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신기를 좋아하는 우리는, 함께였다
2014년 4월 29일, 홋카이도 신치토세공항에 발을 디뎠다. 생애 첫 일본행이었고, 동시에 워킹홀리데이가 시작되는 날이었다. 홋카이도의 차가운 공기가 콧속으로 빨려 들어왔다. 한국은 이미 완연한 봄이었지만 홋카이도는 아직 겨울의 소매를 붙들고 있었다. 며칠 전 내린 눈이 곳곳에 쌓여있었다. 그제야 눈의 고장에 왔다는 것이 실감 났다.
워킹홀리데이를 떠나는 사람들에게는 저마다의 뚜렷한 목표가 있다. 외국어 실력을 키워오겠다든지 돈을 많이 벌어오겠다든지 하는 것들. 그 목표는 개인의 성향이나 환경에 따라 다를 것이다. 나는 일본으로 떠나면서 조금 특별한 목표를 설정했다. 바로 동방신기와 JYJ의 도쿄돔 콘서트 관람이었다.
아이돌 콘서트를 보기 위해 일본에 가는 건 좋다고 치더라도, 굳이 거기서 살 필요까지 있냐고 의아해할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콘서트 티켓팅에 대한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일본의 콘서트 티켓팅은 추첨제로 운영된다. 말 그대로 복불복이다. 예매시간이 되면 요이땅! 하고 좌석이 열려서 수강신청하듯 남은 자리를 찾아야 하는 우리나라와는 다르다. 응모는 콘서트 수개월 전에 진행된다. 대개 팬클럽 회원, 로손티켓 같은 예매사이트 회원, 일반회원 순으로 기회가 부여된다. 당연히 동방신기 같은 인기가수의 공연은 팬클럽 회원들의 선(先)예매에서 대부분의 자리가 동나기 때문에 일반인들에게는 콩고물조차 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물론 팬클럽 회원이더라도 당첨이 보장되는 건 아니다. 특히 도쿄나 오사카 같은 대도시에서 열릴수록 경쟁률은 더욱 높아진다. 당첨 확률을 높이기 위해 지인의 아이디까지 끌어다가 여러 날짜에 응모를 해두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사실 그게 다 당첨되어도 골치가 아프다. 당첨된 티켓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 취소할 경우 다음 티켓팅에서 불이익을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첨 결과가 나오면 트위터 등에서는 양도표를 팔고 구한다는 내용의 글들이 숱하게 쏟아진다.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건 적잖이 귀찮은 일이다. 그래서 일본에서 콘서트를 보려면 당첨 확률은 극대화하면서도 손실은 최소화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예매에 성공하더라도 복불복은 끝나지 않는다. 좌석 복불복이 한 번 더 진행된다. 예매권에는 대략적인 구역만 정해져 있을 뿐 좌석번호까지 기재되어 있지는 않다. 예매권을 들고 콘서트장을 들어서면 입구에서 영수증 같이 생긴 티켓을 새로 발권해 주는데 거기에 정확한 좌석번호가 찍혀 나온다. 그제서야 내 자리가 어디인지 알 수 있다. 신기한 건 앞자리부터 VIP석/R석/S석 등 등급을 매기고 가격에 차등을 두는 우리나라와 달리 모든 좌석에 동일 가격이 책정된다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5만 명을 수용하는 도쿄돔의 맨 앞자리에서 내 가수와 눈빛을 교환하든, 꼭대기층에서 면봉만큼 조그만 모습을 바라보든 가격이 같다. 적어도 일본의 공연장에서는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다.
어떤 방식이 더 좋은지는 모르겠다. 한국이든 일본이든 각자의 방식에 일장일단이 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콘서트 예매 같은 경우 시작과 동시에 승부가 결판나기 때문에 마냥 기다릴 필요가 없다. 컴퓨터가 빠르거나 서버가 다운되지만 않는다면 원하는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하지만 손이 느리거나 조금만 판단을 잘못해도 콘서트는 물 건너 간다. 반대로 일본은 신청해놓고 운에 맡겨야하기 때문에 수강신청하듯 쪼들리는 긴장감을 경험하지 않아도 된다. 네이버시계 쳐다보며 예매시간이 되길 기다려보지 않은 사람은 그 피말리는 심정을 모른다. 단점은 당첨결과가 나올 때까지 세월아 네월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실패할 티켓팅이라면 차라리 금방 끝나는 우리나라 방식이 나을 수도 있다.
물론 두 나라의 공통점도 있다. 외국인에게 배타적이라는 것이다. 이 점은 어지간한 관세보다도 높은 무역장벽(?)이 된다. 일본에서 열리는 콘서트에 응모하려면 우선 일본 현지 주소와 인증번호를 받을 수 있는 전화번호가 필요하다. 일본에 살거나 지인이 있지 않는 이상 충족하기 어려운 조건이다. 게다가 팬클럽에 가입도 되어 있어야 한다. 앞서 언급한 선예매 때문이다. 물론 양도표를 받을 수는 있겠지만, 그마저도 한국에서 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게다가 양도표는 주로 트위터를 통해 오고 가는데 난 트위터에 매우 약하다). 결국 일본에서 직접 살지 않고서는 표를 구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워킹 홀리데이를 결심하게 된 건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어른이 된다고 갑자기 영어를 잘하거나 돈을 많이 버는 게 아니듯, 다짜고짜 일본에 간다고 계획했던 모든 일이 단숨에 해결되는 건 아니었다. 사실 나는 일본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뿐, 여행객과 크게 다를 게 없는 삶을 살았다. 휴대전화 개통이나 은행 계좌 개설은 귀찮아서 차일피일 미루었고, 팬클럽 가입 역시 손도 못 대고 있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게을리 살던 중, JYJ의 돔투어 콘서트 예매를 진행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건 그때부터였다. 콘서트 보겠다고 기껏 일본까지 왔는데, 당장 예매에 응모할 자격조차 안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삿포로의 한 한식당에서 주방 일을 하고 있었다. 일본의 여느 한식당처럼 내가 일했던 곳도 K-POP이나 한국 드라마를 좋아하는 일본 여성들의 메카였다. 그래서 가게는 늘 동방신기나 JYJ, 빅뱅의 팬들로 붐볐다. 더러는 초신성이나 보이프렌드를 좋아하는 팬들도 찾아왔다.
단골손님들은 대부분 내가 동방신기와 JYJ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당시 삿포로에는 한국에서 온 사람이 많지 않았는데 한국에서 온 남자가, 그것도 동방신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신기했던 모양이다. 특히 자신도 동방신기를 좋아하는 아주머니들은 “멤버 중 누구를 가장 좋아하느냐”거나, “어떻게 동방신기를 좋아하게 되었냐”며 내게 관심을 가져주셨다. 세대를 넘어 좋아하는 아이돌에 대해 철없이 이야기할 수 있던 날들이 즐거웠다.
나는 그분들에게 콘서트에 관한 고민을 털어놓았다. 사실 도움을 바라고 한 게 아니라, 일본까지 와서 콘서트에 못 갈 수도 있게 된 상황에 대한 넋두리였다. 나란 놈이 팬으로서 자격이 있는 건가, 괜히 착잡한 마음이었다. 단골손님들은 그런 내 이야기를 듣고는 모두가 하나 같이 “자기가 도와주겠다”고 대답했다. 빅뱅을 좋아했던 유이상도 그런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내가 티켓팅으로 고민하는 모습을 보자 “내 주변에 JYJ 팬들이 많으니 물어보겠다”며, 자기만 믿으라고 했다.
나는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상대가 호의를 보이긴 했지만 뭔가 내 스스로 묵시적 청탁을 한 것 같은 찝찝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지인의 지인에게까지 민폐를 끼치는 것 같았다. 유이상은 그런 나를 보고는 “뭐 이런 걸 가지고 망설이냐”며 자기가 표를 구해줄 테니 걱정말라고 신신당부했다. 나 역시 그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결국 그녀에게 도쿄돔 콘서트 티켓을 부탁했다. 유이상, 오네가이시마스!
그런데 "나만 믿으라"는 말이 대체로 그렇듯 그 과정에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다른 지역에 사는 그녀의 친구가 우편으로 콘서트 티켓을 보냈는데 그게 내가 도쿄로 출발하는 날 하루 전까지도 도달하지 않은 것이다. 심지어 수신처는 내 집이 아니라 유이상의 집이었다. 삿포로에 도착한다고 한들 유이상을 만나러 가 그 티켓을 받아야 했다. 당장 모레가 콘서트이고 내일 저녁 도쿄로 가야하는데!
이윽고 출발하는 날 아침이 되었다. 정말 하늘이 노래지는 것만 같았다. 비행기 시간은 저녁 8시 5분. 출발 2시간 전에는 공항에 도착해야 할테고(일본 국내선은 처음 타보는지라 시간에 대한 감이 없었다), 삿포로역에서 신치토세 공항까지는 넉넉히 1시간 정도가 걸리니 5시에는 출발해야 하는데 그 전에 표가 도착할까? 설상가상으로 유이상은 내가 보낸 메시지를 읽지도 않고 있었다. 절망스러웠다. 반쯤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비행기와 호텔 취소 수수료를 알아보았다. 안 될 놈은 안 되는구나. 자괴감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기적적으로 유이상에게 연락이 온 건 점심시간이 지나서였다. 티켓이 도착했다고. 바로 가져다 줄테니 스스키노(삿포로 중심부 번화가)에서 만나자고. 티켓도 받으러 가느라 연락을 못 봤다고 했다. 그녀의 메시지를 받는 순간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옆방에 들리든 말든 소리를 내질렀다. 됐다! 정말 대학 합격통지서를 보는 것만큼 기뻤다. 대충 옷을 입고는 약속 장소로 부리나케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