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동수 Sep 18. 2020

콘서트만 보고 왔는데요

1박 2일 요코하마, 목적은 동방신기

1박 2일 요코하마, 목적은 동방신기

"어딜 간다고? 요코하마?"


본부장님은 화들짝 놀라셨다. 그도 그럴 게 때는 지방선거를 4일 앞둔 주말이었다. 그때 나는 한 광역자치단체장급 선거 캠프에서 일하고 있었다. 선거 4일 전의 후보자 캠프라고 하면, 회사로 치면 세무감사 직전의 회계팀이나 비상경영체제에 돌입한 시기의 경영기획실 정도와 비슷한 분위기일 것이다. 아니다. 그보다 더욱 엄중할 수도 있겠다. 왜냐하면 선거에서 지는 순간 회사가 통째로 사라지니까. 그래서 거의 모든 후보자 캠프는 보통 선거 2주전부터 사활을 걸고 선거에 임한다. 사무실에서 먹고 자는 사람도 드물지 않다. 그런 와중에 요코하마라니. 아마 본부장님의 정치 인생에서 그 시점에 일본으로 여행을 다녀오겠다고 한 놈은 내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물론 눈치를 안 봤던 건 아니다.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정말 수십 번은 고민했다. 남들은 다 이렇게 개고생하는데 혼자서 이틀씩이나, 그것도 선거 직전에 빠져도 되는걸까? 사실 나 하나 빠진다고 선거 결과가 달라지는 건 아니다. 하지만 모두가 열일하는 상황에서 콘서트 보러 일본에 가겠다고 말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정치권은 평판으로 돌아간다. 만약 지기라도 하면 여러 패인 중 나의 일본행도 분명 '직원들의 불성실함' 따위로 거론될 것이고, 그 꼬리는 내내 나를 따라다닐 것이다. 이후의 뒷감당은.. 으, 그렇게 먹어야 하는 눈칫밥이란. 그런 걸 보면 원하는 때에 눈치보지 않고 휴가를 사용할 수 있는 회사는 분명 좋은 회사가 틀림 없다.


하지만 나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여느 콘서트라면 후일을 도모할 수도 있겠지만, 이건 닛산스타디움이었다. 도쿄돔 위로 딱 하나 있는 공연장. 그래서 이때의 기회를 놓친다면 또 언제 갈 수 있을 지 기약할 수 없었다. 나는 나름대로 심리적 배수의 진을 쳤다. 콘서트 티켓은 지인을 통해 구해두었고, 비행기와 호텔도 이미 예약을 해두었다. 꼭 가야만 하는 환경을 만들어두고 말을 꺼낸다면 적어도 내 스스로는 물러서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만약 보내주지 않으면? 그 후보와 연을 끊으리라. 정치인이야 안 보면 그만이지만, 동방신기를 안 보고 살 수는 없지 않겠나.


나의 이런 결기가 느껴졌는지 본부장님은 거의 반강제로 나의 요코하마행을 승낙해주셨다. 물론 나도 양심은 있는지라, 일본에서의 체류시간을 최소화했다. 콘서트 당일 오후에 공항에 도착해 저녁에 콘서트를 본 뒤, 다음 날 오전 한국으로 출발하는 일정을 변경했다. 결국 요코하마까지 가서 콘서트만 보고 오는 셈이었다. 


3일 간의 콘서트 중 내가 갔던 날의 영상이 DVD로 제작되었다. 영상 속에서 닛산스타디움의 위용을 느낄 수 있다 ⓒAVEX


이쯤되면 닛산스타디움이 갖는 의미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보통 일본 최고의 공연장으로 도쿄돔이 손꼽힌다. 실내공연장 중 가장 큰 5만석이라는 규모와 더불어 도쿄돔이 갖는 남다른 상징성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에서 활동하는 최정상급 가수라면 누구나 도쿄돔에 서는 꿈을 꾼다.


하지만 닛산스타디움은 그런 도쿄돔보다도 무려 2만석이 더 많은 7만석이다. 우리나라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의 5배나 되는 인원이 한 가수의 콘서트를 보러 모이는 것이다. 하루에 7만 관객을 요코하마까지 불러들일 수 있는 가수가 얼마나 되겠나. 도쿄돔이 꿈의 무대라면, 닛산스타디움은 꿈도 꾸지 못할 무대인 것이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비싼 차의 대명사로 벤츠가 있지만, 실제로 더 비싼 차로 부가티가 존재하는 것과 비슷하다.


동방신기는 2013년에 이어 두 번째로 닛산스타디움에 섰다. 여지껏 닛산스타디움에서 공연을 한 가수는 동방신기를 포함해 20팀이 되지 않는다. 외국인 가수 중에는 동방신기가 유일하다. 심지어 내가 갔던 2018년 6월의 콘서트는 3일 연속으로 진행되었는데, 이것은 일본 역사에서 처음이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SMAP나 GLAY 같은 가수들도 3일 연속으로 공연하지는 않았다. 새로운 역사가 쓰이는 그 순간을 놓칠 수는 없었다.

 


닛산스타디움으로 가기 위해서는 신요코하마역에서 내려야 한다. 역을 나와서는 언제나 그렇듯 수많은 인파를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이른 아침 부랴부랴 일어나 공항으로 향했다. 인천에서 도쿄까지는 비행기로 2시간 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공항에서 체크인 하고 비행기에 타는 시간, 비행기에서 나와서 입국심사를 받고 나오는 시간, 나리타공항에서 요코하마까지 가는 시간을 다 합하면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런 걸 보면 확실히 일본은 가깝고도 먼 나라다.


특히 나리타 공항에 내려서 우에노역까지 가고, 또 거기서 시부야로 간 뒤 다시 요코하마로 가는 시간은 정말 억겁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처음엔 콘서트를 보러간다는 설렘으로 마냥 즐거웠지만, 시간이 지나니 점차 설렘은 줄어들고 그 자리를 지루함이 채우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요코하마에 가까워질수록 구름빛이 어두워지면서 차창 밖으로 흩날리는 빗방울들이 스치기 시작했다. 닛산스타디움은 야외 공연장이라고 했는데, 슬슬 걱정이되었다.


한참을 달린 지하철이 드디어 신요코하마역에 정차했다. 신(新)이라는 접두사를 붙인 역답게 역사는 삐까번쩍했다. 비교적 최근에 지어진듯 보이는 이 거대한 역은 이미 20~60대 일본 여성들로 가득 차 있었다. 누가 봐도 비기스트(동방신기 일본 팬클럽 명칭. 일본 카시오페아라고 생각하면 된다)들이었다! 정체성을 공유하는 무리들을 만나니 장기간의 이동으로 쌓인 피로가 한순간에 싹 가셨다.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역시 콘서트 날 가장 설레는 순간은 역에서 나와 공연장으로 향할 때다.


역에서 나와 우비를 갖춰 입었다. 3일 간의 콘서트 중 마지막 날이었던 이 날 하필 비가 왔다. 이때만 해도 운이 지지리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영상으로 나온 것을 보니 폭우가 쏟아진 덕분에 이 날 가장 멋있는 장면이 연출되었던 것 같다. 우천축구는 해봤어도 우천콘서트 관람이라니. 여러모로 새로운 경험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군중이 가는 길을 그대로 따라갔다. 걷다 보니 얼마 안 가 닛산스타디움이 나타났다. 2002년 한일월드컵의 결승전이 펼쳐진 곳이란 걸, 이 날 처음 알았다. 돼지가 되어 비아냥을 듣던 호나우도가 하드캐리했던 그 경기가 문득 떠올랐다. 벌써 16년이 지났고, 그 장면을 TV로 지켜보던 중학생은 이제 30대가 되어 동방신기를 보기 위해 그 장소에 왔다는 사실이 마냥 신기하게 느껴졌다. 


요코하마 닛산스타디움, 16년 전 이 곳에서는 2002년 한일월드컵의 결승전이 열렸다


이 날 콘서트에서 가장 기억남는 곡이 있다면 단연 <Purple line>이었다. 곡이 시작되는 순간, 사각사각 하는 반주와 함께 관객들이 손목에 찬 시계가 보라색으로 바뀌었다. 7만개의 붉은 불빛이 일순간 보라색으로 바뀌는 순간 느껴지는 전율이란. 그 장면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올 가치가 있는 콘서트였다. 여름에 듣는 여름곡들(<summer dream>, <sky>)은 그 묘미가 남달랐다. 더군다나 비도 내리니 (다행히 나는 지붕 아래 자리에 배정되어 비를 맞지는 않았지만) 청량한 느낌이 배가되었다. 딱 하나 아쉬움이 있었다면, 유노윤호가 <somebody to love> 말미에 "love, love, love, love" 하고 "요코하마!!!!"를 외쳐주지 않았다는 것.. 사실 <somebody to love>은 그 맛에 듣는 건데. "요코하마!!!!"는 후일을 기약하는 수밖에 없었다.



콘서트는 세 시간 가량 진행되었다. 콘서트가 끝나도 비는 그치지 않았다. 나는 들고 간 셀카봉을 주섬주섬 펴들고 닛산스타디움 앞에서 홀로 셀카를 찍었다. 그리고는 호텔로 향했다. 편의점에서 맥주를 사가지고 방에서 마셨다. 다음 날 아침엔 역시 같은 편의점에서 빵과 커피를 사들고 공항으로 출발했다. 


이튿날 사무실로 돌아가니 모두 내 이야기를 듣고는 놀라는 눈치였다. 이 와중에 일본까지 갔을 정도면 뭔가 대단한 경험을 하고 왔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고작 콘서트 하나 보고 왔다고 하니 말이다. 맛집은 어디 가봤냐, 클럽은 가봤냐, 경치는 좋았냐. 쏟아지는 질문에 나는 한결 같이 "아니요"라고 대답했다. 


따지고 보면 내가 이때 일본에서 체류한 시간은 24시간이 채 되지 않았다. 토요일 오후 나리타공항에 도착해 지하철로 요코하마에 갔고, 콘서트를 봤다. 그리고 그 콘서트가 끝난 뒤에는 호텔에서 홀로 TV를 보며 맥주를 마셨다. 다음 날 아침 일찍에는 편의점 음식으로 간단히 끼니를 떼운 뒤 지하철을, 비행기를 타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오직 동방신기의 콘서트를 보기 위해 모든 시간과 비용을 썼던 것이다. 그래도 난 행복했다.


누구에게나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순간들이 있다. 나에게는 닛산스타디움에서 7만여 명의 팬들과 함께 동방신기를 바라보며 웃고 열광했던 그 시간들이 그랬다. 그 순간 내가 느꼈던 행복과 환희는 결코 값으로 계량화 될 수 없다. 그때로 다시 돌아가더라도, 설령 더 많은 비용과 시간을 소모해야 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다시 요코하마로 갈 것이다. 비효율적이어도 좋다. 그것은 단지 콘서트를 관람한 시간이 아니라 내 청춘의 꿈과 열정이 응축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는 그런 찰나의 순간을 누리기 위해 매일매일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전 08화 무의미의 의미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