 공강 시간에 눈물을 흘리며 훌쩍이고 있길래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동방신기 콘서트 티켓팅에 실패했다"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 상황이 조금 웃겼다. 다 큰 여자들 여럿이 티켓팅에 실패했다고 모여서 울고 있는 꼴이라니. 나는 "너네 애냐"고 깔깔 거리며 그녀들을 놀렸다. 결과적인 이야기이지만 그때 그 콘서트는 국내에서 다섯 명이 마지막으로 선보였던 콘서트였다. 만일 지금의 내가 그때로 돌아간다면, 나도 그렇게 펑펑 울었을 것 같다.


여하튼 그런 동기들과 어울려 지낸 덕분에, 나는 자연스럽게 동방신기에 입덕하게 되었다. 인터넷에서 이런저런 영상들을 찾아보기 시작한 것도 그 즈음이었다. 2005년 Rising sun 쇼케이스에서 시아준수가 불렀던 <체념>이라든가, 도쿄 부도칸에서 눈물을 머금고 불렀던 <Proud> 등등(여담이지만 멤버들이 이 노래를 부르다가 눈물을 흘리며 노래가 끊기는 장면이 있는데, 그때 피아노 반주 밖에 나오지 않아서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세상에 화음까지도 다 라이브였다니!). 


무엇보다 나의 입덕을 확정지은 곡은 <Begin>이었다. 다섯 멤버가 화음 꽉꽉 채워가며 부른 이 서정적인 일본 발라드는 우리나라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동방신기의 대표곡 중 하나다. 나는 마치 글을 깨우치자마자 닥치는대로 책을 탐독하는 어린 아이처럼 동방신기의 일본 곡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Forever love>, <明日は来るから(아스와쿠루카라/내일은 오니까)>, <どうして君を好きになってしまったんだろう?(도우시테키미오스키니낫테시맛탄다로우?/어째서 너를 좋아하게 되어버렸을까?)> 같은 발라드곡들을 사랑했다. 멤버 전원이 가창력도 외모도 춤도 빠지지 않는 그룹. 동방신기는 한국 아이돌 산업의 모든 역량을 응축한 결정체였다.


동방신기를 잘 모를 땐 그들이 처음부터 꽃길만 걸었다고 생각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였다. 사실 한국에서는 그렇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일본에서의 활동 만큼은 정말이지 눈물 없이 볼 수 없다. 국내에서의 빛나는 성공을 뒤로 한 채 일본으로 향한 그들은 K-POP 스타 동방신기가 아닌 신인가수 토호신기로 J-POP 시장에 데뷔했다. 상가 계단에서 노래를 부르고, 학교 축제를 돌았다. 노래는 물론 모든 예능 프로그램도 일본어로 소화했다. 오야지개그(아재개그)라든가 산노바이스(일본 원로 개그맨 세카이노나베아츠의 유행어)를 구사하는 등 철저히 현지화 전략을 택했다. 그렇게 차근차근 인지도를 쌓아나갔고 그만큼 실력도 나날이 성장했다. 그리고 일본에서 데뷔한 지 4년여 만인 2009년 꿈에 그리던 도쿄돔에 입성했다. 한국인 최초다. K-POP의 화려한 질주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일본에서 동방신기가 보여준 행보는 영화화해도 손색없을 만큼 드라마틱한 측면이 있다. 나는 그들의 노래도 노래이지만 무엇보다 그들이 일본에서 쌓아올린 성장스토리에 열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연스럽게 일본어 공부를 시작했다. <忘れないで(와스레나이데/잊지 말아줘)>라든가 <Stand by U> 같이 일본어로 된 발라드곡들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참고로 저 두 곡은 나의 최애곡이다). 가사를 무턱대고 줄줄 외우기도 했고, 번역본을 보지 않은 채 가사의 의미를 맞춰나가기도 했다. 급기야 2014년에는 취업준비를 때려치우고 일본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났다. 동방신기와 JYJ의 돔투어 콘서트를 보고 말겠다는 일념 뿐이었다. 그렇게 나는 동방신기와 함께 젊은 날을 채워나갔다.


삼천포처럼 고백하건데, 나 역시 서태지 앨범을 사기 위해 한참 줄을 서고, 십수 년도 지난 김광석의 노래를 듣는 어른들을 못마땅하게 바라본 적이 있었다. 저 나이 먹고도 저러고 싶을까? 그들이 어른답지 못하다는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치기어린 편견이었다. 서태지나 김광석은 단지 옛날 가수가 아니라 그들과 함께한 청춘들의 기억들이었음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들의 열정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건 내가 그 시절 그들 만큼의 어른이 되었다는 반증일 것이다.


X세대 청춘들에게 서태지와 김광석이 있다면, 그리고 그보다 조금 아랫세대에게 H.O.T와 젝스키스가 있다면, 우리에게는 동방신기가 있었다. 동방신기와 함께 해서 행복했던 순간들, 동방신기를 좇으며 분발했던 20대의 나날들, 앞으로의 글은 그 기억들에 관한 나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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