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은 어떻게 부모가 됐을까
1960년생인 길남 씨는 젊은 시절을 '뱃사람'으로 살아온 남자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바닷일에 뛰어든 그는 뱃고동 소리와 바다의 짠맛을 온몸으로 느끼며 열심히 일했다. 열정에 실력까지 겸비한 그는 직장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고 어린 나이에 선장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뱃사람으로서의 입지를 공고히 한 그는 자기 직장에 꽤 만족했다. 배 위에서는 누군가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는 점과 그가 벌어들이는 수입이 다른 사람에 비해 많다는 점은 언제나 그의 자랑이었다. 자유롭게 바다를 누비며 이곳저곳을 여행한 경험도 그에게는 귀중한 자산이었다.
어린 시절, 나도 딱 한 번 길남 씨가 몰던 배를 본 적이 있다. 그가 몰던 배는 어린아이였던 내 눈에 거대한 성벽처럼 보였다. 배는 큰 몸집을 자랑하며 길남 씨의 자부심을 뒷받침했고 바다를 딛고 선 장군 같은 위용을 보여줬다. 배 위로 올라서자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방들과 뭐가 뭔지도 모르는 시설물이 나를 반겼다. 자칫 금속 구조물에 부딪힐까 걱정돼 조마조마한 엄마의 마음을 알지도 못한 채, 나는 배 이곳저곳을 신나게 탐험했다.
길남 씨가 사용하는 선장실에는 개인용 컴퓨터 한 대가 설치돼 있었다. 컴퓨터를 자주 보지 못해 신기해하던 나는 컴퓨터에 설치돼 있는 게임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를 사로잡은 게임은 '라이온킹'과 '버추어캅2'였다. 컴퓨터 앞에 앉은 나는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게임을 즐겼다. 길남 씨는 선원들에게 내가 마실 음료수를 주문해 나에게 건넸다. 컴퓨터라는 신문물을 쓸 수 있고 목이 마를 때 마음껏 음료수를 요구할 수 있는 아빠의 '힘'은 어린 나에게 매우 대단한 것처럼 느껴졌다.
2000년대 초반, 길남 씨는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옷이었던 바닷일을 그만뒀다. 셋째를 임신한 엄마의 간곡한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1년 중 대부분의 시간을 바다 위에서 보내고 짧은 기간 육지에 들어올 때만 아이들과 만나는 남편의 모습을 더는 지켜볼 수 없었다는 게 엄마의 설명이었다. 잠시 고민에 빠진 길남 씨는 주변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10년 이상 동고동락했던 바다를 떠나 육지에 발을 디뎠다. 2001년에는 길남 씨의 셋째 딸이 세상 밖으로 나왔고 그의 육지 생활도 그즈음부터 시작됐다.
'육지행'을 택한 길남 씨의 도전은 쉽지 않았다. 평생 바닷일만 생각했던 그에게는 육지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바다 한가운데서 겨우 땅을 찾아낸 조난자처럼 일자리를 찾아 이곳저곳을 헤매 다녔다. 성실함이 가장 큰 무기였던 길남 씨는 가구 공장부터 건설업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세상과 마주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다. 가족들도 이곳저곳으로 이사를 하며 길남 씨의 새출발을 함께했다.
하지만 정착지를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급여, 근무 조건, 거주환경 등 고려해야 할 것들은 계속 생겨났고 그럴 때마다 다섯 식구가 모두 이동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길남 씨는 마음에 드는 일자리를 찾을 때까지 타지에서 원룸 생활을 하기로 했다. 그가 좋은 직장을 찾을 때까지 아이들을 돌보는 건 엄마와 외할머니의 몫이었다.
몇 년의 시행착오를 거쳐 길남 씨는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을 만한 직장을 찾았고 우리 가족은 부산을 떠나 울산으로 향하게 됐다. 길남 씨가 전전긍긍하던 좁은 원룸에는 다 식어버린 밥과 몇 권의 만화책만 놓여있을 뿐 이렇다 할 식재료와 가전제품도 없었다. 그는 친구도, 가족도 없는 곳에서 회사와 집을 오가며 하릴없이 삶을 견뎌온 듯했다.
길남 씨는 그 후로 20년 가까이 한 곳에서 직장생활을 했다. 성실함이 무기인 그답게 그곳에서도 열정과 실력을 인정받았다. 매일 새벽, 졸음과 피곤함을 이겨내고 출근길에 나서야 했지만 한 번도 볼멘소리를 하지 않았다. 마치 가족을 먹여 살리는 게 숨 쉬는 일인 듯. 더운 여름에는 쿨링 팔토시를, 추운 겨울에는 핫팩을 손에 쥔 채 집을 나서는 그의 뒷모습이 여전히 생생하다.
선장으로 일하며 많은 것을 누리던 그가, '육지행'을 결정하기까지의 고민 과정은 절대 쉽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누군가를 이끄는 자리에서 물러나 백의종군하는 마음은 쉬이 짐작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가족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세계를 버려야 했던 그의 고뇌는 얼마나 치열했을까. 또 낯선 육지에서 '소금기'를 빼는 과정은 얼마나 고됐을까.
"홍콩에서 금괴 실은 우리 배만 오면 너거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살 수 있다. 조금만 기다려봐라"
육지 생활을 시작한 지 20여 년이 흘렀건만 여전히 길남 씨는 가족들에게 똑같은 농을 건넨다. 금괴와 보석을 가득 실은 배가 홍콩 어딘가에 있고 곧 입항해서 한몫 두둑이 챙길 수 있다는 것. 그의 말에 속았던 어린 시절이 기억나는 걸 보니 30년째 똑같은 레퍼토리다. 그의 농담이 이제는 지겨운 듯 엄마는 "배가 벌써 썩어 문드러졌겠다"며 핀잔을 준다.
나는 내 가족을 위해 내가 만든 세계를 내려놓을 수 있을까. 어느덧 아빠가 처음 아빠가 됐던 나이가 됐지만 여전히 확신이 없다. 아니, 앞으로도 그런 마음이 생길지조차 의문이다. 그래서인지 나의 삶보다 가족의 행복을 선택한 엄마와 아빠의 선택이 더 대단해 보인다.
길남 씨는 이제는 완전한 육지사람이 되어 주말마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 낚시부터 등산, 캠핑에 이르기까지 안 해본 취미가 없을 정도다. 몸을 쓰는 육지생활로 직업병이 생긴 탓에 손목과 다리가 조금 불편하지만 틈틈이 하모니카도 배우고, 탁구도 치는 취미 부자다. 자식들한테는 지금부터 운동을 하나 배워야 평생 써먹을 수 있다며 '운동 홍보대사'도 자처한다. 그의 항해는 육지에서도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