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작은비 Jul 29. 2023

이응준, 『내 여자친구의 장례식』

세상 속의 나

어른들이 부끄럽다는 막연한 생각에 난생 처음 시를 썼던, 그 광휘로 가득 찬 순간의 어린 나를 기억한다. 그때는 서른이라는 나이가 인생에 있는 줄도 몰랐다.

어느덧 지금의 나는 묻는다. 내가 두려워하던 울긋불긋한 얼굴들이 대체 무엇이었는지를. 누가 내게 사랑하거나 혐오하는 법을 가르쳤고, 왜 내가 자진하여 거기에 몸을 낭비했으며, 내 마음에 물든 내 모습이 끌려온 그다지 밝지 않은 여기는 과연 어디인가를.

아마도 나는 스스로를 의심하였기에 작가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 무리가 따를지언정, 이제는 내가 나를 믿어주어야 할 시기란 사실을 깨닫는다. 사람이 태어난 것은 사람을 이해하기 위함이라는 진리를, 또한 아무리 묘하고 기발한 이야기를 수억 편 찍어낸다 하더라도 결국엔 그 모두가 우리들의 평범한 하루하루까지도.

나는 다시금 출발선에 선다.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두근거리는 이 가슴이, 참 마음에 든다.

무엇이 기다리고 있건 간에, 내가 가려는 그곳에서 끝을 볼 것이다. - pp.7~8


만일 고통을 감당할 자격이 없다면, 불행조차도 함부로 찾아와주질 않는 것이다. 지금 어떤 사람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은, 결국 그가 아무것도 아님을 뜻하기에. 『Lemon Tree』- p.12


네가 나를 잊어도, 나는 너를 잊지 않을 거야. 곧 내게 다가올 세계에는 그런 권리가 없을 테니까. 그것이 내게 남은 한줌의 위대한 희망이다.

살아서 내가 주도했던 모든 가식들을, 너와는 아무런 의논도 없이 홀로 견뎌야 했던 저 공포의 시간들을 용서해다오.

철환아. 설마, 바람엔 몸이 없겠지? 얼마 후의 난, 그랬으면 좋겠어. 영혼만 푸르게 살아 있었으면 좋겠어. 지배받는 육체가 아닌 자유로운 영혼만... 『이교도의 풍경』 - p.59


“생각해봐.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본래의 특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이 과연 몇이나 남았는가를.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선 모든 게 변질되어버렸지. 밤다워야 할 밤은 술집과 유곽의 불빛 아래 사라졌고, 추위도, 바람도, 그리고 하늘의 별들마저도 인간세계에서 추방되고 말았어. 세상 대부분의 사물들이 신이 부여해준 원형을 잃고, 인간생활 자체의 리듬은 불분명해진 거야.” 『내 가슴으로 혜성이 날아들던 날 밤의 이야기』 - pp.74~75


엉뚱한 얘긴지 모르겠지만, 기실 우리네 삶은 수채화가 아닌 유화가 아닐까. 성숙한 인간이라면, 우선은 세상의 바탕을 마땅히 고통스럽고, 슬프고, 쓸쓸하고, 외로운, 곧 어둠의 색으로 인정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대신 살아가는 동안 내내 점차로 희망이나 보람 같은 것들을 대변할 만한 밝은 색깔들을 스스로 찾아내어, 그 비관적인 인식 위에 덧칠하며 제 평생의 아름다운 그림 한 장을 완성시킬 것! 그리하여 마르는 시간이 오래 걸리기에, 설혹 덜 되었다 하더라도 늘 다 그린 그림처럼 세워두어야만 하는 유화의 작법은, 인생이 지닌 속성과 너무나도 흡사해 자못 섬찟하기까지 하다. 『내 가슴으로 혜성이 날아들던 날 밤의 이야기』 - p.81


많은 걸 가진 자는, 그에 비견할 만한 한 가지를 반드시 잃어야 한다고 믿는 까닭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진정한 평등주의자이다. 세상은 절대 공평하지 않지만, 누구에게나 위험하고 불안하기는 마찬가지 아닌가. 『그녀에게 경배하시오』 - p.112


‘인간은 여름에 제 인생을 즐기고, 가을에 가장 인간다워지며, 겨울엔 인간다움으로 인해 고뇌하다가, 봄에 그 인간됨을 앓는다.’ 『이미 어둠의 계보를 알고 있었다』 - p.137


 “심리학에선 이렇게 말해요. 가령, 열 명이 모여 포커를 하고 있다고 칩시다. 아홉 명이 짜고, 뻔한 게임의 룰을 어떤 한 사람에게만 그릇되다고 우기면, 그는 종국엔 얼굴이 벌게져 굴복하죠. 제가 맞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기를 제외한 다른 모든 사람들이 박박 우기니까, 급기야는 자신이 잘못됐다고 인정해버리고 마는 겁니다. 그러나 만약 그중 한 사람이라도 그의 편을 들어주면, 그는 속아넘어가지 않고 계속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킨다고 해요. 오, 그렇습니다. 오직 한 사람만 나를 믿어준다면, 우리는 소신을 굽히지 않을 수 있는거죠. 우리는 서로에게 그런 신뢰를 주는 사람들이 됩시다. 아니죠, 어쩌면, 오, 벌써, 이미 그렇군요.” 『내 여자친구의 장례식』 - p.223

매거진의 이전글 정상규, 『교도소 25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