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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미스 Mar 27. 2022

돌아와요 금강분식

<생각 꾸러미>


햇볕이 너무 뜨거워 그늘 속으로 숨지 않으면 익어버릴 것만 같은 그런 날, 나는 엄마를 기다리며 초등학교 운동장에 서 있었다. 날씨가 더운 탓인지 운동을 하기 위해 밖으로 나온 아이들은 없었고, 소리를 지르면 메아리가 들릴 듯이 공간은 텅 비어있었다. 내가 문구점에서 산 100원짜리 소다 맛 아이스크림은 포장지를 뜯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바닥에 국물이 뚝뚝 떨어졌다. 나는 허겁지겁 녹아가고 있는 아이스크림을 입에 넣었고 한 방울도 놓치지 않을 기세로 나무 스틱까지 쪽쪽 빨아댔다.


15분쯤 지났을까. 뙤약볕에 제대로 노출된 내 얼굴이 불긋불긋해질 때쯤 엄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늦게 도착한 엄마를 쏘아봤지만 엄마는 집안일이 생각보다 늦게 끝났다며 대수롭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탈 듯 말 듯 한 얼굴을 보여주며 얼마나 더운 상황에서 엄마를 기다렸는지 적극 어필했지만 엄마는 그늘에 있지 그랬니라며 맞는 말만 골라 했다. 틀린 말이 없는 엄마의 대답에 말문이 막혀버린 나는 잔뜩 언짢아졌다.


내 기분을 눈치챈 엄마가 나에게 '금강분식'에 가자고 제안했다. 금강분식은 당시 내가 가장 좋아한 분식집 이름이다. 초등학교 정문에서 1분 거리에 있는 금강분식은 나와 친구들의 대표적인 만남의 장소였다. 줄여서 '금분'이라고도 불렀다.

엄마와 함께 금강분식에 들어서자 아주머니가 나를 보고 "어서온나"하며 반갑게 인사를 했다.

나와 달리 사교성이 매우 좋은 우리 엄마는 이미 분식집 아주머니와도 언니 동생 사이가 된 지 오래였다. 24살에 결혼한 엄마는 다른 엄마들보다 나이가 어린 편에 속했고 분식집 아주머니는 엄마의 많은 언니 중 한 명이었다.


"오랜만에 왔네~ 엄마랑 왔으니까 먹고 싶은 거 마이 무라" 아주머니가 나를 보며 말했다.

"어…. 쫄쫄이하고요 물라면 500원짜리도 하나 주세요" 내가 수줍게 주문하자 아줌마는 오야~하고 맞받았다.

쫄쫄이는 내가 좋아하는 간식 중 하나였다. 쫀드기를 기름에 튀긴 뒤 라면 수프, 설탕 등을 버무린 수프에 묻혀 먹는 일명 '울산 쫀드기'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간식인데 따뜻할 때 먹으면 정말 부드럽고 달콤했다. 5~6줄 정도 되는 쫀드기가 500원, 그것에 절반 정도 되는 쫀드기가 300원이었다. 쫀드기가 식어 딱딱해진 뒤 먹으면 그것 나름의 크리스피함이 있는데, 우리는 이를 '딱쫄'이라 불렀다. 단짠이라는 말이 유행하기도 전에 나는 이미 단짠을 즐기고 있었다.


물라면은 끓인 라면을 기다란 종이컵에 나눠 파는 것이었다. 300원은 일반 종이컵, 500원은 조금 더 긴 슬러시용 종이컵에 팔았다. 긴 컵이라고 해봤자 나무젓가락으로 한 두 세 번 먹으면 없어지는 것들이었지만 맛있게 끓이는 비법이라도 있는 건지 집에서 끓여 먹는 라면보다 더 맛있었다. 하지만 양에 비해 가격이 비싼 탓에 물라면은 엄마와 함께 오거나 친구에게 얻어먹을 때 말고는 내 돈 주고 사 먹는 일은 드물었다.


그 시절 금강분식이 내 용돈을 어떻게 사로잡을 수 있었는지를 설명하자면, 금강분식에는 정말 다양한 메뉴가 있었다. 피카츄부터 시작해서 만두, 떡볶이, 염통꼬치, 각종 튀김류, 어묵 등등.. 메뉴는 다양했지만 맛은 하나같이 일품이었다. 항상 손님들을 따뜻하게 맞아주던 아주머니의 온화한 표정과 말투도 손님 흥행에 한몫했다.

하루 용돈 500원이었던 나는 매일같이 금강분식에 갔다. 어떤 날은 떡볶이를, 어떤 날은 피카츄를, 어떤 날은 염통꼬치를 먹었지만 먹지 않은 날은 거의 없었다.


"이모 떡삼만백이요" "떡삼만백 무쎄요"

단돈 500원이 초등학생에게 주는 행복은 꽤 큰 것이었다. 작은 이쑤시개로 5개에 100원 하는 떡볶이를 정확히 15개를 집어먹고 만두 1개를 집어먹으면 분식집 아주머니가 100원을 거슬러 줬다. 내가 애용하는 '떡삼만백'이었다. 물론 가끔 숫자를 잘 못 세어(잘못 셌다는 핑계로) 1개를 더 먹을 때도 있었지만 아주머니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먹으라는 의미의 '무쎄요'를 외치고는 다른 할 일에 집중할 뿐이었다. 돈이 없는 날에는 100원어치의 떡볶이를 먹고 집으로 돌아가기도 했고, 때로는 아무것도 사 먹지 않은 채 어묵 국물만 홀짝이는 날도 있었다. 내가 얼마를 들고 분식집을 찾았는지 간에 아주머니의 반응은 항상 똑같았다.


엄마의 도움으로 무려 1000원어치의 쫄쫄이를 먹게 된 나는 어느새 기분이 좋아져 있었다. 탈 듯 말듯한 얼굴에서 느껴지던 화끈거림과 약간의 통증도 분식집에 들어오고 난 이후 씻은 듯이 사라졌다. 갓 튀긴 뜨거운 쫄쫄이의 힘이었다. 내가 단짠의 마법에 빠져있는 사이 엄마와 아주머니는 꽤 심각한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어린 나에게는 그런 무거운 이야기보다 비닐봉지 안에 남은 쫄쫄이 수프를 어떻게 남김없이 먹을 수 있을지가 더 중요했다.


그렇게 밥 먹듯 드나들던 금강분식이었지만 중학교에 입학하고 나니 갈 일이 눈에 띄게 줄었다. 중학교 앞에는 또 다른 분식집이 있었던 점과 통학로가 달라진 게 주원인이었다. 이제 금강분식이 집과는 반대 방향이 되어버려서, 분식집을 가려면 꽤 먼 길을 돌아와야 했다. 자란 만큼 용돈은 늘었지만 식욕이 줄어들고 난 이후부터는 용돈을 먹는 것에 쓰는 것보다 노래방이나 PC방 등 즐길 거리에 사용했다.


그래도 가끔 금강분식을 찾을 일이 있었다. 중간고사나 기말고사처럼 학교가 빨리 끝난 날에는 친구와 산책도 할 겸 분식집을 찾았다. 5개 100원이던 떡볶이는 어느새 300원으로 가격이 올라있었다. 소스에 절인 피카츄의 몸값도 어느새 올라있었고, 떡삼만백은 이제는 사라진 메뉴였다. 아주머니의 주름은 초등학생 시절보다 조금 더 많아졌지만 목소리나 말투는 여전했다. 그녀는 오랜만에 가게를 찾은 나를 보고서도 "어서온나 잘 지냈나" 하며 반가운 기색을 드러냈다. 아주머니의 트레이드마크인 "무쎄요"도 건재했다. 예전과 특히 달라진 점이라고는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거리던 가게 안이 눈에 띄게 조용해졌다는 사실이었다.


금강분식 아래에는 또 다른 분식집이 자리 잡았다. 문구점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인근에 경쟁업체가 생긴 것이다. 신화분식이나 선화분식 같은 이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또 학교에서 걸어서 5분 정도 되는 거리에 꽤 큰 규모의 시장이 리모델링을 마쳤는데, 그곳에는 분식집을 포함해 여러 음식점이 생겨났다. 인근에는 학원가도 있어 어린아이들이 학교에서 나와 금강분식에서 군것질을 하는 대신 학원이 끝난 뒤 인근에 있는 분식점을 찾는 식으로 분위기가 바뀐 것이었다. 아주머니는 아래 가게가 생긴 지 1년 정도 지났는데 처음에는 아래쪽 가게에 손님이 몰리다가 지금은 양쪽 다 파리만 날리는 상황이라고 푸념했다. 어쩌면 엄마와 아주머니가 나누던 무거운 대화는 이런 상황에 대한 우려였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렇다 할 위로도, 그럴싸한 조언도 건네지 못한 채 가게를 떠났다.


그 후로 혼자, 또 친구들과 함께 분식집을 몇 번 더 방문했다.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방문했을 때 떡볶이의 가격은 500원으로 올라있었다. 그 후 고등학교에 다니다 문득 생각나 그 가게를 다시 찾았지만 가게의 셔터는 굳게 닫혀있었다. 간판은 그대로 있어 쉬는 날인가 생각했지만 다음번에 분식집을 찾았을 때는 간판도 철거된 상태였다. 누군가 말해주지 않고서는 그곳이 분식집이었다는 것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금강분식은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사라졌다.


마음이 이상했다. 가게가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은 지금껏 수도 없이 봐왔지만 이번엔 좀 다른 느낌이었다. 마치 소중한 친구가 다른 학교로 전학 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사람이나 동물이 아니라 가게에도 이런 마음이 들 수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금강분식'이라고 써진 희미하고 약간 삐딱한 간판 모양이 기억에 오래 남을 듯했다.


지금도 가끔 떡볶이를 먹을 때면 아주머니가 생각난다. 떡볶이를 이쑤시개로 찍어 먹으려 할 때면 아주머니가 "무쎄요"하고 말해줄 것 같다. "어서온나"와 "천천히 무래이"로 시작해 "잘 가 그래이"로 끝나는 정겨운 말투와 목소리는 아직 귀에 맴도는 것 같기도 하다. 과거로 돌아간다면 꼭 가야 할 곳 중 한 곳이 금강분식인 이유다.


작가 이슬아는 글쓰기를 부지런한 사랑이라고 했다. 글을 쓰기 위해 특정한 기억과 상황, 감정을 떠올리고 이를 예리하게 표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일은 사랑하는 것과 같다는 의미다. 또 마음을 부지런하게 만들고 흘러가는 순간을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도 한다. 꾸준히, 더 열심히 써 내려가야 할 이유가 오늘도 하나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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