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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미스 Feb 10. 2024

공포의 칵테일

부모님은 어떻게 부모가 됐을까

'명절' 하면 생각나는 기억이 있다. 모처럼 함께 모인 가족이 횟집에서 저녁을 먹는 장면이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면 나무로 된 직사각형 테이블이 가장 먼저 우릴 반긴다. 그다음은 테이블 위에 깔린 하얀 비닐이 부스럭대는 소리다. 실내를 가득 메우던 웅성거리는 소리도 귓속을 파고든다. 테이블 위에 비닐이 제 할 일을 마치고 한겹 한겹 벗겨질수록 밤은 무르익어간다.


인생의 대부분을 부산에서 살아온 가족들은 질리지도 않는지 회를 유독 좋아했다. 우리 가족은 물론이고 큰이모네 부부, 작은이모네 부부 등 할머니 집에 모인 친척들은 외식 메뉴로 회를 언급하곤 했다. 회가 지겹다며 다른 것 좀 먹자는 볼멘소리가 가끔 어디선가 튀어나왔지만 대세가 기울진 않았다. 인원이 많아 회 아니면 고기를 선택하는 게 보통이었고, 할머니 집이 바다와 멀지 않은 영도에 있었던 게 그 이유였다.


복작이는 횟집에 우리 가족이 들어서면 웅성거림은 커진다. 회가 보기 좋게 썰려 나오고 술잔까지 더해지면 목소리 톤도 한층 높아진다. 다닥다닥 붙은 테이블에서 이구동성으로 목소리를 높이기 때문에 지금부터는 주의 깊게 듣지 않으면 누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차릴 수 없다. 테이블에서는 어른의 말과 아이의 말이 교차한다. 어른은 어른들끼리만 알아듣는 이야기를 무어라 내뱉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만 통하는 말을 주고받는다. 흔한 명절 풍경이다.


회로 배 안이 가득 차고 저녁 자리가 지루해질 때쯤 초등학생 꼬마는 흥밋거리를 찾기 시작한다. 그때, 마시던 음료수 잔이 꼬마의 눈에 들어온다. 꼬마는 음료수 잔을 손에 들고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이내 숟가락을 꺼내 음료수 잔에 이것저것을 넣기 시작한다. 당근을 찍어 먹던 쌈장, 회를 찍어 먹던 초장과 간장, 밑반찬으로 나온 어묵조림 국물 따위가 음료수 잔에 담긴다. 한껏 진지한 표정의 꼬마는 음료수 잔에 담긴 정체불명의 액체를 젓가락으로 휘휘 젓는다. 젓가락 끝에 묻은 액체를 혀끝으로 살짝 맛본다. 자기가 만들고도 표정이 썩 좋지 않다. 꼬마는 정체불명의 액체를 '새로 개발한 음료수'라고 소개하며 옆에 앉아있던 아빠에게 건넨다.


길남 씨는 게임 벌칙으로도 먹지 않을 것 같은 음료수 잔을 받아 들고는 싫은 내색도 없이 유리잔에 담긴 혼합물을 마신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꼬마는 자신이 유리잔을 건네고도 행여 혼날까 안절부절하고 있다. 잔을 내려놓은 길남 씨는 꼬마의 얼굴을 응시하고는 말을 건넨다.


"이 안에 뭐 들어갔는지 기억하고 있나"

예상치 못한 질문에 당황한 꼬마는 다급히 기억을 더듬어보지만 질문에 답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눈에 보이는 것을 아무렇게나 집어넣었기 때문. 콜라에 쌈장, 간장, 초고추장까지…. 함께 있으면 안 될 것들이 모여 있는 잔을 다시 살펴본다.


"음료수를 만들어서 팔려면 제조법을 기억하고 있어야지"

 이런 걸 왜 만들었냐가 아니라 어떻게 만들었냐는 게 길남 씨가 꼬마에게 던진 질문이다. 말을 마치고는 옆에 있던 빈 유리잔 하나를 집어 꼬마에게 건넨다. 이번에는 레시피를 기억해서 다시 만들어보란다.


뜻밖의 미션을 받은 꼬마는 심혈을 기울여 음료수를 제조한다. 길남 씨의 피드백을 반영해 숟가락으로 정성스레 계량하는 것은 물론, 맛있어 보이는 것들도 잔뜩 넣는다. 무늬만 음료수인 폭탄 음료 두 잔이 금방 만들어졌다. 그러고는 어른들의 대화를 나누는 길남 씨에게 잔 두 개를 슬쩍 내민다. 괴상망측한 색깔을 지닌 음료수를 본 가족들에게서 '윽' 소리가 절로 나온다. 음료잔 두 개를 번갈아 비운 길남 씨는 제조법을 물은 뒤 진지한 표정으로 품평을 시작한다.


"첫 번째건 처음 먹을 때는 달달한데 간장이 많이 들어가서 좀 짜네. 콜라 양을 좀 늘리고 간장을 조금만 넣어 봐"

"두 번째건 사이다 맛이 많이 나서 뭐가 들어갔는지 잘 모르겠다. 사이다랑 초장 맛 말고는 특색이 없는 것 같은데 이래서는 장사 몬 한다"

요리연구가가 된 듯 수상한 액체를 만들고 있는 철부지에게도 길남 씨의 피드백은 한없이 진지하다. 그 덕에 꼬마는 기죽지 않고 저녁 자리가 끝날 때까지 무수한 도전을 이어간다.


지금도 시끌벅적한 횟집에서 빈 유리잔을 볼 때면 가끔 이 기억이 떠오른다. 무엇인가를 열심히 만드는 꼬마, 꼬마의 진정성을 믿고 티 안 나게 도움을 주는 아빠의 모습.

추억 속의 꼬마는 지금도 무엇인가를 열심히 만들고 있다. 철이 들어서인지 콜라와 간장을 함께 섞는 몹쓸 장난을 치진 않는다. 이제는 음료수잔 대신 아버지에게 술잔을 건넬 만큼 나이를 먹었다. 꼬마는 자라서 어른이 됐다. 도전의 형태는 조금 더 성숙해졌고 어른들의 대화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꼬마는 지금도 그의 아버지가 폭탄 음료수를 기꺼이 마셔줄 사람이라는 것을 믿는다. 당신의 말처럼 '대단한 지원'을 해주진 못하지만, 당신이 절대 아들을 외면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자녀가 무엇을 하든 그는 자녀 곁에서 묵묵히 응원해 줄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


명절을 맞아 찾은 고향은 과거만큼 소란스럽지 않다. 지역 경기가 어려워지면서 청년층이 많이 빠져나갔고 그 여파로 도시 분위기는 확 가라앉았다. 도시도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듯했다.


가족과 함께 종종 찾는 횟집도 예전만 못하다. 휙휙 날아가던 테이블 위 비닐은 두껍게 쌓여 더워 보일 정도다. 명절이면 항상 모였던 대가족도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이후로는 모이는 빈도가 눈에 띄게 줄었다. 그렇게 어느 순간 영영 없어져 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서둘러 자취방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잠시 접어두고 가족에게 함께 저녁을 먹자고 제안했다.


예전만큼 정정하지 못한 부모님을 보자 장이지 시인의 '러시아 인형'이라는 시가 생각났다. 도시도, 부모님도 세월을 조금만 천천히 맞길 염원했다.


러시아 인형처럼 어머니를 열어보면 내가 있다 아버지를 열어보면 내가 있다 그분들은 거인이다 나는 아주 작다 나는 열어볼 수 없는 맨 마지막 인형이다 아주 작은 인형이다

지방의 한 화학 공장, 유해 물질을 노로 젓는 거인이 있다 나는 대학으로 멀리, 멀리 도망친다 아직이다 우리 사이 시베리아가 있어도 아직 보인다 죽음의 수프를 젓는 거인이 보인다 나는 우아하게 시를 짓고 서울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투명한 계단을 오른다
아버지는 내 시를 궁금해하신다 어머니는 내 시를 궁금해하신다 그러나 너무 잘 보여서-그분들은 거인이다- 나는 그분들에게 편지를 쓰지 못한다 우리 사이에 편지는 없다 아버지는 텔레파시를 믿고 어머니는 자주 꽃 사진을 내게 보낸다 나는 모국어를 잊어가는 작은 인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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