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로 푸는 인생이야기
응달의 나무들이 더 튼튼하게 자란다. 바람 사나워 혹독한 땅에 굳센 생명들이 더 많다. - p.24 line 13~15
먼저 이곳에서 시작해야 하지 않겠나. 먼저 이곳에서 부딪쳐서 피 흘리고 해결하지 못하면, 견디지 못하면, 섬기고 모시지 않으면 거기 가서도 별로 얻을 수 없다는 말일세. - p.29 line 16~19
따뜻한 차 안에서 커피를 마시고 음악을 듣는 동안에도 삶을 가차없이 매몰찹니다. 거친 곳에서 밤새 높은 파도와 싸우는 사람들 때문에 지금 이 시간이 가능한 것이지요. 가까이에 바다가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우린 늘 가까이 있어 소중한 사람들을 놓치고 사는 것은 아닌지요. - p.42 line 1~5
자연 앞에서 어쩔 수 없이 무력해지는 게 인간이라고 하지만 미리미리 대비하고 침착하게 대처했더라면 이렇게 큰 희생을 치르지는 않았을 겁니다. 이런 큰 일이 일어날 때 누구보다 많은 희생을 치르는 사람들은 언제나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이라는 것을 잘 알고 계시겠지요. 연료마저 떨어진 캄캄한 밤, 얼음장 속 같은 차 안에서 추위와 배고픔에 떨었을 노약자, 임산부, 어린아이들을 생각하면, 이 한심한 나라의, 한심한 관리들의 행태에 그저 답답한 가슴을 칠 수밖에요, 어디 한두 번 일어나는 일인가요. 새삼 아무 생각 없이 앞만 보고 달려 온 우리들의 삶을 다시 한 번 냉정하게 반성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 p.42 line 17 ~ p.43 line 7
상처 하나에 바늘 하나씩 들고 누더기가 된 이 땅을 한 땀 한 땀 기워나가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보입니다. - p.47 line 17~18
삶은 두드리면 두드릴수록 강해진다. 질겨진다. 촘촘해진다. 깎으면 깍을수록 빛이 난다. 쪼면 쫄수록 엄정해진다. 닦으면 닦을수록 광채가 난다. - p.51 line 3~5
세상 끝에서 세상 끝으로 기러기 날아간다. 춤꾼이 발가락 상처를 두려워하랴. 상처가 춤을 멈추게 할 수는 없다. 포기할 수 없다. 그것은 겁쟁이들이나 하는 짓이다. 손 공구 들고 악착같이 날아가야 할 저 아파트숲 어디쯤 아내와 아이가 기다리고 있겠다. - p.58 line 4~7
망망대해란 말을 실감한다. 아무리 둘러봐도 다 바다다. 그러나 바다에도 길이 있다. 아무리 넓다 해도 함부로 길을 벗어나지 않는다. 바다에도 길이 있고, 하늘에도 길이 있고, 사람 사이에도 길이 있다. 그 길은 하나같이 서로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하고 알고 싶어하고 믿고 싶은 그런 마음에서 뿜어나온 빛이다. 배가 지나간 자리에 흰 빨래 눈부시게 펄럭인다. - p.73 line 2~7
바닷길은 늘 새롭다. 수억 번을 왕복해도 똑같은 길을 갈 수 없다. 버리면서 새로운 길이 열리고 지우면서 또 새로운 길이 열린다. 내 나이 이제 마흔일곱, 얼마나 버리고 얼마나 지우면서 왔는가. 얼마나 아등바등했는가. 쌓아두려고 애걸복걸했는가. 집으로 돌아가려, 불 켜진 방으로 돌아가려 똥줄 타는 줄 모르고 곡예를 해오지 않았는가. - p.78 line 15 ~ p.79 line 3
바다가 아름다운 이유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넉넉한 품에 있다. 어느 것 하나 내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저것이 내 것이다, 이것이 내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소유하지 않는 마음이 이렇게 큰 마음을 낳았다. - p.79 line 16 ~ p.80 line 3
바다가 가득 담고 있으면서도 넘치지 않는 이유는 가슴속 어딘가에 약간씩 비워두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다 쓰지 않고, 다 소모하지 않고 조금씩 비축해두는 곳간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마찬가지이리라. 다 쓰지 않고 비축해두고 ,다 먹지 않고 조금 감추고, 염려하고 위로해주고, 배려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친구 사이는 더 그렇다. 가까울수록 더 섬세하게 상대방 마음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상처를 받더라도 내가 받고, 손해도 좀 보고, 속상해도 참고 상대방 쪽에서 생각해보고 거듭거듭 겸손하고 말이다. 이런 생각을 하니까 마음이 달뜬다. 약간 모자란 달이 좋은 달이다. 오늘 사온 소주도 그렇게 아끼며 먹자. - p.89 line 10 ~ p.90 line 1
언젠가는 우리가 다른 배로 갈아타고 헤어지겠지만, 더 크게는 각각 다른 인생을 살다가 결국은 이 지구라는 큰 배를 떠나겠지만, 아직까지는 우리는 한 배에 타고 있다. - p.104 line 18 ~ p.105 line 3
세월을 시멘트 반죽할 수도 없고 철삿줄로 잡아맬 수도 없고 해와 달을 냉동고에 넣을 수도 없으니, 길이 무섭다. 낯익은 길이 무섭다. 소주 이 홉이 가장 무섭다. 저건 밑 빠진 독이 아니고 밑 없는 독이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세월이라는 독이다. - p.156 line 5~8
우리는 잊혀진다는 데 일종의 공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떤 형식으로든 잊혀지게 되어 있다. 잊혀진다는 것에 초연할 수는 없지만 대범하게 대처해야 한다. 우리 용감하게 잊혀지자. 가서 돌아오지 말자. - p.157 line 6~9
죄 짓고 못산다는 말이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사람이 짧은 한 세상을 살고 지나가는데 얼마나 많은 부침들이 있는가. 인연이란 이렇게 무섭다. 언젠가는 만난다. 외나무다리가 아니더라도 꼭 만난다. - p.157 line 10~13
광주를 다녀왔다. 이십 년이 지났는데도 그 냄새는 그대로 풍겼다. 태극기로 덮고 흙을 덮고 뗏장을 심었는데도 그 위로 비와 눈이 내리고 바람이 이십 년이 넘게 불었는데도 그 냄새는 그대로 났다. 꽃은 또 얼마나 피었다가 졌는지 해와 달은 얼마나 떠오르고 졌는지 피비린내는 그대로 살아 있었다. 맑게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는 욕망은 사치다. - p.158 line 7~12
남을 배려한다는 마음은 나를 배려하는 마음이다. 이렇게 작은 마음 씀씀이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간격을 좁힌다. 사람들은 대부분 건너와 주길 바란다. 먼저 건너주고 먼저 건너가 주고 먼저 손잡아주기. 사랑은 퍼내어 쓸수록 많이 고인다. 지치는 법이 없다. 많이 아프다. 욕망이 수그러들지 않은 탓이다. 캄캄하다. 캄캄하다. 바람 거세다. 병이 온 다음에야 도착하는구나, 당도하는구나. 마음에 독을 품지 말자. 독은 네 몸부터 갉아먹을 테니, 깨달음은 언제든지 늦게 도착하는 것이니. - p.160 line 6~13
과거에 발목 잡히면 꼼짝 못한다. 그러나 어려웠을 때를 잊으면 안 된다. 그때 큰 힘이 되어준 사람을 잊으면 짐승이다. - p.161 line 4~5
통절한 깨달음이 있어야, 안과 밖을 모두 개조하는 죽음을 불사르는 수술이 있어야 한다. 나는 물러서고 있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뼈저리게 느끼는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면 지금 물러서고 있다는 증거다. - p.162 line 1~4
한 사람도 아니고 수십, 수백 명의 석공들이 손이 부르트고 깨지고 닳고 피 흘리면서 오로지 천불 천탑을 완성하고자 애를 쓴 까닭은, 이 나라에 부처님의 광명이 퍼지는 불교 국가를 건설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단 한 가지 소원,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도대체 새로운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요? 새삼스럽게 설명드리지 않아도 당신은 잘 알 것입니다. 이 땅에 태어나 이 땅에서 숨쉬고 일 하면서 살다가 다시 이 땅으로 돌아가는 나와 당신, 그리고 우리 민족 모든 사람들이 직업과 신분과 나이와 성과 몸에 상관없이, 학력과 경력과 태어난 곳에 상관없이 고루 똑같이 대우받는 평등세상 아닐까요? 어떤 높낮이도 허용하지 않는 바다 같은, 강 같은, 물 같은 세상을 원하지 않았을까요? - p.187 line 7 ~ 19
봄은 기다리는 사람에게 그냥 공짜로 오는 법이 아니지요. 아프게 앓고, 슬프게 참고, 피 흘리면서 싸운 사람들에게만 오는 것임을 새삼 깨닫습니다. - p.189 line 14~16
전쟁에 직접 참여한 군인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또, 그 아수라장에서 죄 없이 죽어간 어린이들과 부녀자들과 노인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에게 가하는 더러운 테러에 불과합니다. 전쟁으로는, 폭력으로는, 아무런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섶을 지고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미국이라는 나라의 탐욕은 어디에서 끝날까요? 아무리 그럴 듯한 명분을 내세우더라도 전쟁은 무덤밖에 생산하지 못한다는 것을 저들은 언제 깨달을 수 있을까요? - p.218 line 1~9
특히 내내 가슴 아린 느낌으로 다가온 하명과 지혜의 사랑은 눈물겹다. 돈도, 백도, 집안도, 권력도, 명예도, 그 아무것도 없는, 그야말로 없는 게 유일한 재산인, 몸 하나가 전부인 밑바닥 인생들이, 그래도 한 번 살아봐야겠다고 목숨만큼이나 중요하게 희망의 끈을 붙들어 매는 게 바로 사랑이었다. - p.221 line 16~20
인생이란 뼈를 갈고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 뼈를 갈고 갈아 쌀뜨물처럼, 몸에서 뼛가루가 모두 빠져나가면 사람은 죽는 것이다. 아픔은 뼈의 중심부에서 모세혈관까지 천천히 퍼져 나갔다. - p.224 line 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