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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미스 Feb 17. 2024

아버지는 만들어지는 것

부모님은 어떻게 부모가 됐을까

아버지가 '아버지 학교'에 들어가기로 한 건 내가 고등학생이었던 때로 기억한다. 그전부터 아버지 학교에 대한 이야기가 종종 나왔지만 그때마다 아버지는 '시간이 없고 남사스럽다'는 이유로 한사코 거부하셨다. 귀한 주말에 시간을 내 무언가를 배운다는 건 큰 결심이 필요한 일이었는데, 배우는 주제가 '좋은 아버지 되는 법'이니 아버지 학교가 그의 흥미를 잡아끌지 못한 것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었다.


아버지 학교라는 이름도 그의 발길을 더디게 하는 데 한몫했을 것 같다. 아버지 학교에 가서 좋은 아버지가 되는 법을 배운다는 건, 지금의 자신이 좋은 아버지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보다 가부장적이었던 10여 년 전의 사회 분위기를 감안하면 아버지 학교에 다니는 것을 주위에 적극적으로 알리기도 쉽지않았다. 주말에 뭐 하냐는 직장동료의 질문에 아버지 되는 법을 배우러 간다고 말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자. 테니스, 낚시, 등산 약속에 익숙한 그의 직장동료들은 겉으로는 '멋있다' 따위의 반응을 보일 테지만, 속으로는 길남 씨를 '부족한 아버지'로 평가절하할지도 모를 일이다. 반평생을 거친 뱃사람으로 살아온 길남 씨에게는 그러한 걱정이 결코 기우가 아니었을 것이다.


아버지 학교는 기독교 교리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커리큘럼을 운영한다. 아버지가 가정에서 어떤 존재인지 인식하고 어떤 모습으로 가족을 대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는데 그 생각의 토대는 성경에 있다. 커리큘럼에서 영성, 신앙 등을 적극적으로 내세우는 것을 보면 기독교에서의 '사랑'을 좋은 아버지의 중요한 요소로 보는 것이 틀림없다.


지만 당시 길남 씨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아니었다. 그에게 교회는 어릴 적 누군가를 따라 잠깐 다닌 곳이었고, 결혼 이후 그의 아내가 함께 가기를 원해 종종 방문한 곳이었다.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오전 예배에 잠시 참석하고는 곧장 집으로 돌아가 소파에 눕기에 바쁜 그였다. 기독교 교리로 점철된 아버지 학교가 그의 관심을 받지 못한 이유다.


그런 그는 어느날부터 아버지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초등학생인 여동생이 어머니 미자 씨와 자주 말다툼을 벌이던 무렵의 일이다. 회초리로 다스릴 수 있었던 아들들은 어느새 벌써 고등학생이 돼 말썽을 부리는 일이 크게 줄었지만 여동생은 아니었다.


친구와 노느라 늦게 들어오거나 틱틱대는 말버릇으로 미자 씨의 화를 돋우던 여동생은 더러운 것을 못 보는 성격의 미자 씨와 자주 갈등을 빚었다. 아무렇게나 내팽개친 물건들을 제때 치울 것을 요구하는 미자 씨와 알아서 치울 거라며 가만히 내버려두라고 맞받아치는 여동생의 싸움이었다. 보통은 조용히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길남 씨가 동생을 꾸짖는 일로 마무리됐지만 언제까지 이런 다툼을 두고 볼 수 없는 듯한 길남 씨의 마음이 그를 아버지 학교로 이끌었다.


주말마다 이어지는 수업에서 어떤 강의가 이뤄졌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가 아버지 학교에 다닌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몇 번의 수업이 지난 후였다. 어느날 저녁, 길남 씨는 자신의 자녀를 한 곳에 불러 모았다. 나를 포함한 우리 남매가 뜻밖의 호출에 긴장하고 있을 무렵, 아버지는 쭈뼛쭈뼛 자식들에게 칭찬의 말을 건넸다. 무슨 내용이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당시 그가 아주 어렵게 말을 꺼냈다는 점과 그가 꺼내 놓은 말이 꽤 오래 준비한 말인 것 같다는 생각이 지금도 머릿속을 맴돈다.


어렵게 한 마디 한 마디를 이어 간 뒤 겨우 말을 마친 그는, 우리 세 남매를 한 명씩 차례로 껴안아 줬다. 아버지의 포옹이 무척이나 낯설었던 나는 그 자리를 당장 박차고 일어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의 어색한 변화는 조금씩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어느날 그는 우리 세 남매를 불러 사랑한다고 말했다.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고백공격'에 소름이 돋은 나는 그가 학교 다니기를 그만두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옆에 있던 형과 여동생의 표정을 보니 그들도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투박하고 어설펐던 그의 애정 표현이 아버지 학교의 '숙제'였다는것을 알게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서먹한 시간이 어느덧 지나가고 그는 아버지 학교를 졸업했다. 지금은 어디 갔는지 알 수 없지만 그가 졸업식에 참석해 찍은 사진을 담은 작은 액자도 한동안 집에 놓여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버지 학교를 졸업할 무렵 그는 우리 남매를 찾아와 자신의 소회를 짧게 밝혔다. 그동안 당신이 자녀들을 투박하게 대했다는 사실을 이번 계기를 통해 조금이나마 배웠다는 게 그의 변이었다. 그러면서 앞으로 가족에게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자신이 안수기도(사람의 머리에 손을 얹어 기도하는 일)를 해 응원하겠다고 덧붙였다. 그 무렵 우리 가족에게 가장 먼저 다가올 중요한 일은 나의 수능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수능 날이 되어서도 아버지의 안수기도는 없었다. 그가 까먹었을 수도 있고 안수기도까지 필요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는 내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를 하는 대신 내게 다가와 부담 갖지 말고 수능을 치고 오라고 말했다.


아버지 학교는 길남 씨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미자 씨는 길남 씨가 "아버지 학교 덕에 그나마 사람이 됐다"고 회상한다. "자녀들에게도 이놈, 저놈, 임마, 점마하던 사람이 아버지 학교에 다니고 난 이후부터 이름을 부르게 됐다"는 게 그녀가 꼽은 가장 큰 성과다.


아버지 학교를 졸업한 지 10여 년이 지난 지금, 길남 씨는 자녀에게 낯 뜨거운 사랑 고백을 하지 않는다. 그의 자녀들도 갑작스런 그의 사랑 고백을 반기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그의 자녀들은 어색함을 무릅쓰고 표현하려는 용기가 얼마나 값진 것인지 잘 알고 있다. '오늘도 화이팅'하라며 종종 전달되는 카카오톡 메시지, 백화점에 들렀다 아들 생각이 나 샀다는 신발 따위에 그의 마음이 촉촉하게 배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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