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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미스 May 08. 2022

가난의 기억

<생각 꾸러미>


"딩동딩동"


어김없이 수업 종료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무겁던 공기는 어느덧 가벼워지고 의자끄는 소리, 웅성거리는 소리가 온 교실을 가득 채웠다. 의자에 앉아있었지만 수업에는 별로 관심 없었던 10살짜리 꼬마 아이는 이때만을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 뒤편으로 향했다. 그의 손에는 조그맣지만 제법 잘 만들어진 딱지가 쥐어져 있었다.


소년이 친구 두 명의 딱지를 뒤집고 의기양양해질 때쯤, 교실 앞에 설치된 낡은 스피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지직하는 소리와 섞여 나온 그 목소리는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 좋지 않은 음질 탓에 방송에서 나온 이름과 이를 따라 말하는 학생들의 모습은 마치 민요에서의 선창과 후창을 보는 것 같았다.


"김민수, 지성훈, 박재호, 정민석, 양민지...이상 지금 부르는 학생들은 행정실로 오세요"

스피커 속 목소리가 누군가의 이름을 계속 불러댔다. 아는 이름이 나올 때마다 다른 친구들은 영문도 모른 채 환호했다. 모르는 사람들이 봤다면 경품이라도 당첨된 줄 알았을 정도의 열기였다. 스피커 속 목소리는 반복해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다 딱지를 들고 있던 소년의 이름도 언급했다. 자신의 이름을 듣게 된 소년의 얼굴은

잠시 굳어졌지만 이를 알아채는 이는 없었다.


친구들의 영문 모를 응원과 환호를 뒤로한 채 소년은 행정실로 걸음을 옮겼다. 행정실은 교실보다 2층 아래에 있었는데 이날 소년에게는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이 계단이 유독 길게 느껴졌다.


소년이 행정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곳에는 다른 친구들이 이미 도착해 있었다. 그들도 방송에서 나오는 자신의 이름을 듣고 행정실을 찾은 게 틀림없어 보였다. 소년은 이들도 같은 반 친구들의 환호를 등에 업고 이곳을 찾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년은 약간 쭈뼛쭈뼛한 자세로 친구들이 서 있는 곳에 가서 나란히 섰다.


"자 다들 왔니? 오늘 너희를 부른 건 다름이 아니고, 너희 이번 달 급식비가 아직 빠져나가지 않아서야. 무슨 착오가 있는 것 같은데 다들 돌아가서 부모님께 꼭 말씀드려 알겠지?"

방송 속 목소리와 똑 닮은 목소리를 지닌 한 여성이 소년과 친구들을 향해 말했다. 여성의 목소리는 꽤 상냥했지만 그녀의 표정에서는 귀찮음 따위의 썩 유쾌하지 않은 감정이 배어있었다.


여성의 말이 끝나자 소년과 함께 호명된 다른 친구들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부 학생은 얼굴을 붉히기도 했고, 또 다른 학생은 이러한 일이 익숙한 듯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소년의 얼굴도 약간 붉어지긴 했지만 비슷한 일을 몇 번 겪어본 듯 큰 동요는 없었다. 여성이 몇 마디 말을 더 덧붙인 뒤에야 학생들은 행정실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쉬는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소년은 길고 무거운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가 교실로 향했다. 어수선한 모습의 교실 풍경은 여전히 남아있어 시간이 흐르지 않은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교실 뒤편에 걸려있는 커다란 시계의 움직임을 보고 나서야 시간이 흘러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소년이 교실로 들어서자 환호하던 친구들이 소년을 에워쌌다. 그들은 천진난만한 얼굴로 행정실에는 왜 갔느냐고 물어댔다.

"무슨 상 받으러 간 거야?" "행정실에서 뭐래?" "뭐라고 했는지 빨리 말해봐"

친구들의 질문이 쏟아졌지만 소년은 입만 우물쭈물할 뿐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반복된 질문에도 소년이 대답하지 않자 흥미가 떨어진 친구들은 이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마침 수업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린 것도 소년에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행정실에서 짐짓 담담한 척했던 소년의 얼굴은 친구들의 질문에 속절없이 붉어졌다. 수업이 시작됐지만 소년의 귀에는 수업이 전혀 들어오지 않았고, 그는 자신의 환경이 왜 이럴까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벗어날 수 없는 무기력함 따위의 감정이 소년 주위를 맴돌았다.


수업을 마치고 몇 차례 더 이어진 친구들의 질문공세에도 소년은 제대로 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이 상황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소년도 난감했기 때문이다. 그는 알 수 없는 답답함과 부끄러움을 가득 안은 채 학교를 떠났다.


집에 도착한 이후에도 소년의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소년의 엄마는 실수라고, 별일 아니라고 소년에게 설명했지만 소년은 엄마와 아빠가 돈 문제로 다투는 것을 여러 차례 봐왔기 때문이다. 자신이 행정실에 불려가는 날과 엄마와 아빠가 다투던 때가 비슷한 시기라는 것을 소년은 잘 알고 있었다. 운 좋게 다음 달은 행정실에 가지 않을 수 있지만, 그 다음 달은 높은 확률로 방송에서 자신의 이름이 불릴 것이라는 것을 소년은 모르지 않았다.


소년은 방에 누워 천장을 쳐다봤다. 그리 높지 않은 천장은 언젠가 꼭 자신을 향해 내려올 것 같았다.

'이 다음에 내 키가 자란다면 허리를 숙이고 생활해야 하지 않을까'하고 소년은 생각했다. 눈을 감으면 천장이 떨어질 것만 같아 소년은 눈을 제대로 감지도 못한 채 끔뻑끔뻑 천장만 쳐다보고 있었다.


'다음 달에도 행정실에 가야 한다면 친구들에게 뭐라고 설명해야하지...'

소년은 천장을 보며 생각했다. 기회가 된다면 행정실에서 자주 보는 다른 친구에게 뭐라고 설명해야 하는지 슬쩍 물어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 친구에게 말을 건네는 것이 말을 하지 않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이내 마음을 접었다.


해가 저물고 밤이 깊어가자 형광등 불빛도 희미해지는 것처럼 보였다. 천장이 소년을 향해 다가오는 듯했지만, 소년은 무거운 눈꺼풀과 싸움을 이어가느라 이를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잠잠하고 묵직하게 다가온 밤은 어느새 소년의 걱정을 집어삼킨 채 자기 모습을 과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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