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에 대한 단상
나-글쓰기-타인
'글쓰기'는 '나'와 '타인을 연결해준다.
1.
수십 개의 글을 썼지만, 덧글 하나 달리지 않았었다. 누군가에게 내 글을 보여주면, 어렵다는 반응이 부지기수였다. 글과 말은 그 사람의 생각을 보여주는 창이라고 한다. 사람들이 내 글에 어렵다고 느낀다면, 그만큼 내 생각과 말도 이해받기 어려울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로 글 잘 쓰는 사람이 말도 잘하고, 생각도 괜찮은 경우를 종종 보지 않는가. 그래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글을 쓸 때는 좀 더 쉽게 쓰려고 노력했고, 말을 할 때는 맥커터가 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글을 쓰지만 돌아오는 것은 무관심이라는 것을 깨닫자, ‘내가 남들과 다른 것이 아닐까’ 하는 고민이 들었다. 차라리 악플이 무플보다 낫다는 말이 있다. 일단 악평이든 호평이든 평가를 해준다는 것은 나라는 사람에 대해 이해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니까. 뭐라도 평가를 받으면 어떻게든 고쳐보려 할 텐데. 좀 더 나아질 수 있을 텐데. 사실 정말 무서운 것은 만났을 때 아무 말 없이 웃고만 있다가, 헤어지고 나서 나쁜 말을 하는 사람들이다. 글에 대해서도 아무 말 하지 않는 사람들이 속으로는 욕을 퍼붓고 있을 수도 있다.
너의 글은 많은 지식을 뽐내려고 하고, 과시하려고 하고 있어.
글을 보여준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무시하려고 했지만, 다른 누군가도 나에 대해 “너는 후까시가 있어.”라고 평했던 것이 떠올랐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그 사람은 내가 침묵을 지키는 것을 보고, 그 행동에 가오 잡으려는 의도가 있다고 보았다. 이 말을 듣고 난 뒤로 타인과 나 사이의 괴리감이 더 커졌다. 나는 남들에게 보탬이 됬으면 하는 마음에서, 아는 것을 말한 것뿐인데. 나는 그저 남들의 이야기를 더 많이 듣고 내 생각을 가다듬기 위해서 침묵한 것일 뿐인데.
글에 국한해서 생각해도 할 이야기는 많다. 내가 많은 사례를 가져다 쓰는 것은 좀 더 넓게 보고 싶은 마음이 담긴 건데. 내가 일일이 인용하는 것은 내 주장을 더 설득력 있게 보이기 위함이었는데. 나는 내 생각을 좀 더 적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 개념을 가져다 쓴 건데.
그러나 사람들은 타인의 행동을 그 사람의 의도와는 다르게 해석할 때가 많다. 그 간격을 최소화시키는 것도 하나의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이건 사회에서도 적용되는 것이고, 글에도 적용되는 것이다. 글도 내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가 독자의 눈에 어떻게 비칠까를 최대한 고려해야 한다.
글에 한해서는, 넓게 보는 것보다 깊게 보는 것이 나을 수도 있었다. 인용보다는 말로 쉽게 풀어쓰는게 나을 수 있었다. 주장을 관철하는 것보다는 감정 전달을 중시하는 게 나을 수도 있었다. 내 논리를 먼저 상정해놓고 거기에 사례들을 끼워 맞추기보다는 자연스러운 흐름 속에 논리가 묻어나올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쩌면 나는 나만의 관념 속에서, 나 혼자만 사는 성을 쌓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논리라고 하지만, 상대에게 잘 전달되지 않는 논리는 거추장스러운 가상인공물에 그치고마는 것이 아닐까.
문득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인간실격>이 떠올랐다. <인간실격>은 주인공 요조의 비참한 생애를 다루고 있다. 그는 상대방의 감정을 잘 이해하지 못했고, 사랑에 대해 느끼지 못했다. 그러한 그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느끼고 사람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두려워하면서도 동경해서 사람들 틈에 섞이기 위해 익살스러움과 웃음을 연구했다. 요조가 같은 반 친구인 타케이치에게 본성을 간파당해 “일부러....그랬지?”라고 지적당하는 장면에서는 사람들과 잘 섞어보려고 물 밑에서 열심히 발장구를 치는 내 얘기를 하는 것 같아 나도 마음이 불편했다.
사람들이 사람들 속에 얼마나 섞이고 싶어 하는지, 그러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는지를 전부 알고 있는 신이 있다면 그 모습을 보며 얼마나 우스워할까. 물론 나를 요조에 빗대는 건 좀 비약이 심하다. 요조는 좀 극단적인 경우였다. 그는 무조건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기준에 자신을 맞추기 위해 노력했다. 거의 만인의 사랑을 받으려고 노력한 것이다. 물론, 그는 실패했다. 그 결과 비참하게 살았고, 비루하게 죽어간다. 술과 약에 찌들어버린 그는 빛나던 청춘과 외모를 퇴색시켰고, 어둠 속으로 추락했다.
나는 요조처럼 심하게 사회와 갈등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모든 사람들은 타인에게 이질감을 느끼고, 그로 인해 외로움을 느낀다. 누군가와 함께이든 혼자이든, 때로는 담담하게 혹은 처절하게 혼자임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순간이 온다. 레이디버드는 ‘사람들은 모두 외롭다’라는 노래에서 우리를 ‘갇혀버린 별들’에 비유한다. 이 노래를 들으면 나만 외로운 것은 아니라는 느낌이 든다. 이 느낌이 나를 위로해준다. 내가 혼자 남겨진 시간이 나의 우주 속에서는 끝나지 않을 것 같아도 이 음악이 공존할 때만큼은 혼자임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2.
타인과 자신이 다르다면, 보통 두 가지 생각으로 나눠지기 마련이다. 내가 남들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던지, 아니면 남들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던지. <인간실격>의 주인공 요조는 후자에 가까웠고, 다른 사람의 기준에 맞추기 위해 노력했다. 전자의 경우는 보통 고독을 택한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들은 주어진 천재성을 실현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란다. 사회와 타인은 이들을 산으로 보내고, 이들의 재능을 실현하는 것을, 이들의 운명을 완성하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기 속으로 침잠해 들어가도, 무언가를 생산해낼 수 있는 내용물-재능-을 자기 안에 갖고 있다. 오히려 이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갇혀 있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니체가 이런 사람들의 대표적인 경우이다. 알프스 산의 차가운 공기를 고독하게 들이마시며, 그는 이렇게 말했다.
"고독은 생산적 삶과 자기투쟁을 위한 실존의 모태이자 발판이다."
우리와 같은 범인은 요조와 니체라는 양 극단 사이의 중간쯤에 위치할 것이다. 내가 이러한 범인이라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나는 나에 대한 기준이 지나치게 엄격한 것 같기도 하다. 사실 글을 통해 호응을 이끌어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고, 그렇게 되는 것은 어느 정도 전문적인 능력을 요한다. 말과 글은 다르고, 글은 말보다 더 정교한 생각과 사유를 요한다. 그래서 글이 어렵게 읽힌다고 해서 내가 남들과 다르다고 결론짓는 것은 비약이고, 과장이 될 수도 있다. 글을 잘 못써도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사람이 있고, 글을 잘 못 써도 말을 잘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내가 너무 많은 것을 바라고, 더 나아지려고 지나치게 애쓰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더 나아지려고 노력하지 않는가. 우리는 항상 최선을 추구하고, 최선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그 노력의 결과가 인정받을 때 진심으로 기뻐하며, 보람을 느낀다. 이번에는 나도 그렇게 기뻐할만한 일이 생겼다. 내 글이 잘 읽히지 않는다고 해서 글쓰기 방식을 전면적으로 바꿨더니 호평을 받은 것이다. 글이 어렵다고 해서 쉬운 말만 골라쓰려고 노력했다. 생소한 개념을 끌어다 쓰는 일은 하지 않았다. 불필요한 사례들을 뺐다. 예전의 글에서는 논리만을 중시했지만, 이번에는 감정에 호소하는 글을 썼다. 내 사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을 싫어해서 나와 관련된 이야기는 최소화시켰지만, 이번에는 내 경험을 극대화시켰다. 좀 더 타인을 생각하고, 독자의 눈높이에 맞춰보려고 노력한 것이다. 그랬더니 글이 술술 재밌게 읽힌다고 했다. 어떤 사람은 다른 글도 이렇게 쉽게 써보지 그랬냐고 말했고, 다른 사람은 내가 있어 보이려고 하는 글만 쓰는 줄 알았는데 그게 오해였음을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런 호응에 너무 기분이 좋아져 이 이야기를 친한 지인에게 했더니, 그가 이렇게 말했다.
“드디어 너가 알을 깨고 나오나보다.”
알을 깨다. 이 말을 한 지인은 분명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이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한다.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은 아프락사스다.
<데미안>은 주인공 싱클레어가 여러 사건들을 겪으며, 다른 등장인물들에게 삶을 배우며 성장해나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는 단순히 나이만 먹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성숙해진다. 어릴 적, 싱클레어는 친구 데미안이 자신보다 정신적으로 우위에 있다는 것을 직감한다. 그 이후로 그는 항상 데미안을 닮기 위해 노력한다. 결국 소설의 말미에서 싱클레어는 자신의 모습이 데미안과 흡사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책은 신과 정신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신과 정신은 보편적인 주제이다. 보편적이기에 특수한 맥락에 다 적용될 수 있다. (아프락사스는 모든 정령을 관할하는 신이다. 모든 양극을 아우른다.) 그렇기에 새가 갇혀있던 세계는 고루한 관념, 전통, 자신을 옥죄는 생각의 틀 등을 의미한다. 새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에 있는 신은 한 개인이 지향하고자 하는 가치, 이상, 신념 등을 의미한다.
나는 드디어 알을 깨고 나오는 것일까? 나만의 관념에서 벗어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일까? 발전하고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