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점으로서의 예민함

'에세이 빠나콘' 열세 번째 이야기

by 스미스

개인적으로 진행하고 있는 메일링 서비스인 '에세이 빠나콘'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곳입니다.

구독자분들께 전달된 메일이 2주 후, 이 곳에 공개 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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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점으로서의 예민함

비행기를 탈 땐, 창가 자리를 선호하는 편이다. 이륙할 때 내는 모터 소리를 유심히 듣고, 떠오를 때의 도시광경을 살펴보기 위해서다. 버스 역시, 창가 자리에서 실시간으로 움직이는 나무들을 볼 수 있기에 가장 선호한다.

하지만 창가 자리를 좋아하는 건 나만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비슷한 생각을 한다. 그래서 비행기 좌석을 선택할 때, 가운데 좌석만 남아있는 상황을 심심찮게 보곤 한다. 오늘도 역시 그랬다.

창가 자리에는 중학교 3학년 정도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앉아 있었다. 이 아이가 왜 혼자 비행기를 타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딱히 불안해 보이진 않았다. 아이는 비행기가 신기한지 출발 전부터 비행기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잠시 후 비행기가 이륙하자 아이는 창문 사이로 카메라 셔터를 연신 눌러댔다. 내적흥분 정도에서 그치는 나와 달리, 아이는 적극적으로 신남을 표출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는 1시간도 채 안 걸리지만 아이는 이 모든 순간을 잡아내겠다는 듯 계속해서 찍고, 살폈다. 그 모습은 풋풋하기도 하면서, 귀여운 면이 있었다.

소녀는 내가 잃어버린 ‘기대감’이라는 걸 갖고 있었다. 비행기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나. 비행기가 날아가는 것이 그리 크게 놀라운 일은 아니라는 생각. 이륙과 착륙에 익숙한 내가 갖지 못한 것이었다. 짐작건대 아이는 이런 나와는 많이 달랐을 것 같다. 비행기가 뜬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 모습으로, 이런 과정으로 뜨는지는 몰랐지 않았을까. 그래서 이 신기한 과정을 최대한 기록하기 위해 애를 썼겠지, 비행기의 이륙 장면이 보여줄 무엇인가를 기대했을 테다.

여기서 나는 또 나이 듦에 대해 느낄 수 있었다. 어떤 경험과 생각에 무던해지는 것. 비행기가 뜨는 과정보다, 비행기가 떴다는 결과에 더 집중하는 것. 이게 나이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얼마 전, 친구가 털어놓은 고민이 생각이 났다. 친구는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에서의 인간관계가 너무 어렵다고 했다. 회사 동료들의 일거수일투족이 신경 쓰이고,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는지에 대해 고민하느라 항상 머리가 아프다는 이야기였다.

사실 나는 이 고민이 명확하게 와닿지는 않았다. 평소 타인에 대한 기대가 그렇게 크지 않은 나로서는 내가 할 일만 열심히 하면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기대를 버리면 되는 것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그렇게 쉽게 말할 일은 아니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사실 기대라는 것은 무언가에 대해 애정을 느끼는 것과 관련 있는 것 같다. 비행기가 뜨는 과정이 신기한 어린 소녀와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지에 대해 스트레스를 받는 친구의 고민은 본질적으로 비슷하다.

어떤 사실도 시니컬하게 넘기지 않고, 그 과정을 온전히 받아들이려고 하는 태도, 이 태도가 기본이 된다. 자신의 삶에서 흘러가는 시간을 1분 1초 치열하게 느끼고 있던 셈이다. 친구의 고민은 안타깝지만, 그렇게 열심히 일상을 살아나갈 수 있는 그 열정은 사실 부럽기도 했다. 그렇게 힘겹게 고민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대견하게 느껴질 수 있는 순간이 언젠가 찾아올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평소 시니컬하고, 무난한 삶을 살아왔던 나로서는 그런 치열한 고민의 흔적들이 부러울 때가 있다. 그래서 내 옆자리에서 비행기를 관찰하던 그 소녀에게 더욱더 ‘말괄량이가 되어라’라고 마음속으로 이야기를 건네고 싶기도 했다.

내가 경험해봤던 일, 들어봤던 이야기, 만나봤던 사람이라고 단정 지으며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태도를 경계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안다. 이에 따른 섣부른 조언도 최대한 삼가야 한다는 교훈도 항상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다는 사실에 좌절을 겪기도 한다.

평소 자신이 예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섣부른 조언도 아니고, 예민하게 굴지 말라는 황당한 훈수도 아니다. 그저 자신을 애써 바꾸려 하지 말라는 응원의 메시지다.


⠀유익하고 재미있는 강의는 대개 많은 과제가 따르고,
흥미롭고 탄성을 자아내는 환경은 위험하기 마련이며
창의적인 사람은 예민하거나 괴짜인 경우가 수두룩하다.

김영민 - 『공부란 무엇인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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