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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수 Oct 03. 2020

무의미의 의미

내가 사이타마에 가고 싶었던 이유는

"일본에서 어디가 가장 가보고 싶어?"

"나? 사이타마"


아야노는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날 더러 "신기한 사람"이라고도 했다. 가보고 싶은 도시로 사이타마를 꼽은 건 내가 처음이란다. 외국인이 수도인 도쿄도, 관광지로 유명한 오키나와도 아닌, 의식주 위주의 기능을 하는 사이타마가고 싶다고 하니 그녀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우리는 보통 외국인 친구를 만나면 가장 좋아하는 지역, 음식, 노래 따위의 것들을 물어본다. ‘가본 곳 중 어디가 제일 좋았어?’, ‘어떤 음식이 가장 맛있었어?’. 이건 꼭 국뽕 때문이 아니다. 시답지 않은 듯해도 이것만큼 무난한 소재도 없다. 다짜고짜 국제 정세나 선거 결과에 대한 의견을 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해보면 “두 유 노 김치?”가 아주 잘못된 문화인 것만은 아니다.


삿포로에서 1년 남짓 살면서 가장 많이 받은 질문도 그러한 유형의 것들이었다. 처음 만난 일본인 친구들은 대체로 내게 “어디가 가장 가보고 싶냐”고 물었다. 그런데 그들은 내가 으레 도쿄나 오사카, 후쿠오카 같은 대도시를 말하려니 여겼던 모양이다. 간혹 도산코(홋카이도에서 나고 자란 사람을 지칭하는 말) 중에는 하코다테나 비에이처럼 홋카이도에서 대표적인 관광지를 대답해주길 기대하는 눈치도 엿보였다.


하지만 면목 없게도 나는 늘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매번 "사이타마"라고 대답했기 때문이다. 친구들은 그럴 때마다 화들짝 놀라며 “도대체 왜 사이타마에 가고 싶냐”고 되묻곤 했다. 이렇게 역질문이 들어오면 오히려 내 입장이 다소 난처해졌다. 나의 대답을 상대방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동방신기에 대한 일종의 사전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는 친구들에게는 구구절절 설명하다가도 언어의 장벽에 부딪혔다. 그러면 결국 “그냥”이라고 얼버무리며 넘어가곤 했다.


도쿄 북서쪽에 위치한 사이타마는 우리나라로 치면 일산이나 안양쯤 되는 도시다. 근대화 이전까지는 대부분 농지였으나 근대화 이후 도쿄에 인구가 대대적으로 유입되기 시작하면서 함께 성장했다. 그런데 대도시임에도 불구하고 베드타운의 성격이 강한 탓에 딱히 관광지라고 부를 만한 곳이 없다. 이곳을 '일본에서 가장 가보고 싶은 곳'으로 꼽는 외국인이 드문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사이타마가 정말 가보고 싶었다. 동방신기가 불렀던 노래 하나 때문이었다.


동방신기의 일본 댄스곡 중에는 <Somebody to love>이라는 노래가 있다. 우리나라에 잘 알려진 건 아니지만, 이 노래는 동방신기의 일본 콘서트마다 빠지지 않는 필수 곡이다. 보통 콘서트 막바지에 흥을 돋우는 역할을 한다.


이 곡의 백미는 노래가 끝날 즈음 폭풍전야처럼 잠시 고요해지는 순간에 있다. 4명의 멤버가 “love”를 번갈아 부르고 마지막으로 믹키유천이 “I say”하며 마무리하는 부분인데, 어느 순간 그 “I say” 대신에 콘서트가 열리는 도시의 지명을 외치는 애드리브가 추가된 것이다. 예를 들어 도쿄에서는 “도쿄!!!”, 삿포로에서는 “삿포로!!!” 이렇게 말이다. 이것은 일종의 밈으로 자리매김해 이후 동방신기 콘서트의 통과의례가 되었다. 그런데 그 시초가 된 때가 바로 사이타마 슈퍼 아레나에서 열린 콘서트였다. 내가 사이타마라는 지명을 알게 된 것도, 그리고 거기에 가보고 싶다고 생각한 것도 단지 그 때문이었다. “싸이타마!”.


"Love, Love, Love, Love, 싸이타마!"는 이 장면에서 비롯되었다 ⓒAVEX


많은 작곡·작사가들이 소비자들의 뇌리에 꽂히는 곡을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후크송처럼 의미 없는 멜로디의 반복으로 소비자를 유혹하기도 한다. 하지만 노래를 듣다 보면 후렴구처럼 작곡가가 의도한 부분이 아닌, 그다지 의미 없는 부분이나 가수의 애드리브에 꽂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나에게는 <Somebody to love> 공연 중 나왔던 “싸이타마!”라는 애드리브가 그랬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그 영상을 보고 난 뒤 사이타마라는 지명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뉴스에서 사이타마가 거론되기만 해도 그 장면이 떠올랐다. 뭔가 사이타마라는 고유명사에 대한 애착이 생기기도 했다. 양파의 일본어는 '타마네기(玉ねぎ)'인데, '타마'가 같다는 이유로 사이타마와 연상지어서 외웠을 정도다.


나는 늘 사이타마에 갈 날만 고대했다. 하지만 기회가 없었다. 일본에 가더라도 언제나 빠듯하게 볼일만 보고 돌아오는 경우가 많았다. 벼르고 벼르던 기회가 온 건 올 초였다. 2020년 1월, 동방신기 콘서트가 있어서 잠시 나고야를 방문했다. 그런데 막상 콘서트가 끝나고나니 나고야에만 있다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게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도쿄로 향했다. 그렇다고 약속을 잡은 건 아니었다. '반드시 해야할 일' 같은 것도 당연히 없었다. 사이타마행을 결심한 것은 그때였다.


올해 1월 나고야에서 열렸던 동방신기의 돔 콘서트. 이후 사이타마로 향했다


사실 사이타마에 가보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기는 했어도 그곳에서 뭘 하고 싶다거나 먹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단지 믹키유천이 “싸이타마!”를 외쳤던 사이타마 슈퍼 아레나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사이타마 슈퍼 아레나가 관광지로 유명한 곳은 아니다. 그냥 평범한 공연장이다. 하지만 내게는 특별하다면 특별한 장소다. 일본에서 활동하는 가수들은 대체로 아레나 투어를 성공시킨 뒤 돔 투어로 단계를 올리곤 하는데, 사이타마 슈퍼 아레나와 도쿄돔은 그 각각의 단위를 상징하는 장소들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도쿄돔으로 향하는 전초기지와 같은 곳이라고나 할까. 그게 사이타마에 가고 싶은 이유라면 이유였다.


하지만 사이타마 슈퍼 아레나로 가는 길은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도쿄의 복잡한 지하철 노선도 때문이다. 슈퍼 아레나를 가기 위해서는 사이타마신도심역에서 하차해야 한다. 그런데 아무리 노선도를 들여다봐도 도대체 어느 노선이 그 역에 정차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승강장을 이리저리 옮겨 다녀봤지만 마찬가지였다. 줄은 줄이오, 색깔은 색깔이로다. 일단 방향만 맞추면 되겠지 싶어서 우츠노미야선을 탔다. 결과는, 꽝. 방향은 맞추었지만 열차는 야속하게도 슈퍼 아레나를 지나쳐서는 다음 역인 오미야에서 정차했다.


열차 안에서 지나쳐버린 사이타마 슈퍼 아레나. 이 순간의 허탈함은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슈퍼 아레나를 가기 위해서는 다시 뒤로 한 정거장을 돌아가야 했다. 그런데 열차시간표도 맞지 않았거니와 무엇보다 허기가 지기 시작했다. 한껏 기대에 부풀어 있다가 김이 빠져버리니 망각하고 있던 배고픔이 밀려온 것이다. 에라,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데. 구글맵으로 맛집을 검색했다. 역 주변이라 음식점은 많았지만 대부분 거하게 먹어야하는 메뉴들이었다. 혼자서 가볍게 한끼를 해결할 만한 곳이 마땅치 않았다.


사이타마에만 있는, 조금은 특별한 음식점을 찾아볼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귀찮기도 했고 마침 가까운 곳에 스키야가 있었다. 나는 냉큼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참고로 스키야는 일본의 덮밥체인점인데, 전국적으로 점포 수가 2천 개가 넘는다. 삿포로에 살던 시절 집 근처에도 몇 군데가 있어서 그곳에서 치즈부타동(돼지덮밥)을 즐겨먹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당연히 이날의 메뉴도 치즈부타동이었다.


오미야역 인근에서 먹은 스키야 치즈부타동을, 사이타마 슈퍼 아레나 앞 몰에서 마셨던 스타벅스 커피(우)


늦은 점심을 먹고 나오니 하늘은 촉촉한 비를 흩뿌리고 있었다. 우산이 없어 걱정했는데 다행히 비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쳤다. 나는 사이타마신도심역을 향해 걸어갔다. 지하철을 탈까 고민되기도 했지만 왠지 역에서 기다리는 시간에 걸어가는 게 더 빠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뭉쳐져 있던 구름이 흩어지고 곳곳에서 파란색 하늘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사이타마 슈퍼 아레나에 도착한 것은 그 즈음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처음 사이타마 슈퍼 아레나를 대면했을 때, 도쿄돔에서 느꼈던 만큼의 흥분을 느끼지는 못 했다. 그 둘은 사뭇 달랐다. 도쿄돔이 넓은 공원 한 가운데에 자리 잡아 그 위용을 뽐내고 있다면, 슈퍼 아레나는 도심 속 한 가운데에서 공간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방식으로 자리 잡은 모습이었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아스날의 옛 경기장인 하이버리 같다고나 할까? 당연히 먼발치에서 건물 전체를 감상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나는 슈퍼 아레나의 세련된 듯 밋밋한 정문에 섰다. 2008년에 동방신기가 여기에 섰단 말이지. 그날의 광경을 상상해보았다. 12년이 흐른 뒤였지만 괜히 가슴이 웅장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드라마틱한 사건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행사나 전시가 없는 날이어서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나 때문에 문을 열어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릴 없이 옆에 난 좁은 길을 따라 슈퍼 아레나를 한 바퀴 빙 둘러보았다. 그리고 한 바퀴를 다 돌았을 즈음, 다시 비가 추적추적 내리길래 앞에 있는 스타벅스에 들어가 평소처럼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잔 샀다. 커피를 마시며 책을 조금 읽다가, 다시 도쿄로 돌아갔다. 그게 전부였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사이타마신도심역(좌)과 동방신기가 2008년 처음 공연을 했던 사이타마 슈퍼 아레나(우)


동방신기가 공연했던, 그리고 믹키유천이 포효했던 그 많고 많은 도시들 중에 왜 하필 사이타마에 꽂혔는 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생각해보면 내가 사이타마에서 했던 모든 일들은 관광객으로서는 무의미한 것이었다. 문이 굳게 닫힌 공연장을 한 바퀴 둘러 보았고, 일본에 널리고 널린 덮밥 체인점에서 이미 수 십 그릇은 먹었던 치즈부타동을 먹었다. 그리고 한국에도 (심지어 우리 동네에도) 수없이 많은 스타벅스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아마 일본 여행 중 일행에게 사이타마에 가서 체인점 덮밥과 스타벅스 커피를 먹은 뒤 문 닫힌 공연장을 한 바퀴 둘러보고 오자고 하면 십중팔구 "시간 아깝다"며 거절 당할 확률이 높다. 여행 그룹에서 소외되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왜냐하면 대다수 사람들에게 그것은 여행이 아닌 일상에서도 충분히 영위할 수 있는 단조롭고 평범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나에게도 시시한 건 아니었다. "싸이타마!"라는 애드리브에 이유 없이 이끌리고, 그래서 몸소 사이타마로 향했던 과정은 그 자체로 즐겁고 뿌듯한 경험이었다. 내게는 사이타마에 가봤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했다. 무엇보다 거기에는 동방신기가 있었다. 그들이 낯선 타지에서 성장하며 쌓아 올렸던 스토리가, 그리고 열정을 불태우며 불렀던 노랫말이. 사이타마로 가는 길은 그런 이야기가 실재했음을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남들이 내 인생을 대신 살 수 없듯, 내 삶의 의미를 결정할 수도 없다. 사이타마에서의 하루가 그랬다. 그날의 일들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무의미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뜻깊은 것이었다. 세상만사가 반드시 남들이 인정하는 의미와 가치를 지녀야 할 필요는 없다.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다면 우리의 평범한 일상은 그 자체로 소중한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삶의 의미는 스스로가 부여하는 만큼 주어진다.


얼른 코로나가 끝나서 다시 사이타마에 갈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그때는 꼭 슈퍼 아레나 안에도 들어가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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