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개츠비를 읽는 묘미 중 하나는 소설에 묘사된 여러 상징적 장치를 통해 당시 미국사회의 단면들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재의 계곡에 위치한 에클버그 의사의 눈과 개츠비가 여는 파티, 이스트웨그와 웨스트에그의 대조를 통해 작가가 보여주고 싶었던 미국사회의 모습이 잘 드러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위대한 개츠비의 시대적 배경은 1차 대전이 막 끝난 1920년대의 미국이다. 사람들은 이전에는 없던 거대한 전쟁을 겪고 나서 정신적 공허감에 빠지게 된다. 전쟁에서 이기기는 했지만, 이 승리의 의미가 대체 무엇인지 사람들은 확신할 수 없었다. 유례없었던 학살과 파괴는 사람들이 민주주의와 평화와 번영에 대해 갖고 있었던 환상을 무자비하게 깨뜨려 버렸다. 그로 인해, 이전에 서구 문명의 뿌리를 이루었던 정신적 가치, 도덕들에 대해 사람들은 환멸을 느끼고 의문을 품기 시작하였다.
전쟁의 실질적인 피해를 입지 않은 미국은 전례 없는 경제적 호황을 누리게 된다. 산업시설의 피해를 거의 입지 않은 미국과는 대조적으로 유럽은 산업시설이 거의 파괴되어 복구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그로 인해 많은 물자를 필요로 했다. 이러한 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새로운 산업시설들이 생겨났는데 투자를 하면 반드시 커다란 이익이 따랐다. 따라서 너도나도 주식시장에 뛰어들어 투자를 했고 투자를 통해 쉽게 떼돈을 번 졸부들은 거대하고 화려한 주택을 짓고, 방탕한 파티를 즐기며 최신식 자동차를 사고 사치를 즐겼다.
이렇다 할 정신적인 가치관이 부재한 상태에서 얻게 된 물질적인 번영은 미국을 극한의 황금만능주의로 이끌었다. 돈을 얻은 대신 사랑과 진리, 열정과 꿈을 잃어버린 Lost generation(잃어버린 세대)가 탄생한 것이다. 텅 비고 가난한 영혼을 달랠 방법으로 사람들은 술과 환락을 찾았다. 그 방탕함이 얼마나 끝에 달했으면, 자유의 나라라고 불리는 미국에서 금주법을 시행했을 정도였을까. 텅 비고 가난한 영혼, 그 영혼을 달래기 위해서 빛을 발하는 황금과 사치스러운 환락에 달려드는 부나비 떼들. <위대한 개츠비>는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를 잘 담아내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개츠비가 여는 파티에서 이러한 군상의 모습이 잘 드러난다.
파티는 오케스트라가 연주되는 가운데 술을 마신 사람들이 잡담을 주고받으며 모였다가 흩어지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사람들은 서로를 소개받고도 그 자리에서 금방 잊어버리는가 하면 서로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끼리 열띤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이러한 파티는 어떤 뚜렷한 목적이 있기 보다는 단지 고독과 허무를 달래기 위해 하룻밤을 즐기는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도 진지한 교류와 소통을 한다기 보다는 ‘별빛 아래의 부나비’처럼 무의미한 즉흥적인 향락에 취한다. 돈을 쫓아서 파티에 온 사람들도 있다. 파티에는 젊은 영국인들도 꽤 많이 눈에 띄었는데 낮고 진지한 목소리로 부유해 보이는 미국인들과 대화하는 것을 보아 이들은 증권이든 보험이든 자동차든 뭔가를 팔기 위해 파티에 참석한 것이다. "Owl eyes"는 서가에 꽂힌 책들을 보며 놀라운 리얼리즘이라고 감탄한다. 서가에 무수히 많은 책들을 꽂아 놓은 것을 파티의 흥을 돋우기 위한 일종의 무대장치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는 돈이 있으면 현실 또한 완벽하게 구현해낼 수 있다는 물질만능주의에 대한 예찬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파티는 당시 사람들의 물질만능주의를 보여주고 있으며 이러한 물질만능주의는 삶에 대한 무의미와 무목적성을 채우기 위한 것으로 보여진다.
에클버그라는 안과 의사가 재의 계곡에 세워놓은 광고탑은 어떤가. 재의 계곡은 뽀얀 먼지가 그 근처를 뒤덮고 있고 온갖 악취가 코를 찌르는 곳이다. 에클버그 의사의 두 눈은 재의 골짜기를 굽어보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각성시키거나 교훈을 주는 존재는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에클버그 의사의 두 눈은 신은 신이되 더 이상 신으로서 기능하지 못하는 신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1차 대전 이후 사람들은 신의 존재에 대해 회의감을 느끼게 되었다. 신이 있다면 그렇게 큰 전쟁을 왜 막지 못했나 하는 의구심의 그 중심에 있었고 신에 대한 신뢰가 깨져 버리게 되었다. 신은 우리를 버렸다. 우리또한 신을 버렸다. 그렇게 신은 버려졌고 그 자리를 상업주의를 상징하는 광고판이 대체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때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 그 ‘아메리칸 드림’은 재의 골짜기처럼 악취를 풍기고 있으며 안과의사의 광고탑처럼 상업주의로 변질되었다는 상징으로 볼 수 있다.
아메리칸 드림은 미국 사람들이 갖고 있는, 미국적인 이상 사회를 이룩하려는 꿈이다. 다수 미국인의 공통된 소망으로 무계급 사회와 경제적 번영의 재현, 압제가 없는 자유로운 정치 체제의 영속 따위를 의미한다. 그러나 아메리칸 드림은 환상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 작품 속에서 잘 드러난다. 작가는 개츠비를 웨스트에그에 톰과 데이지를 이스트에그로 보낸다. 그들이 살고 있는 곳에서부터 그들의 좁혀지지 않는 거리가 묘사된 셈이다.
웨스트에그는 신흥부촌으로 순식간에 돈을 모은 졸부들이 사는 곳이고 이스트에그는 나름의 전통을 갖고 재산을 세습 받아온 귀족들이 사는 곳이다. 이스트에그와 웨스트에그의 사람들은 직업이나 신분에서 차이를 보인다. 이스트에그의 사람들 중에는 닉과 함께 예일대학교를 다녔거나 박사로 일컬어지는 사람들이 속해 있다. 이는 이스트에그 사람들이 전통적인 교육을 잘 받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이들은 자기네들끼리 구석에 모여 있다가 누가 가까이 접근하면 코를 벌름거리는 등 외부인에 대해 경계하는 듯 한 모습을 보여준다. 외부인과 섞이지 않고 자기네들만의 결속을 보여주는 모습, 수준 있는 교육을 받았다는 특징들은 이스트에그의 사람들이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귀족들로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스트에그의 사람들은 부랑자와 싸움을 벌이고 몹시 술에 취해 자갈 차도에 자빠져 있다가 자동차에 오른손을 치고 마는 모습 등을 보여준다. 이는 이스트에그의 사람들이 물질적 부와 세련미와 교양을 갖추고 있기는 하지만 도덕적, 윤리적으로는 거의 무정부 상태에 있으며 부주의하고 무책임한 행동 양식을 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요컨대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퇴폐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반면 웨스트에그의 사람들은 주로 영화 업계에 종사하거나 연극에 종사하는 사람들로서 이들의 직업은 20세기에 막 떠오르기 시작한 산업인 ‘영화’와 관련이 있다는 특징이 있다. 또한 영화 업계에 종사한다는 것은 그만큼 돈이 많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는 이들이 이스트에그와 같이 대대로 재산을 세습받아 온 전통적인 귀족이라기보다는 개츠비처럼 갑자기 떼돈을 번 신흥부자들이라는 점을 암시한다. 이들은 파티에 온 주 목적이 도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이 보이는 돈에 대한 관심을
잘 나타내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계급의 벽이 존재한다. 단적인 예가 톰이 개츠비의 파티에 참석했을 때 일화에 등장한다. 톰은 신흥부자인 개츠비를 보며 밀주업자가 아니냐고 의심한다. 이는 같은 부자라고 해도 부를 쌓는 방식에 따라 계층의 벽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managerie를 모아놓느라 힘을 들였겠다고 비꼬는 톰의 모습에서 그의 계급의식을 엿볼 수 있다. managerie는 동물, 별난 사람들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톰은 전통이 없으며 정제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열정만을 갖고 있는 신흥부자들을 보고 밀주업자라든지 managerie라는 단어를 이용해서 폄하한다. 이를 보아 당시의 부유층 사이에도 엄연한 계층의 벽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무계급사회의 실현이라는 아메리칸 드림이 마치 개츠비가 쫓는 초록색 불빛처럼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리하자면, 피츠제럴드가 바라본 1920년대의 모습은 정신적으로는 메마르고, 지나치게 물질만을 추구했다. 초기의 아메리칸 드림은 신대륙에서 자신들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초기 개척자들의 순수한 꿈이었을지 모르나, 20년대의 아메리칸 드림은 그 순수했던 의미가 퇴색되고 경제적인 성공만을 쫓는 것이 되어버렸다. 어쩌면 피츠제럴드가 보기에 아메리칸 드림은 환상에 불과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하루키는 위대한 개츠비를 세 번 읽은 사람은 자신과 친구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이처럼 이 소설이 훌륭한 작품으로 남을 수 있었던 까닭은 당시 시대상을 소설 속에 잘 담아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나는 이 소설을 단순한 로맨스 소설로 치부하고 지루하다는 느낌을 얻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이 작품은 자본주의의 풍요로 인해 생겨난 욕망으로 점철된 당대 세태에 대한 우회적인 비판이 숨겨져 있고, 저 스스로 삶을 개척하며 살아가라고 떠들어대지만 거대한 운명의 소용돌이 앞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는 한 인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이 1920년대에만 유효한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지루한 로맨스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것을 담고 있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