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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수 Sep 07. 2020

시아준수를 보기 위해, 이 일병은 두 번의 휴가를 썼다

덕질은 나를 살게 하는 원동력

군부대 안에는 '싸지방'이라고 부르는 공간이 있다. '사이버지식정보방'의 준말로 이름이 거창하기는 한데 그냥 군부대 내 PC방이라고 보면 된다. 요즘은 컴퓨터 사양이 워낙 높아지고 군부대 시설도 상당히 개선되어서 이 싸지방 컴퓨터로 리그오브레전드도 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건 내가 군복무를 하던 10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저사양 게임의 대표주자인 스타크래프트 마저도 엄청 버벅거리며 해야 할 수준이었으니 말이다. 한 달에 10만 원도 안 되는 월급을 탈탈 털어가며 싸지방 요금을 충전해도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기껏해야 싸이월드 방명록을 확인하거나 네이트온으로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는 정도였다.


밖에서는 줘도 안 쓰는 컴퓨터로 가득한 공간이었지만, 그것마저도 이용하는데 제약이 많았다. 부대마다 사정이 다르긴 한데 많은 경우 이등병 시절에는 적잖이 눈치를 봐야하고(심지어 이등병, 일병은 컴퓨터 사용을 아예 못 하게 하는 곳도 있었다), 설령 눈치를 안 보는 계급이 되더라도 컴퓨터가 장병 수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주어진 업무를 마치고 부리나케 달려간다고 한들, 나보다 빠른 사람들은 항상 존재했다. 늘 전우들의 뒷통수를 바라보며 한참을 멀뚱멀뚱 기다려야만 그 고물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었다. 물론, 이 마저도 일과가 끝난 후부터 저녁 청소시간이 되기 전까지, 아주 짧은 시간 동안만 이용이 가능했다.


상황이 그렇다보니 콘서트 티켓팅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우선 시간대부터가 글렀다.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대부분의 티켓팅은 평일 오후 시간대에 문을 연다. 경험상 2시가 제일 많았던 것 같다. 도대체 직장인과 학생들은 어떻게 하라고? 그런데 신기하게도 서버는 늘 다운된다. 이 점이 늘 미스테리다. 다들 밥벌이를 포기하고 티켓팅만 노리는 건가? 이 나라에는 백수만 사는 걸까? 


여하튼 컴퓨터의 사용 조차 제약을 받는 군인에게는 그런 티켓팅이 그림의 떡이었다. 티켓팅 도전은커녕 싸지방 문턱도 넘을 수 없으니 말이다. 이건 요즘도 다르지 않아서 티켓팅 오픈이 회의나 미팅 시간과 겹치기라도 하면 그렇게 속이 쓰릴 수가 없다.


어찌어찌 상황이 잘 맞아서 티켓팅 시간에 컴퓨터 앞에 착석한다고 해도 문제다. 열악한 성능의 싸지방 컴퓨터로는 접속조차 어려울 게 뻔했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 나는 어디서 휴대전화 시계보다 네이버 시계가 더 정확하다는 말을 주워들어서 네이버 시계로 타이밍을 재곤 했다. 별도의 인터넷 창을 켜고, 네이버 시계를 띄워놓은 뒤 59분 57초쯤 Alt+Tab을 눌러 티켓팅 화면으로 전환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싸지방 컴퓨터는 인터넷 창을 전환하는 그 기초적인 기능조차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 했다. 버퍼링을 한참 겪은 뒤에야 다음 화면이 떳다. 이런 컴퓨터로 티켓팅을 한다면 분명 시작도 못 해보고 다운될텐데... 결국 이등병 시절 날아가는 몇 번의 기회들을 바라보며 씁쓸한 입맛을 다셔야만 했다. 


시아준수가 뮤지컬 <엘리자벳>의 주연을 맡게 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건 2010년 가을이었다. 뮤지컬 데뷔작 <모차르트!>를 성공리에 마치고 올림픽공원에서 갈라쇼 개념의 뮤지컬 콘서트를 열었을 때였다. 그 콘서트에는 <모차르트!>와 <엘리자벳>의 원작자 실베스터 르베이도 방한해 무대 인사를 전했는데, "2년 뒤인 2012년 <엘리자벳>을 공연하게 되었다"며 "죽음(토드) 역할을 맡은 김준수에 대한 기대가 크다", 뭐 대충 이런 이야기를 꺼냈던 기억이 난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만 해도 뭔 2년 뒤 일을 이야기를 지금부터 꺼내나 생각했다. 하지만 그 2012년은 내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다가왔고, 하필이면 그때 나는 군인이 되어 있었다.


일병이 되고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엘리자벳>이 곧 티켓팅을 오픈할 거라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답답해서 배길 수가 없었다. 어떻게 티켓팅을 하지?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답이 없었다. 경계근무를 서는 2시간 동안 그 고민만 한 적도 있었다. <엘리자벳>이 이후 재공(재공연)에 3공(세 번째 공연)까지 할 줄 알았더라면 좀 더 여유롭게 생각할 수 있었을텐데, 그땐 지금이 아니면 못 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마치 <Proud>를 부르며 모두가 눈물을 흘렸던 부도칸 콘서트처럼. 


우선 티켓팅부터 성공해야 했다. 확실한 건 싸지방에 있는 컴퓨터로는 전혀 승산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리저리 머리를 굴렸다. "부대에 없는 비품을 사러 인근 도시로 나갔다 오겠다"고 한 뒤 PC방으로 향하는 방법도 생각해 봤다. 하지만 이 발상은 로또에 당첨되어 나를 괴롭히는 상사를 향해 욕설을 퍼붓는 상상을 하는 것만큼 현실성이 떨어졌다. 병사가 업무로 외출을 할 땐 부사관과 운전병이 함께 따라 붙는데 그 조합이 나와 친한 사람들로 구성되리라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걸렸다간 징계감이다. 


나는 결국 티켓팅을 하기 위해 휴가를 쓰기로 결심했다. 마침 휴가가 철철 넘쳐나던 때였다. 보통 군인들은 정기휴가와 포상휴가들을 다 합쳐도 40~50일 정도 밖에 휴가를 나가지 못하지만, 나는 휴가가 남아돌고 있었다. 이등병 때 신병휴가 나갔다 온 것을 제외하고는 1년 동안 한 번도 밖으로 나가지 않았던 덕분이다. 물론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사실 2011년 겨울 10일 간의 휴가가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북한의 김정일이 돌연 사망해버리는 바람에 모든 부대원의 휴가가 모조리 다 취소되었다. 누군가 그랬다. 투철한 안보관을 갖게 하는 건 정신교육이 아니라 휴가 취소라고. 그때는 정말 열이 뻗치고 분을 삭일 수가 없었는데 그게 또 그렇게 전화위복이 될 줄은 몰랐다.


나는 티켓팅 날짜에 맞추어 휴가를 신청했다. 신청서에 휴가 사유를 적는데 사실 티켓팅 말고는 나가서 딱히 하고 싶은 게 없었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시아준수 뮤지컬 티켓팅'이라고 적었다. 그걸 본 중대장이 내게 한 마디 했다. 


"미친놈 꼴값을 떠네"     


물론 말은 그렇게 했어도 나름 츤데레였던 그는 순순히 휴가신청서에 사인을 해주었다. 나는 티켓팅 날짜에 맞추어 휴가를 나왔다. 


휴가를 쓴 뒤 '사제'PC방에서 티켓팅에 도전한 끝에 겨우 <엘리자벳>의 티켓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엘리자벳>에서 죽음(토드) 역할을 맡은 김준수는 원작자가 의도한 캐릭터를 가장 완벽하게 표현했다는 극찬을 받았다. 여기에는 분명 그의 몽환적이고 허스키한 목소리가 한 몫 했다

    

기껏 휴가까지 쓰고 나왔는데 티켓팅을 실패했더라면 억울해서 잠도 못 잤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티켓팅에 성공했다. 사제(군대에서는 군납이 아닌 민간 제품 등을 사제라고 부른다) PC방에서 컴퓨터 두 대를 잡아놓고 새로고침을 눌러가며 자리를 잡은 덕분이었다. 무엇보다 운이 좋았다. 사실 이때는 멋모르고 결제수단으로 신용카드를 택했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건 정말 무모한 짓이었다. 신용카드 결제는 온갖 프로그램 설치를 요하고 절차가 복잡해 그 과정에서 겨우 잡은 자리가 취소될 위험이 있다. 나는 말년병장 때에도 시아준수의 첫 번째 '눈꽃콘'을 보기 위해 휴가를 쓰고 나와 티켓팅에 임했는데 그때 그렇게 표를 날려 먹었다. 허무하게 사라진 좌석을 보고서야 교훈을 얻었다. 티켓팅은 무조건 무통장입금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아무튼 <엘리자벳>은 정말 하늘이 도운 덕분에 무사히 티켓팅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시 공연 날짜에 맞추어 휴가를 나왔다. 휴가 복귀 후 한달쯤 지났던 것 같다. 군부대에서는 전력 유지를 이유로 휴가나 외박을 나갈 인원을 한정한다. 나갈 수 있는 인원은 정해져 있는데 신청자는 많다보니 아무래도 최근에 휴가를 다녀온 사람은 우선 순위에서 밀리게 마련이다. 하지만 나는 그동안 워낙 나가지 않았던 덕분에 별 탈 없이 연달아 휴가를 사용할 수 있었다. 아마 2011년 겨울 휴가가 취소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연이어 나오는 건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정말 인생사 새옹지마라는 생각이 들었다.     


<엘리자벳>은 황홀했다고 표현해도 과하지 않을 만큼 만족스러웠다. 김준수의 허스키하면서 얇은 목소리는 죽음(토드)이라는 역할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었다. 참고로 내가 공연을 보러 간 날 엘리자벳 캐스팅은 옥주현이었는데, 그녀가 아름답다는 생각을 이 날 처음 했던 것 같다. 무엇보다 제한된 환경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쏟아붓고 간 공연이라 그런지 더욱 의미있게 느껴졌다. 고진감래란 이런 것인가. 그 휴가는, 정말 내가 군 생활을 하며 나왔던 몇 번의 휴가 중 최고였다. 휴가 나와서 술 열 번 먹는 것보다야 이처럼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뮤지컬을 감상하는 게 훨씬 더 추억에 남는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엘리자벳> 티켓팅 성공은 내게 또 다른 행운도 가져와 주었다. 조기 진급을 하게 된 것이다. 당시 우리 부대에서는 사격, 체력 측정, 자격증 취득 등에서 우수한 성취를 달성한 병사에게 격려 차원에서 포상휴가를 주곤 했다. 그런데 그 포상휴가 한 번 받아보자고 이것저것 열심히 하다보니 상병도 병장도 남들보다 먼저 진급할 수 있었다. 단순히 포상휴가를 두둑히 쌓아둬야 티켓팅이나 콘서트처럼 필요한 일이 있을 때 써먹을 수 있다는 생각이었는데, 그 팬심이 일으킨 나비효과인 셈이다. 


<엘리자벳> 이야기만 실컷하긴 했는데 사실 내가 김준수의 뮤지컬 넘버 중 가장 좋아하는 곡은 뮤지컬 <드라큘라>의 <Loving you keeps me alive>라는 곡이다. 그 곡은 이렇게 시작한다. 


"그댄 내 삶의 이유, 나를 살게 한 첫 사랑" 


나에게는 덕질이 내 삶의 이유이자 나를 살게 하는 원동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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