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어느 오전이었다. 나는 인감증명서를 떼기 위해 서초역 인근의 중앙지방법원 등기국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계절은 아직 여름의 문턱을 넘지 못해 제법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습한 탓인지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등이 다 젖을 정도로 땀이 났다. 춥고 습한 건 덥고 습한 것 못지 않게 사람을 지치게 했다. 무엇보다 평소 안 하던 운동도 할 겸 걸어가기로 한 게 화근이었다. 15분이면 갈 줄 알았던 등기소는 30분이 지나도 도착하지 못하고 있었다. 몸과 마음이 물 먹은 걸레마냥 축 늘어졌다.
이왕 걸어가는 거 커피라도 마시며 느긋하게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는 길에 아메리카노 한 잔을 사 들었다. 교대역 사거리에 놓인 횡단보도를 지나 서초역으로 향했다. 그 사거리는 늘 그렇듯 번잡하고 분주했다. 정신줄을 놓고 멍하니 걷었다. 그때였다. 앞 쪽에서 둥둥하며 발라드의 느릿느릿한 비트가 막연히 들려온 것은. 분명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 익숙한 소리였다.
처음엔 그저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다가갈수록 내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귀를 의심한다'는 관용구가 지나친 과장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들리면 들리는거고 아니면 아닌거지 듣고서도 의심할 건 뭐람.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분명 무슨 비트가 들리긴 하는데, 도저히 그 곡이 나올 장소와 상황이 아니었다. 처음엔 환청이라고도 생각했다. 그 노래는 동방신기가 14년 전 일본에서 발매한 <明日は来るから>(아스와쿠루카라/내일은 오니까)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나에게 개인기라고 할 만한 재능이 하나 있다면 동방신기의 노래들은 아주 멀리서 비트만 들어도, 아니면 한음절만 들어도 귀신같이 알아맞춘다는 것이다. 예컨대 시끄러운 장소나 먼 곳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는 가수의 목소리는 공기 중에 분산되고 두둥탁하는 박자만 남아서 들리는데, 나는 그 뭉개진 소리만 듣고도 어떤 곡인지 맞추곤 했다. 음악에 소질은 없지만 10년이 넘도록 동방신기의 노래들만 듣다보니 자연스럽게 탑재된 후천적 재능이다.
그날이 딱 그랬다. 설마 2020년 교대역 앞에서 <아스와쿠루카라>가 흘러나오랴. 그런데 가까이 가보니 진짜였다. 그 노래는 한 카페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루카나 하루카나 우쥬우노 카타스미(아득하고 아득한 우주 한 켠에서)"하는 부분이었다. 분명 아르바이트생이 동방신기의 팬이겠지? 강한 호기심이 내 혈관을 타고 흘렀다. 하지만 순간 흔들리는 이성을 붙들었다. 백번 양보해서 아닐 수도 있었다. 그 노래는 동방신기가 부르긴 했지만, 일본 대표 애니메이션 <원피스>의 주제곡으로도 쓰였기 때문이다. <원피스>를 좋아해서 그 노래를 틀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나는 찝찝한 미련을 남기고 다시 등기소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는 20분 정도가 지났나. 인감증명세를 떼고 사무실로 복귀하는 길에 굳이 그 가게 앞을 지나가기로 했다. 지금은 어떤 곡이 흘러나오고 있나 내심 궁금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 정도 시간이면 이미 다른 가수의 노래가 나와도 한참을 나왔을 것이다. 나는 가슴이 두근두근 거렸지만, 실망할 가능성도 염두에 두었다.
기대가 흥분으로 바뀌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카제니 낫테 솟토 츠츠미타이(바람이 되어 살며시 감싸안고 싶어)"
카페에서는 영웅재중의 콧소리 들어간 미성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곡의 이름은 <忘れないで(와스레나이데/잊지 말아줘)>. 동방신기의 25번째 일본 싱글 앨범에 수록된 곡이다. 타이틀곡이 아닌 수록곡(일본에서는 커플링곡이라고 한다). 이것은 빼도박도 할 수 없는 증거였다.
천번 양보해서 팬이 아니어도 동방신기의 일본 노래 중 유명한 타이틀곡을 알 수는 있다. 예를 들면 인터넷에서 '흔한 아이돌의 가창력'이라는 제목으로 많이 회자된 <Bolero>라든가, <아스와쿠루카라>와 마찬가지로 <원피스>의 주제곡으로 쓰였던 <we are!> 같은 곡들. 하지만 <와스레나이데>야 말로 진정한 팬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수록곡이다. 모든 콘서트와 방송을 포함해도 단 한 번 밖에 부르지 않았다. 나는 단정지을 수 있었다. 이 친구는 찐팬이다! 갑자기 그 아르바이트생은 누굴까 궁금해졌다. 손에 들고 있던 커피를 버리고 그 카페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동방신기 좋아하시나봐요?"
"네? 푸흡. 아 네..."
커피를 건네주던 아르바이트생은 '너 같은 손님은 처음본다'는 표정으로 피식 웃었다. 뭐 사실 남자 고객이 <와스레나이데>를 듣고 동방신기의 곡임을 알아차린 경우도 흔치는 않을 것이다. 그러고나서 별 게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 잠깐 동안의 반가움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뿌듯했다. 여전히 그 곡들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와스레나이데>가 수록된 동방신기의 일본 25번째 싱글 앨범. 이들의 일본 싱글 앨범은 이처럼 타이틀곡(리드곡)과 수록곡(커플링곡), 반주곡 등으로 구성된다
수록곡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수록곡이야말로 열정적인 팬을 일반 대중과 구분지을 수 있는 척도라고 할 수 있다. 대개 "가수 중에서 누구를 좋아해", "누구의 팬이야"라고 흔히들 이야기하지만, 그 가수의 수록곡까지 꿰고 있는 경우는 많지 않다.
게다가 매장들은 보통 음악을 틀 때 차트에 있는 곡들을 뭉텅이로 재생한다. 플레이리스트는 당연히 특정 시기의 인기곡들로 구성된다. 수록곡은 굳이 추가하지 않으면 그 목록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다.
하지만 개인 카페나 작은 옷가게라면 또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런 곳에서는 매장 BGM 선곡권이 아르바이트생(혹은 점주)에게 주어진다. 그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의 곡들을 플레이리스트에 슬쩍 집어넣는다. 배짱 있는 팬이라면 앨범 하나를 통째 재생하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매장에 들어갔을 때 수록곡이 흘러나오고 있다면 그 곳의 임직원은 열정적인 팬일 가능성이 높다. 나는 그런 공간에 들어설 때마다 그들에게 정서적 유대감을 느낀다.
소속감과 동질감은 생명부지의 타인에게도 호감을 갖게 한다. 물론 이게 나쁜 쪽으로 발로하면 학연 지연이 되지만 때로는 전쟁을 멈추기도 한다. 제 1차 세계대전이 벌어진 첫 해, 벨기에 전선에서는 영국군과 독일군이 크리스마스 이브를 기념하여 전투를 중단하고 축구 시합을 펼치기도 했다. 비록 서로 총구를 겨누던 적국이었지만 유럽 대륙의 구성원이라는 소속감과 축구를 사랑한다는 동질감이 그들로 하여금 잠시나마 총을 거두게 한 것이다.
하물며 전쟁 중이던 그들도 그럴 진데 한국이라는 좁은 땅을 살아가는 우리가 같은 문화콘텐츠를 공유함으로써 친구가 되지 못할 이유는 없다. 같은 가수의 수록곡을 알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심리적 장벽을 허물고 정서적 교감을 나눌 수 있다. 수록곡이란 비슷한 경험과 추억을 공유하고 있다는 신호인 셈이다. 그렇게 나는 종종 수록곡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이름 모를 동지들을 만나고 헤어진다. 그리고 그때마다 나 같은 사람이 여기 또 있구나 생각하며 뿌듯함을 느낀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자기들만의 신호를 주고받는 팬들이 있을 것이다.
참, 그렇다고 단점이 없는 건 아니다. 나는 동방신기의 수록곡이 흘러나오는 매장을 들르면 항상 기분이 들뜬다. 반가운 마음은 예상치 않은 소비로 이어진다. 그런 소비는 늘 후회로 마무리된다. 그렇게 보면 소비자의 씀씀이를 헤프게 하는 것 또한 수록곡의 기능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