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프 웨지(Crisp Wedge) 김아연 개인전 전시 서문
A Yeon Kim
Still Moving
2026.3.24 — 4.5
비가 올 듯한 어느 날, 거대한 나무가 뿌리째 뽑혀 있는 것을 보았다. 생명이 멈춘 듯 보였지만
드러난 뿌리 사이에서는 작은 새싹이 자라고 있었다. 죽은 것처럼 보였던 자리에서도 흙과
공기, 미세한 생의 기운은 여전히 이어져 있었고, 그 안에서는 아주 느린 움직임이 계속되고
있었다. 멈춘 것처럼 보이는 세계 속에서도 움직임은 이어진다.
회화는 정지된 이미지처럼 보이지만, 그 멈춘 화면 안에서도 여전히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화면
속 형상과 물질은 서로 스며들고 연결되며 미세한 변화를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이 회화 안에는 단단히
고정된 형태보다 아주 미세한 진동이 남아 있고, 단절보다는 이어지려는 힘이 쌓여 있습니다.
제 회화에 등장하는 신체와 동식물의 조직, 물과 불, 돌과 잔해, 구조물 같은 것들은 하나의 이름이나
범주로 쉽게 정리되지 않습니다. 이들은 서로 다른 존재로 분리되어 있기보다 유기적 조직과 무기적
구조 사이를 미끄러지듯 이동하며 충돌하고 변형됩니다. 그 과정에서 생명과 무생물, 자연과 인공,
내부와 외부의 경계는 조금씩 흐려집니다.
저에게 죽음은 단순한 생물학적 사건이 아니라 멈춤과 단절-작동의 정지, 가능성의 소멸, 권리의
박탈-이라고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움직임을 애정합니다. 움직이기 때문에 서로 마찰하고 변화하고,
그래서 불안정해집니다. 하지만 그 버둥거림 속에는 여전히 관계와 생명력,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남아 있다고 믿습니다. 제 회화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부서지기 직전의 구조, 위태롭게 매달린
형상, 균열과 파열의 기운을 지닌 존재들은 붕괴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서로 연결되고 버티며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상태로 보여줍니다.
이 전시에서 회화는 물질과 시간, 조건이 맞물리며 계속 변형되는 과정으로 존재합니다. 물감층, 바느질
같은 물질과 형상은 표면 위에서 서로 겹치며 시간의 흔적을 남깁니다. 과거의 붓질, 현재의 물질 상태,
앞으로의 변화 가능성이 하나의 화면 안에서 비선형적으로 존재합니다. 그래서 관객은 정지된 회화를
보는 것 같지만 그 안에서 이어지고 있는 미세한 움직임을 감각하게 됩니다.
구겨진 회화는 평면의 안정성을 흔들고 물질의 저항과 우발성을 드러냅니다. 가로로 길게 펼쳐진
회화는 관객의 이동에 따라 분절되고 다시 연결됩니다. 트레싱지 작업에서는 앞과 뒤가 함께 드러나고,
바느질은 표면을 관통하며 내부와 외부를 이어 줍니다. 이 전시의 회화는 고정된 이미지를 보여주는
매체를 넘어 시간의 층위와 물질의 변화, 우연과 개입이 함께 작동하는 장이 됩니다.
결국 저는 우리가 세계를 고정된 범주로 나누어 이해해 온 방식에 작은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화면
속 형상들은 완결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되어가는 상태로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움직임은 관객의
시선과 이동 속에서 다시 이어집니다. 멈춰 있는 것처럼 보이는 회화에서도 미세한 움직임과 관계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습니다.
김아연 개인전
Still Moving (멈추어 있으나 움직이는)
12:00 - 18:00
(월요일 휴관)
https://www.crispwedge.com/#h.7xh2gnel1b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