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스멜리싸 Jun 05. 2024

웃고 떠들며 이혼하던 날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서 돌아왔습니다


2년 넘는 팬데믹을 경험하는 동안

내가 얻은 것은 우울증과 알코올의존증이라는 병명

그리고 잃은 것은 통장잔고와 남편에 대한 '믿음'이었다.

'믿음'이라고 하면 흔히들 상대방 배우자가 거짓말을 일삼는다거나 아니면 외도를 해서 믿음이 없어졌다..

라는 표현을 쓰기 쉽고 보편적으로 다들 그렇게 생각을 할 것이지만

내가 말하는 전남편에 대한 믿음이라는 것은

평생을 이 사람과 살아갈 미래에 대한 믿음이 사라졌다고 말할 수 있었다.


함께 살 때 심하게 싸웠던 다음 날이면

우리 둘은 가정법원에 들려서 이혼신청서를 작성하고 제출하고 온 기억이 3번 정도 있는데, 자녀가 없었던 탓에 법원에서 오라는 이혼기일날에 가서 이혼만 하면 간단한 절차였지만

우리는 막상 그것을 실행에 옮기진 않았다.

이혼신청서 제출 때는 패기 높은 자존심 싸움이었고, 이혼기일날에는 서로 아직 헤어진 후에 서로 갈 길을 어떻게 설정해야 할지 정해 놓지 못했기 때문에 둘 중 그 어느 누구도 "오늘 이혼 기일인데, 안 가?라고 하지 못했다.

어쩌면 그때까지는 아직 서로가 서로의 부재에 대해서 조금은 두려움과 미련이 있었던 것 같다.



코로나가 종식될 무렵

나에게도 드디어 복귀의 신호가 왔고, 첫 투어로 필리핀에서 온 40명의 단체 관광객들을 모시고 한국관광을 마치고 인천공항에서 환송하던 날이었다.

사진을 찍는 것을 특히 좋아하는 필리핀 손님들께서는 이별 전 기념으로 사진을 찍자고 하셨고, 나는 잘 쓰고 다니던 마스크를 사진을 찍기 위해서 여러 번 벗었다꼈다를 반복했다.

(정부에서 이미 마스크 착용에 대한 의무를 자율적인 착용으로 바꾼 후였습니다)

손님들과 함께 있었을 때는 늘 긴장의 연속이었고, 특히 오늘은 공항으로 시간 내에 도착해야 되는 임무가 나에게 주어진 날이었기 때문에

나의 몸 상태가 어떤지 느낄 겨를이 없었는데, 손님들과 작별의 인사를 나눈 뒤 집으로 가기 위해서 돌아서는데 감기인지 몸살인지 모를 기운이 스멀스멀 느껴지기 시작했고

목의 상태도 독감에 걸릴 때처럼 시큰시큰하면서 침을 삼키면 목젖이 그것을 거부할 만큼 아픔의 고통이 느껴졌다.

예전이었다면 그것이 감기 독감의 신호라고 생각했겠지만,

코로나 기간 동안 코로나에 한 번도 걸리지 않았던

나는 왠지 이 컨디션은 내가 '드디어' 코로나에 걸렸음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마스크 두 겹을 단단히 착용하고 가능하면 기사님과 대화를 피하기 위해서

인천공항 출국장 1층 게이트에서 가장 빨리 올 수 있는 카카오 택시 블루를 호출했고, 난 이 소식을 얼른 남편에게 알려야 했다.

나도 코로나 환자가 되어 자가격리를 하면서, 남편이 똑똑 노크를 하면 그가 정성스레 차려준 끼니를 먹고

내 자식과 같은 고양이 2마리 녀석들을 남편이 잘 챙기는 모습들을 상상해 본다.

몸은 비록 아팠지만 남편이 나를 걱정하는 모습을 조금은 누려보고 싶었다고 해야 할까....



카톡 대화 중


나: 나 지금 몸이 아픈데 근데 배는 고파 죽겠어. 집에 뭐 먹을 거 있어?

.

.

.

전남편: 없는데, 치킨 시켜 먹을래?

나: 그래 알았어, 그래 나 30분쯤 후에 도착하니깐 주문해 놔


그리고 몸 상태가 급격히 나빠져서 더 이상 핸드폰을 쳐다볼 기력도 없어져 난 그대로 택시 뒷좌석에 몸을 기대어 눈을 감고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바로 휴대폰 진동이 울렸고, 남편이었다.

아직 코로나 판정을 받지 않았지만  2년 내내 티브이를 통해서 수없이 배우고 들었던

코로나 증상과 지금 현재 내 몸의 증상이 거의 같은 걸 봐서는

나 역시 코로나에 감염되었음을 초등학생도 알 수 있는 상황에서 난 도저히 그 좁은 택시라는 공간에서 전화통화를 할 수가 없었다.

.

.

전화진동벨이 또 울린다. 남편이다.

4박 5일 투어 일정 동안에도 이렇게 집착적으로 전화를 하지 않던 남편인데 왜 이럴까.. 싶을 정도로 짜증이 밀려온다. 그렇지 않아도 몸도 아프기 시작했는데


나: 나 지금 전화 통화 못해

라고 카톡을 보낸다.



4박 5일 짧은 일정이었지만, 겨울이었던 터라 두꺼운 점퍼와 방한용품들이 들어있는 캐리어짐은 무겁기 짝이 없다.

연애 초기 때였더라면 남편에게 억지로라도 캐리어가 무거우니 입구 쪽으로 나와 있어 달라는 말을 했겠지만

그렇게 그 사람의 다리를 끌고 나오기까지

수많은 설득이 오가야 하고 또 잔뜩 지푸리고 나를 기다리고 있는 얼굴은 더 반갑지 못해

나는 언제부터인가 장시간 집을 비웠다 돌아올 때나, 혹은 무거운 짐이 있을 때도 남편을 절대 부르지 않았다.


아파트 현관문 비밀 번호를 누르고 현관으로 캐리어를 들고 제법 요란스러운 소리를 일부러 내며 들어갔다.

' 난 힘들었고 지금도 몹시 힘들고 캐리어도 무거운 거 분명 알고 있을 텐데,  넌 뭐 하니??라는 약간의 불만 표출이었다.

나를 반겨주는 건 '삐삐비빅' 비밀번호 누르기 시작과 동시에 벌써 달려와서 보고 싶었던 엄마를 마중하기 위해 서 있는 고양이 두 녀석뿐이었다.


사람은??

작은방에 누워서 고개를 빼꼼 내밀더니 "왔어?라고 한마디 겨우 건너는 그의 눈빛은 반쯤 풀어져 있었고, 얼굴과 눈흰자위는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모를 만큼 뻘겋게 되어 있었다.

우리는 내가 알코올의존증이라는 판명을 받고 술을 끊어야 한다는 의사의 강한 권유로 그리고 알코올로 인한 뇌의 파괴 그리고 우울증 유발이라는 검사결과의 충격으로 내가 술을 끊고 나서부터는 각방을 쓰기 시작했다.


언제부터 깔아놓은지 모를 눅눅하고 납작해진 이불을 덮고 한겨울에 얼마나 숙취해소가 안되었으면 웃통은 벗고 팬티만 입고서 머리는 온통 떡져 있었다.

'하......


남편: 전화는 왜 안 받았어?

나: 택시라서 못 받았어

남편: 택시인데 전화를 왜 못 받아?

나: 코로나 걸렸는지 몸이 안 좋아서 기사님 생각해서 전화를 못 받았어.

남편: 놀고 있네 그렇다고 전화를 안 받아??

나: 아니... 하.. 요즘 아직 공공장소에서 전화통화나 대화하면 안 되잖아

남편: 남들 다 하는데 너는 뭐가 그렇게 유별나다고 잘났다 이**아 너 정말 잘났다.


술이 취해 혀는 꼬여서 내가 하는 말을 전혀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나의 상황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내가 다시 복귀하면서 열심히 하던 배달 라이더 일에 소홀하고 있었고, 내가 4박 5일씩 출장 가는 날에는 그냥 대놓고 코로나 시기 동안 못 만났던,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실컷 못 마셨던 술을 마시느라 바쁜 듯했다.


그리고 난 정말 코로나에 걸린 것이 맞았고, 집에 돌아온 날 마스크를 착용하고 조용히 내 방으로 들어가서 자가격리 생활을 하려고 했던 내 계획은 무산되었다.

왜냐면 고양이 두 녀석들은 나에게 밥을 달라, 화장실을 청소해 달라, 놀아달라 그리고 나를 녹이는 " 나를 안고 자요"의 두 눈망울 또롱또롱 귀여움 내세우기 시전으로 나는 온통 하루종일 고양이 육묘를 해야 했고

나 스스로에게도 요양사를 자처해야 했으니

병원 가기 약 챙겨 먹기, 아 맞다, 그전에 밥 잘 먹기, 온통 어지럽혀진 집 청소하기, 투어시간 동안 입었던 옷 몽땅 빨기 등 아팠지만 집에서 아플 겨를이 없었다.


그리고 코로나가 완치되고 나서

나는 부동산에 가서 아파트를 매몰로 내놓았다.

그에게 실컷 나 없이 재밌게  평생 술과 함께 살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서였다.



코로나에 걸렸을 동안

내 미래,

20년 후 30년 후 노년의 미래를 생각했는데..


A.

조그마한 시골집 그리고 고양이들 강아지들과 소소한 행복을 누리며 작은 텃밭을 일구며 점심엔 간단한 건강식으로 챙겨 먹으며 웃고 있는 내 모습에

그는 없다.


B.

내 미래의 집에서의 그의 모습은 술에 취해 웃통을 벗은 채

드러난 까만 눈동자 보다 흰자위가 더 많이 보일만큼 눈이 뒤집힌 채 나에게 얼토당토않은 대화 방식으로 나의 속을 뒤집는 그의 모습

그리고 요란한 싸움 소리

그와 도무지 평범한 대화가 되지 않아 악다구니 쓰는 내 모습,  그로 인해서  경찰들이 집으로 찾아온다.



B

그것이 지금 이대로라면 현실인 미래가 될 것이다.

나의 예측은 거의 빗나간 적이 없었는데, 그러한 예측들은 불행히도 꼭 한 번은 그것을 피하고 부정했고 꼭 한 번은 그 부정이 잘못되었음을 경험하고 나서야 그 불안했던 예측들이 사실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나였다.

이번만큼은 내 미래에 대한 예측을 A이냐 B이냐

지금에서라도 늦지 않은 판단을 해야 할 터, 이 글을 읽고 계신 구독자님들께서도 알고 계신 답이다.

나는 A를 선택해야 한다.



나는 이번에도 이혼 신청서를 잘 접수시켰고,

여러 번 해봤기에 챙겨가야 할 서류들인 신분증, 혼인관계증명서 또한 누락되지 않게 잘 준비했다.

이 문장에서 '우리는'이라는 주어가 들어가지 않는 건 당연하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혼을 선택한 것이다.


처음에는 좀 부끄럽고 민망했다.

남들은 잘하는 결혼생활인데, 

이혼하러 간 남녀들은 마치 성격에 문제가 있던지 가정사에 힘듦이 있던지 경제적으로 어렵던지---글을 쓰고 보니,, 아주 아니지도 않다---아무튼 왠지 문제가 많은 것 같다.


멀쩡한 내가 상대방을 잘못 선택한 내 안목에 대한 부끄러움이었다고 할까..

뉴스에서 내일은 비가 온다고 했고,

다들 우산을 챙길 동안 나 혼자서 고집스럽게 우산을 챙기라는 부모님의 조언을 거절하고

비옷을 선택했고 오히려 그 비옷이 찢어져 나만 혼자 비를 홀라당 맞은 느낌

그냥 죄지은듯한 부끄러움...


이혼신청서 접수 시 받게 되는 출석 기일날짜에 왠지 이번에는 시선이 간다.

4월 13일.. 화요일

왠지 이번에는 꼭 가게 될 것 같다.

이혼신청서 접수를 하고 차에 탄 남편은 "우리 진짜 이혼하는 거야? 라며 눈물을 흘리는지 눈을 닦는다.

그런데 그 눈물은 7년이라는 나와 함께 한 생활에 대한 익숙함과 헤어짐에 대한 눈물이지

나라는 사람에 대한 미련은 더 이상 아닌 걸로 느껴져서 난 그의 눈물에 대한 어떠한 감정적 동요조차도 시간낭비로 여겨질 뿐 그동안 그렇게 수 없는 말로 설득하고 대화시도에 앞섰던 거에 반해 이번은 정말 아무런 말도 하고 싶지 않다.


4월 13일 화요일

즐겁다. 그냥 웃음이 나고 신난다.

이혼 법정 앞에는

수많은 남녀들이 있었는데, 남성분들은 주로 문 밖에 서서 대기했고 여성분들은 안쪽에 비치된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는 아마 자녀가 없거나 자녀들이 장성해 케어해야 할 의무가 없는 (구) 부부들이 협의이혼을 하는 곳 같았다.

접수번호를 호명해서 향후 남남일 부부들이 들어가면 곧장 이내 다른 번호를 호명했고

그만큼 법정의 이혼판결문 발급에 대한 행정 속도는 스피디했다.

대부분 나이들도 중년들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판단을 했다.

다들 얼굴들이 아주 지긋지긋하다는 표정들이었다. 조금의 미련이나 상대방에 대한 미안함은 보이지 않고

여전히 그들의 얼굴에는 서로 니 탓이라는 듯 원망만이 휩싸여 이 창피한 장소에서 얼른 벗어나고 싶다는 듯 고요한 침묵만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그의 고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내가 그의 을 잡은 이유는 중국인인 그에게 지금까지도 한국 내 모든 관공서 업무를 포함한 대부분 처음 하는 일에 대해서는 내 손과 발이 있었기 때문에 이혼하러 온 이곳 법원에서도

나는 그를 능숙히 에스코트해야 할 의무가 아직까지 있었다.

그리고 함께 모니터를 보며 우리가 입장하게 되는 번호 순서를 찾았고, 조금 늦었지만 다행히 시간 내로 와서 번호 호명 즉시 바로 들어갈 수 있겠구나 하는 대화들은 물론이고 다른 사소한 잡담을 속닥속닥 나누었는데

그게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결혼은 해보고 후회하자고 했던가??

그렇게 결혼을 했고 후회막심 속에서

나는 드디어 자석의 N극이 서로 만난 듯, 도무지 맞지 않은 그와의 결혼생활을 여기서 쫑낸다고 생각하니 너무나 기뻤고,

그냥 신분상으로도 내가 그와 남남이 된다는 것 그리고

평생을 귀엽지 않은 알코올중독 반항아 7살짜리 아들을 키워야 하는 것 같은 책임감에서 벗어나는 것 같았다.



어떻게 나에게 전적으로 모든 것을 의지만 하고, 먹고 자고 놀고에 대한 기본 본능조차 본인의 의지로는 이기지 못하는 남자와 무탈하게 이혼할 수 있게

되었을까??

내 말을 결혼생활 내내 안 듣던 그를 내가 어떻게 설득할 수 있었냐면

그것은 ' 돈 '이었다.

초기 주택 구입 당시 들어간 그의 엄마의 돈 그것을 나 그리고 우리 부모님께서는 그에게 깔끔히 돌려주고 그리고 내 인생도 깔끔히 돌려놓기로 했던 것이다.

직장인 1년 연봉 정도의 금액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속에 그는 그렇게 내 손에 끌려 이혼법정에 따라왔고

'두 분 잘 협의하셨습니까?라는 한마디의 질문에 '네'라고 짧게 대답하며

그렇게 우리는 헤어졌다.


'이혼'

처음이 어려워서 그렇지 해보니깐 쉬운 거였네.

                     

이전 01화 어쩌면 그리운 그의 오토바이 소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