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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수 Oct 25. 2020

계단에서 노래를 부른 그들은 결국 도쿄돔에 섰다

동방신기의 성장기에서 배운 것들

2007년 3월 17일, 일본 도쿄의 번화가인 시부야 일대가 떠들썩해졌다. 동방신기가 등장한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행사가 예정된 애플스토어에는 수백 명의 팬들이 운집했다. 오죽 혼란스러웠으면 경찰이 안전통제를 해야 할 정도였다. 한 팬은 블로그(야후재팬)에 이런 글을 남겼다.


"얼마 전 송승헌이 긴자에 출현했을 때만큼 붐볐다"


지금 들으면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말이지만 그때는 달랐다. 송승헌이 <가을동화>로 전성기를 누리던 그때, 일본에서 이제 막 알려지기 시작한 한국 아이돌에게 그에 준하는 평가가 따라붙는다는 것은 최고의 찬사였다.


2007년 3월 17일 시부야 일대를 누볐던 동방신기의 2집 앨범 홍보트럭 (출처 : 야후재팬 블로그)


이 날 행사에서 동방신기는 1집 수록곡인 <明日は来るから(내일은 오니까)>와 더불어 직전에 발매한 2집의 수록곡 <Begin>, <Proud>를 열창했다. 세 곡 중 <Proud>를 부른 장면이 누군가에 의해 촬영되어 영상으로 남아있는데, 좁다란 계단에서 옹기종기 모인 채 유선마이크로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팬들에게 안쓰러움을 자아냈다. 한국에서는 2003년 <Hug>로 데뷔한 이래 성공가도를 달리기만 했던 동방신기였기에 더욱 그랬다. 어쩌면 이건 동방신기가 일본에서 겪어야만 했던 고난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일지도 모른다.


2007년 3월 17일 도쿄 시부야 애플스토어에서 진행된 게릴라 라이브. 당시 동방신기가 겪어야만 했던 어려움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으로 남아 있다


동방신기는 2005년 4월 첫 싱글 'Stay with me tonight'을 발표하며 본격적인 일본 활동을 시작했다. 주목할 점이 있다면 K-POP 스타 동방신기가 아닌 신인그룹 토호신기로 데뷔했다는 점이다. 드라마를 제외하고는 한류의 개념조차 없던 시절이라 불가피한 선택이었을수도 있지만, 어찌 되었든 그들은 일본 기획사 AVEX(에이벡스)에 소속되어 철저한 현지화 전략 하에 활동을 펴나갔다. 모든 노래를 일본어로 불렀고 방송에 출연해서도 어설프나마 통역 없이 자신들이 일본어를 직접 구사했다.


국제음반산업협회(IFPI)에 따르면 일본의 음반시장 규모는 미국에 이어 세계 2위다. K-POP이 꾸준히 성장한 덕분에 우리나라도 최근에는 영국, 독일, 프랑스에 이어 6위를 기록하고 있다(3년 연속). 하지만 동방신기가 처음 일본의 문을 두드렸던 2000년대 중반만 해도 일본과 우리나라의 시장 규모 차이는 20배가 넘었다. 일본시장은 그만큼 경쟁도 치열했다. 수많은 가수들이 데뷔했다가 소리소문 없이 퇴장했다. 처음엔 동방신기도 그런 J-POP 시장에서 흔하디 흔한 신인 중 하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Hug>부터 <Rising sun>, <O-正.反.合> 등 내놓는 앨범마다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정상의 자리에 올랐던 그들이었지만 일본 활동 초창기의 반응들은 뜨뜻미지근했다. 그들의 말마따나 첫 콘서트는 200여 명 앞에서 조촐하게 진행했으며(영웅재중) 이후에도 불러주는 방송사가 많지 않아 길거리에서 게릴라 라이브를 열며 이름을 알려나갔다. 지방의 소규모 대학 강당에서 작은 엠프를 여럿 가져다두고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고 알아주는 사람도 없으니 우울증에 시달렸다(유노윤호). 그도 그럴 것이 한국에서는 이미 최정상의 인기를 누리던 그들이었다. "소속사가 시켜서" 꾸역꾸역 해낼 뿐 되돌아가고 싶은 충동을 수없이 느꼈다고도 했다(시아준수).


일본 데뷔 초의 동방신기. 사진을 통해 그들이 겪은 어려움을 엿볼 수 있다. 오른쪽은 교토의 한 대학에서 열린 게릴라 라이브(출처: 일본 Channel-a)


하지만 정말로 노력은 배반하지 않는 법일까? 일본에서 활동을 시작한지 1년이 지나자 차츰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2007년 6월 18, 19일 양일에 걸쳐 도쿄 부도칸에서 진행된 콘서트는 그것을 입증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앞선 편('홀로 도쿄돔에 간 남팬의 이야기')에서 언급한대로 일본의 공연장은 규모별로 단계가 나뉜다. 그 중에서도 부도칸은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이 곳에서 공연을 한다는 자체만으로도 인가가수 반열에 들어섰음을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속사 AVEX는 동방신기의 가파른 성장세를 누구보다 빠르게 감지했다. 사실 두 번째 콘서트 투어 'TOHOSHINKI 2nd LIVE TOUR 2007 〜Five in the Black〜' 역시 이전 투어와 크게 다르지 않은 라이브 하우스(수천 명 규모)에서 계획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표가 3분 만에 매진되었다. 결국 소속사 측은 부도칸(1만 명 규모) 공연을 추가로 기획,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부도칸 콘서트의 백미는 역시 마지막에 불렀던 <Proud> 무대에 있다. 감격에 북받친 믹키유천이 노래를 부르던 도중 울음을 터뜨리고마는 장면에서다. 이를 바라본 나머지 멤버들 역시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팬들에게 '눈물의 프라우드'로 회자되는 이 장면은 동방신기의 스토리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정말 눈물 없이는 지켜볼 수 없다. 그들은 이 콘서트를 기점으로 일본에서도 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시아준수). 그 자신감은 성장의 발판이 되었다. 이듬해 16번째 싱글 앨범 'Purple line'으로 오리콘 주간 차트 첫 1위에 올랐고 그 다음 해에는 마침내 도쿄돔에서 콘서트를 열게 되었다.


'눈물의 프라우드'로 회자되는 부도칸 콘서트 앙코르 무대. 이때 얻은 자신감은 이후 도쿄돔에 서는 밑거름이 되었다


동방신기는 어떻게 일본에서 성공할 수 있었을까? 나는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실력이 가장 큰 요인이었다고 생각한다. 많은 아이돌이 잘생김 또는 귀여움(혹은 섹시함) 등 외적인 것만을 추구하던 시절, 아카펠라 그룹을 표방하며 등장한 동방신기는 완벽한 가창력을 선보이며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얼굴 담당, 노래 담당, 춤 담당 등 멤버별 능력치의 편차가 분명했던 기존의 아이돌과는 달리 모든 멤버가 노래를 잘 했고 춤도 잘 췄으며 외모도 빼어났다. 그래서 <Rising sun>, <Purple line> 등 과격한 댄스곡을 선보이는 동시에 <Forever love>, <Bolero> 등 난이도 높은 발라드를 소화하는 것이 가능했다. 제아무리 비디오가 중요한 시대라고 할지라도 가수의 본령은 노래다. 아마 동방신기처럼 모든 멤버가 노래를 부르는 내내 마이크를 입에서 떼지 않고 화음을 채워넣는 아이돌은 다시 나오기 힘들 것이다.


물론 동방신기라고 처음부터 다 잘했던 건 아니다. 국내에서 실력을 의심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꾸준히 성장했고 2008년 <주문(MIROTIC)>을 기점으로는 실력에 관한 한 모든 논란을 종식시켰다. 일본의 A-nation(에이네이션)은 그 변천사를 확인할 수 있는 무대다. A-nation은 동방신기의 일본 소속사 AVEX의 가수들이 단체로 여는 콘서트다. 우리나라로 치면 SM TOWN 콘서트정도 된다. 동방신기는 여기에 2005년부터 꾸준히 참가했는데, 2005년 어수선한 와중에 10여분 남짓 노래를 부르던 동방신기와 2009년 모두의 주목을 받으며 30분이 넘도록 무대를 선보이는 동방신기는 분명 같지만 다른 그룹이었다. 4년 사이 실력도 인기도 몰라보도록 성장했기 때문이다. 나는 밑바닥부터 최고의 자리에 오른 그들의 성장기에, 그리고 점점 완성되어가는 실력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동방산기가 단지 실력만 가지고 성공한 건 아니다. 만일 그들이 일본에 데뷔한 이후 '한국에서는 우리가 최고'라며 거들먹거렸다면 이후의 동방신기는 없었다. 그들은 한국에서의 빛나는 성공을 뒤로 한 채 철저히 신인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대상을 탄 직후 일본에 가서는 계단이나 강당 바닥 같은 누추한 무대를 마다하지 않았다. 솔직히 나는 최고를 경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 심정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곳에서 노래를 부른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는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겸손과 인내가 쌓여 이후의 동방신기를 만들었음은 분명하다.


나는 삶이 고되다고 느껴질 때면 늘 동방신기가 일본에서 보여주었던 성장기를 떠올린다. 우리나라에서 정상에 서 있던 동방신기도 일본으로 간 뒤에는 무명의 신인을 마다하지 않았는데 하물며 내가 지금 이정도 일에 무릎 꿇어서야 되겠는가. 어차피 잃을 것도 없는데 새로운 시작을 두려워해서야 되겠는가. 이십대 초반의 나이에 그들이 느꼈을 두려움과 불안을 생각하면, 그리고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았던 노력과 용기를 떠올리면, 지금의 나 또한 겸손해지지 않을 수 없다.


도쿄 한 상가의 계단에서 노래를 부르던 그들은 결국 자신들이 꿈의 무대라고 여기던 도쿄돔에 섰다. 꾸준히 성장한 결과였다. 지금은 계단에 서 있는 나 역시, 언젠가는 내가 꿈꾸 곳에 서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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