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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멜리싸 May 26. 2024

어쩌면 그리운 그의 오토바이 소리

집밥

3년의 코로나 팬데믹은

나에게 가장 강렬하고 치열했던 나의 결혼생활을 보낸 기간으로 남았다.


중국어 관광통역안내사, 영어 관광통역안내사였던 그와 나는 팬데믹 시작과 동시에 더 이상 한국을 방문하지 않는 관광객들로 인해

예고도 없는 실직 상태를 맞이했다.

프리랜서였던 우리에게는 많이 모아두지 못했던 적은 통장 잔고가 전부였고

그렇게 그 상황이 오래가지는 않을 거라는 근거 없는 희망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는 춘천역 근처에 새로 짓는 프리미엄 아파트를 건설하는 현장에 막일을 소개받아서 짐을 싸서 떠났고


나는 미국 엘에이 한인타운에서 했던 웨이트리스 경험이 전부였지만,

무조건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어필해서인지 아니면 힘세 보이는 체격 덕분인지

운 좋게 동네 근처 한 국숫집 주방의 설거지 담당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리고 약 1개월 후

우리는 다시 백수 상태로 재회했다. 생애 최초 멋진 우리의 자가주택에서..


남편은 이랬다.

한 번은 일이 미숙해서

무려 1개의 층 아래로 떨어지게 되어 다리가 찢어지는 바람에 몇 바늘을 꿰매는 수술을 하게 되었고

마지막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텃세와 강압적인 잔소리로 인격적 대우를 도저히 느낄 수 없던 그는 참을 만큼 참다가

최종

나에게 '나 집에 간다'라는 연락이 왔다.


나는 이랬다.

나름 속도를 내었지만,

집에서처럼 꼼꼼히 여러 번 헹구며 설거지를 하다 보니

옆에 쌓인 설거지 그릇들은 점점 늘어만 갔고, 중국에서 온 박스 속 포기김치들도 예쁘게 정성 들여 썰었을 뿐인데

나의 작업 속도가 느리고 일이 미숙하다며

나는 잘렸다.


우리는 그때까지만 해도 전우애가 상당했다.

위로를 해주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서로가 마음고생을 충분히 했고

우리의 본업이 아니었기에 어쩔 수 없는 결과인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며칠을 술잔을 기울이며 보내던 날

뉴스에서 '배달업 특수 성행 중'이라는 이슈의 내용을 접하게 되고

그래!!! 우리도 저거 하자

라며 의기를 다졌다


1종 보통 운전면허 15년 차인

나는 자전거나 오토바이를 탈 줄 몰랐고


중국 본국에서 스쿠터, 자전거가 국민 교통수단이었던

그는 운전면허가 없었다.


다음날 난

그에게 실내운전연습실을 추천했고

실제 운전면허 시험장과 똑같은 시뮬레이션 화면과 운전면허학원보다 싼 비용을 강조했고

그는 그냥 나의 말을 순수히 따랐다.


마침내 그는

10번 이상의 탈락의 고배를 마셔서

더 이상 도장 찍을 빈공란 없이

불합격 도장을 원서에 몽땅 다 채우고 나서야 

일반 운전면허학원을 가겠다는 이야기를 꺼냈고

마침내 12번 만에 기능시험 합격 그리고 3번 만에 도로주행 합격의 기쁨을 만끽했다.



우리는

카드 한도를 가득 채울 만큼의

중저가 스쿠터 한대를 구입했고

마찬가지로 카드 할부로 보험까지 겨우 가입을

한 후

어쩌면 생활비가 아닌

스쿠터 구매 자금을 갚기 위한

그의 배달 라이더 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나는 잘 나가던 부동산 시장경기에 맞춰

너도나도 남녀노소 다 따지만 그렇게 어렵다는 부동산공인중개사 자격증 시험에 도전하기로 했고,

그렇게 본의 아니게 집에서 쉬는 제법 한가로운 가정 주부가 되었다.

 

그는

추울 때나 더울 때나 언제나 그렇듯

별 호들갑 떨지 않았고 묵묵했다.

그리고 오후 3시쯤 배달콜이 한가로울 때 즈음이면

'나 점심 먹으러 집 간다'

라는 전화가 걸려왔다. 반가웠다.

나의 어린 시절

우리 온 가족의 끼니를 책임지던 엄마의 흥얼거림 속의 주방일을 하던 모습을 떠올리며

나 역시 엄마의 세포를 닮아 야무지게 주방일 하는 것에 소소한 재미를 느끼며 그에게 맛있는 밥 한 끼를 준비했던 것 같다.


저녁 퇴근시간 무렵에는

올 때가 되었지만 그에게서 '뭐 먹을래??라는 전화도 없고,

부르르릉 부릉~요란하게 주차장을 내려가는 그의 스쿠터 소리도 들리지 않을 때에는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지.. 마음이 철컹 내려앉기도 했고


그러다가 베란다 밖으로 하염없이 보고 있으면

저 멀리서 들려오는 드디어 집을 향해 가까워지는 그 스쿠터  엔진 소리의 요란함은 ,

환한 불빛 속에 반사되어 운전자의 실루엣도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그가 집으로 돌아오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안심과 동시에 드디어 대화할 사람이 집에 온다!! 라며 속으로 기뻐했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맛있고 따뜻한 저녁 한 끼를 그에게 먹이기 위해 메뉴를 걱정하는 것도

답답한 팬데믹을 견뎌내던 나의 작은 행복이었고

재잘재잘 별일 없이 시험공부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나에게 대화할 사람이 온 것도 나름의 낙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팬데믹이 끝나갈 무렵

우리는 이혼을 했다.

팬데믹이 끝나가고 우리의 직업은 원래의  위치로 돌아갈 수 있는 조짐이 보였고

그래서 너무 기뻤는데

우리는 불행해지기 시작했다.


나에게 경제 능력이 복귀했기 때문이었다.




혼자가 된 지금도

저녁 9시경 저 멀리서 스쿠터 소리가 들려오면

혹시?

라는 착각을 하기도 하고 여전히 도로 위에서 배달업으로 스쿠터를 운전하는 분들을 보면 한 번씩 힐끗 거리며 쳐다보는 습관이 생겼다.


잔인했던 팬데믹 속에서

춥고 더운 날 속의 헬멧 쓴 그의 모습은

나에게 가장 가슴 아프고 미안하고,

만약에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면

나는 어김없이 맛있는 한 끼를 준비할 수 있을 만큼 소소하게 행복했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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