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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미스 Feb 03. 2024

마마보이 탈출기

부모님은 어떻게 부모가 됐을까


나도 '마마보이'일까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다. 주로 TV 드라마 같은 미디어에서 노출되는 마마보이의 모습을 볼 때 그랬다. TV 속 '마마'들은 주로 억척스러웠고 자식들의 모든 일을 도맡아 처리했다. 그에 반해 '보이'들은 그녀의 생각에 반기를 들지 못하고 순종하는 이미지로 그려졌다. 스스로 결정해야 할 어떠한 중요한 문제라도, 마마가 정하면 보이는 군말 없이 그에 따랐다.


억척스러운 미자 씨를 엄마로 둔 나는 마마보이 유망주였다. 아는 사람이 많고 매사에 씩씩한 그녀의 자식으로 산다는 건 딱히 내가 무엇인가를 스스로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학교에서 쓸 준비물이 필요하면 미자 씨는 문구점에 전화를 걸었고, 용돈을 다 써버렸지만, 떡볶이를 먹고 싶을 땐 엄마는 나 대신 분식집에 연락했다. 문구점과 분식집 아주머니는 둘 다 엄마의 아는 '언니'였으므로 내가 그들을 찾았을 때 그들은 반가운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자세한 내막을 알지 못하는 친구들은 이런 나의 권력(?)을 마냥 부러워했다.


친구와 놀고 싶어 교회를 가기 싫은 날에도 나는 엄마를 먼저 찾았다. 어린 시절의 나는 매주 토요일에 교회로 가 찬양팀 연습을 해야 했다. 학교에서 오전 수업을 마치고 집에서 점심을 먹고 있으면 곧 교회 봉고차가 우리집 앞으로 도착했다. 봉고차에서 내린 전도사님은 항상 사람 좋은 얼굴을 한 채 나를 데리러 왔고 오후 2시쯤 시작된 찬양팀 연습은 주로 저녁 6시가 다 되어서야 끝이 나곤 했다. 짙은 초록색을 띤 교회 봉고차는 내게 '어린이 잡아먹는 괴물' 같았다.


어느 날은 정말 교회에 가기 싫어 엄마에게 가기 싫다고 말했다. 사람 좋은 얼굴을 한 전도사님은 가끔 불같이 화를 낼 때가 있어서 난 그를 꽤 무서워하고 있었다. 엄마에게 도움을 요청한 나는 단순히 싫다는 말로는 안 될 것 같았는지 몸이 아프다는 핑계도 곁들였다. 몸이 아프다고 거짓말했더니 신기하게도 몸이 정말 아픈 것도 같았다. 교회에 가는 일을 두고 엄마와 나 사이의 몇 번의 줄다리기가 오고 갔지만, 끝끝내 내가 말을 들을 생각을 하지 않자 그녀는 결국 전도사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 예 전도사님 혹시 출발하셨나요? 경륜이가 오늘 몸이 좀 안 좋나 보네요. 이번 주는 연습 못 갈 것 같은데 번거롭게 해 죄송해요"

거실에서 들리는 통화 소리에 나도 몰래 웃음이 났다. 아프다는 핑계를 대 나가 놀진 못하겠지만 '괴물 봉고'의 무서운 질주를 잠시 막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마음이었다.


통화를 마치고 안방으로 들어온 엄마는 나를 불러 세웠다. 엄마는 나에게 정말 몸이 아픈 게 맞냐고 물은 뒤 오늘 하루는 마음대로 놀라고 했다. 아들이 아프지 않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대답은 굳이 듣지 않았다. 하늘을 날 듯 기뻤지만 예의상 잠시 이불을 덮고 누워있었다. 머릿속으로는 모처럼 얻은 자유시간을 어떻게 사용할지 고민이 한창이었다. 그러면서도 전화 한 통으로 달리는 봉고차를 멈추게 한 엄마의 능력을 신기해했다. 무서운 전도사님에게 곤란한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비법이 궁금했다.


그 후로도 어려운 이야기를 하는 일은 주로 미자 씨의 몫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다닌 태권도 학원에서 같은 흰 띠의 1학년 아이한테 반말을 듣고 기분 나빴을 때도, 나 대신 미자 씨가 태권도 학원을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친구를 따라 간 학원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때도 며칠을 제외한 학원비 환불을 요구한 건 엄마였다.

몇 달 안다닌 피아노 학원을 정리하는 날에도, 귀찮음 때문에 교회에 가지 않은 몇몇 날에도, 늘어지게 잠을 자느라 학교에 늦은 몇몇 날에도 미자 씨는 언제나 어려운 소리를 도맡아 했다. 자식은 항상 보호받는 존재니까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다.


하루는 시끄러운 소리에 잠이 깼다. 엄마 아빠가 말다툼을 하던 소리였다. 얼핏 들어봐도 갈등의 원인은 역시 '돈'이었다. 길을 걷다 돌부리에 걸린 것처럼 설움이 극에 달한 엄마는 아빠에게 꽤 큰 소리를 냈다.

"싫은 소리하는 건 왜 내 항상 내 몫인 건데. 당신은 왜 나한테 시키기만 하고 직접 하지는 않는 건데, 나도 어디 가서 좋은 소리만 하고 다니고 싶다. 나도 싫은 소리 하기 싫다고"

아무래도 생활비 문제였던 것 같다. 생활비가 부족해 다른 사람에게 잠시 돈을 빌려야 하는 상황이 됐는데 아빠는 엄마에게 돈을 빌릴 것을 요구했던 것으로 추측한다. 날이 예리하게 선 칼같은 엄마의 반응에 놀란 아빠는 즉시 지인에게 연락해 돈을 빌렸다. 상황이 끝났음에도 엄마는 한동안 그 자리에서 설움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아빠 못지않게 놀란 건 나였다. 내가 두려워하는 싫은 소리를 거리낌 없이 하던 엄마의 속마음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강인하게만 보였던 그녀에게서 연약한 소녀의 모습이 겹쳤다. 남들이 고무신 신을 때 자기만 운동화를 신고 다녔다던 새침데기 미자 씨는 자식들을 키우며 세월을 정면으로 받아들였다. 녀는 뱃사람인 남편을 바다로 떠나보내고 홀로 아이를 키우며 '어쩌다 어른'이 되어버렸다.


엄마의 슬픔을 두 눈으로 목격하고 난 후부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하기로 다짐했다. 마마보이 유망주가 일찍이 선수 생활을 은퇴하기로 한 배경이다. 점차 나이를 먹어서인지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용기도 생겼다. 실제로 부딪혀보니 못 할 일은 없었다.

나는 '여자는 약하나 엄마는 강하다'라는 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강약의 기준이 모호할 뿐만 아니라 여자가 약하다는 근거도, 엄마가 굳이 강해야 할 필요도 없다. 엄마가 강해지지 않아도 되는 사회가 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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