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스터에게 용서를 빌며

'에세이 빠나콘' 다섯 번째 이야기

by 스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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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7월 25일 다섯 번째 메시지 : 햄스터에게 용서를 빌며


나는 가끔 죽음에 대해 생각해. 어쩌면 하늘에는 내가 죽기만을 기다리는 무리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어. 그들은 지금도 글을 쓰고 있는 내 모습을 지켜보고 있겠지.


내가 일곱 살 때쯤 기르던 햄스터들이 가장 먼저 떠올라. 엄마를 따라갔던 마트에서 발견한 녀석들이었지. 작은 집 안에서 부지런히 쳇바퀴를 돌리고 있던 햄스터들이 얼마나 귀엽던지, 매일 돌봐줄 수 있으니 사달라고 엄마를 졸랐어. 내 말을 완전히 신뢰하진 않았지만 속는 셈 치고 사준 거라고 엄마는 말했어. 그렇게 함께 살게 된 두 마리의 생명체에게 나는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던 것 같아.


처음에는 귀여워서였지, 집 안에서 얌전히 쳇바퀴를 돌리던 햄스터를 꺼냈던 건. 손 안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습이 예뻤고, 촉감도 부드러웠어. 이 녀석들도 바깥을 좋아할 거라는 막연한 생각에 자주 끄집어내 같이 놀곤 했지. 하지만 녀석들의 생각은 나와 달랐나 봐. 햄스터들은 내 손 안에서 미끄러지듯 도망가 어디론가 숨어버렸어. 숨을만한 곳을 한참을 뒤졌는데, 결국 두 마리 모두 찾지 못했어. 그때 나는 소리 내 엉엉 울었는데, 어딘가에서 죽을지도 모를 햄스터들에 대한 미안함보다는 내가 데리고 놀던 것들이 사라진 데에 대한 상실감이 컸던 것 같아.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다른 햄스터를 분양받아오면서 사라진 햄스터에 대한 기억은 흐릿해졌으니까.


안타깝게도 다른 햄스터들 역시 그리 오래 기르진 못했어. 햄스터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었거든. 어떻게 기르는 게 잘 기르는 건지,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도 잘 몰랐어. 심지어 햄스터 두 마리를 같은 케이지 안에 놔두면 서로를 물어 죽일 수 있다는 사실조차도. 그렇게 나는 여러 마리의 햄스터를 죽였어. 무지가 만들어낸 비극인 거지.


하늘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을 법한 동물 중에는 거북이도 있어. 이번엔 무지가 아니라 게으름 때문에 희생당한 생명이지. 초등학교 5학년 때인가. 나는 거북이가 너무 키우고 싶었어. 수명이 긴 거북이와 함께 늙어가는 건 정말 멋질 것 같았거든. 어느 날, 한 푼 두 푼 모은 용돈을 엄마에게 건네면서 거북이를 사달라고 했어. 용돈을 모아 보탠다는 건 햄스터 때와는 달리 생명을 잘 키울 수 있다는 의지의 표명 같은 거였어.


엄마는 다시 한 번 속는 셈 치고 작은 아기 거북이를 사다 주었지. 우리 집에 새롭게 들어온 이 수생 거북이는 내가 원했던 육지거북이가 아니었지만 나는 이 아이를 애지중지 길렀어. 꼬박꼬박 밥도 챙겨주고, 물도 깨끗하게 갈아줬지. 아기였던 거북이가 약간은 커진 것 같았어. 하지만 친구들과 바깥에서 노는 게 좋아질수록, ‘학원에 가야 한다’와 같은 허울 좋은 핑계가 늘어날수록 거북이에게 투자하는 시간이 줄어들었지. 결국은 더러워진 물 때문에, 죽어버린 아기 거북이를 발견하게 됐어.


‘네가 죽인 거니까 네 손으로 직접 처리해라’ 그때 우리 엄마는 내게 이렇게 말했는데, 내가 함부로 생각했던 생명이란 것의 소중함을 조금이나마 느끼게 하려고 그런 걸지도 모르겠어.


일련의 사건 이후로 나는 생명을 기른다는 것의 무게감에 대해 생각해. 나로 인해 죽어버린 햄스터와 거북이가 다른 주인을 만났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 말이야. 무엇인가를 책임진다는 게 단순히 행위에 대한 책임이 아니라, 그걸 넘어서서 그 존재까지 포용하는 거라는 걸 느낀 뒤로는 ‘내가 책임지겠다’는 말도 잘 못 하겠어.


그런 사람 가끔 TV에 나오잖아. 좁은 집안에서 고양이나 강아지를 수십 마리씩 기르는 사람. 그들은 자신의 강아지를 너무 사랑해서 다른 곳으로 보낼 수 없다고 말하지만, 강형욱 아저씨 같은 사람들은 좋지 않은 행동이라고 혼내곤 하잖아. 기르고 싶다고 무작정 기르는 게 능사는 아니라면서. 나도 강형욱 아저씨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해. 생명을 기르고 싶다는 소유욕보다 기를 수 있는 상황인가를 훨씬 더 중요하게 봐야 한다는 거지. 길러지는 아이들의 입장도 고려하면서.


낙태(임신중지) 문제를 다루는 것도, 이거랑 비슷하지 않을까. 낙태를 반대하는 사람 중에서 생명이니까, 무조건 낳아야 한다고 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잖아. 여성이 왜 낙태를 하려고 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 사람들 말이야. 나는 이 사람들이 좁은 방안에서 강아지를 수십 마리씩 기르는 사람과 유사한 점이 있다고 생각해. 생명을 기르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뿌듯함을 느끼는 거지. 좁은 방안에서 여러 마리의 강아지가 치열하게 신경전을 하는 현실은 고려하지 않으면서. 중요한 건 '사는 것' 그 자체보다 ‘어떻게 살아가는지’인데 말이지.


나는 당분간 생명을 기르지 못할 것 같아. 지금의 나는 내 한 몸 챙기는 것 정도가 최선이거든. 언젠가 자리를 잡고 여유가 생기게 된다면, 강아지 한 마리 정도만 길러 볼까 해. 천국에 있는 햄스터와 거북이로부터 배운 교훈을 항상 마음에 새기고, 무지와 게으름에서도 벗어나야겠지.


지금도 집밖에서는 강아지 한 마리가 짖고 있어. 배가 고파서일까? 아니면 어딘가가 불편해서일까? 아참…. 햄스터와 거북이는 과연 나를 용서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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