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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슬빛 Sep 10. 2019

디지털 시대, 우리는 무엇을 잃고 있나?

<다시, 책으로> 리뷰

‘방 안의 코끼리’는 누구나 알면서 외면하는 사실을 뜻하는 관용어이다. “집안에 작은 코끼리가 있다. 처음에는 아무도 그게 별문제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그 안에서 코끼리는 점점 더 자란다. 그리고 급기야 집에 꼭 끼일 정도로 몸집이 커져버린다. 이때가 되면 코끼리는 문제가 된다. 누구에게나 그렇다. 그러나 코끼리가 문제라는 걸 알면서도 이걸 해결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집 자체를 부수어버리지 않는 이상 코끼리를 빼낼 방법이 없을 것 같다. 그냥 같이 사는 게 속 편해요. 모른 척 딴청을 피운다. 코끼리에 대해 말하는 건 암묵적으로 금기시된다. 어차피 다 알고 있거든? 혼자 똑똑한 척 하지 마. 그렇게 코끼리는 집의 일부가 된다.”    

 디지털을 방 안의 코끼리라고 선언한 메리언 울프의 말은 정말 유효할까? <다시, 책으로>는 모든 것이 디지털로 변해가며 “깊이 읽기”가 급감하는 사회에 경종을 울린다. 저자는 ‘읽기’와 ‘정신’이 상호연관된 것이기에 ‘읽기’가 사라지면, 정신도 쇠퇴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읽을 때, 뇌에서 일어나는 일    


 저자는 소녀 시절 문학을 사랑했던 신경과학자답게 뇌과학과 문학 그리고 인간발달의 관점에서 왜 ‘다시 책으로’ 돌아가야 하는지에 답을 제시한다. 답을 간단하게 말하면, 읽기능력은 후천적으로 습득할 수밖에 없는 능력인데,(문맹일지라도 말은 잘하는 경우가 많다.) 이 능력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뇌 전체가 활성화된다.      


뇌는 어떤 방식으로 활성화되는가? 읽는 행위에 국한해서 말하자면 우리가 한 글자라도 말을 할 때는 시각령에 속하는 특정 뉴런군의 연결망 전체가 활성화되고, 이것은 그에 상응하는, 특정 언어에 기반을 둔 세포군의 연결망 전체와도 조응하는 한편, 발성을 담당하는 운동신경세포군의 연결망과도 조응한다. 이 모든 과정이 1000분의 1초 만에 이뤄진다. 지금 이 글을 완전히 집중해 읽고서 뜻을 이해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기술하려고 한다면 이런 시나리오를 100배로 곱해보면 된다고 한다. 그럼 읽기를 할 때 어떤 뇌 부위가 자극될까?    


읽기를 할 때 뇌가 활용되는 부위는 크게 다섯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1. 주의를 기울이는 과정은 우리의 두정엽(즉 중뇌의 최상층)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에서 주의를 분리시키도록 돕는 일부터 한다. 다른 곳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면, 책을 읽기 위해 그것을 중단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고 나면, 중뇌에서 눈앞의 대상으로 주의를 이동시키도록 돕는 일이 일어난다. 시각이 단어로 이동하게끔 뇌에서 명령을 내리는 것인데, 이렇게 한다 하더라도 그 단어에 집중을 한다거나 읽고 있는 상태는 아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우리가 새로이 주의를 집중하게 하고, 그러는 동안 새로이 읽기 회로가 행동에 나서도록 일깨우는 것이다. 읽기 직전에 일어나는 이 마지막 주의집중은 바로 좌우 반구의 두 번째 층인 간뇌에 자리한 시상이라는 아주 중요한 영역에서 일어난다.    

2. 주의를 집중할 준비가 되면 우리가 기다려왔던 행동이 드디어 시작된다! 눈앞의 대상은 이제 양쪽 눈의 망막에서 출발하여 시신경 교차라 불리는 X 모양의 교차지점에서 갈라져 뇌의 여러 층을 지나 좌우 반구 뒤쪽의 시각 영역에 이른다. 모두가 50밀리세컨드 이내에 후두엽 내의 특정 영역에 메시지를 가지고 도착한다.    


3. 시각정보가 뇌에 도착하면 그 다음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뇌의 언어영역에서 특정 단어의 다양한 의미를 탐색하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track이라는 단어가 시신경을 통해서 뇌로 전달되었다고 생각해보자. 뇌의 언어 영역은 이 단어의 가능한 의미를 탐색한다. “짐승 발자국? 경기장 트랙? 기차 철로?” 자주 사용되는 한 가지 뜻에서 시작해 점차 사용 빈도가 낮은 단어들을 거쳐 아예 새로운 가능성들까지 장황하게 늘어놓는다. track of tears(눈물 자국)? audio tracks(오디오 트랙)? school tracks(학교의 학급)? 등등.    


4. 이러한 가능성을 움직임으로 구현하기도 한다. 언어를 발화해보는 것이다. 그 단어가 행위를 나타내는 동사인지, 아니면 보다 추상적인 의미를 갖는 동사인지에 따라 동작은 달라진다. 예를 들어 ‘동물을 추적하다 tracks an animal, 범죄를 캐다 tracks a crime' 등과 같이 말이다. 같은 단어라도 어떤 뜻이냐에 따라(동음이의어가 많다는 것을 생각) 발음하는 방식이 달라진다.    


5. 언어를 받아들이는 과정(뇌에서 이해하는 과정)도 끝나면 받아들인 언어를 과거의 경험과 연관 짓거나 다른 의미와 연관 짓는 활동이 남아있다. 이는 일종의 연상 작용과 비슷하다. Track이라는 단어를 이해하면서 어릴 적에 뛰놀았던 마을의 철도를 연상하는 것처럼 말이다. (정동) 그리고 나서 뇌에 남아 있는 이 느낌들을 후두엽과 측두엽, 두정엽이 교차하는 중추적인 뇌에서 논리적인 의미추론으로 이끈다. 이로써 독자는 맥락 안에서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이해하기 쉽게 단계를 나누어 말하기는 했지만 사실 그 과정은 하나의 연결된 ‘빛의 조합’이다. 읽기라는 행동은 엄청나게 많은 일들이 빠르게 일어나는 신비의 과정이다. 

하지만 문제는 대다수사람들이 읽기를 너무 하찮은 것으로 여긴다.    


순간접속 시대에 깊이읽기의 급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보통 우리는 글을 읽을 때 다음에 오게 될 내용을 예측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스무 단어의 문장을 읽을 때도 스무 단어를 따로따로 읽는 것보다 다 합친 문장을 읽을 때 읽는 시간이 훨씬 줄어든다. 우리는 어떤 문장을 읽기도 전에 사전 지식으로 개별 단어의 시각적 형상을 신속하게 알아보고, 새로운 문맥 안에서도 그 의미를 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디지털 기기는 우리가 예측하는 능력을 더 활성화시켜 글을 더 빠르게, 더 건성건성 읽게 한다. 즉 일련의 단어들 다음에 우리가 무엇을 읽을지 가능성을 좁힘으로써 지각의 속도를 앞당기는 것이다. 요즘 모든 스마트폰에도 그런 기능이 있다. 문자를 입력할 때 가끔 심한 (가끔 당혹스러운) 오류를 동반하기도 하는 그 기능 말이다. 이럴 경우, 스무 단어로 이루어진 한 문장을 미리 예측하고 합쳐서 읽는 속도가 스무 단어를 따로 읽고 여기서 얻은 정보를 합치는 것보다도 훨씬 빠르다. 책을 읽을 때보다도 훨씬.    


결국 과거에는 힘들여 주의를 기울여야 이해가 가능한 매체(책)가 우리의 읽기의 대상이었다면, 이제는 즉각성과 빠른 업무 전환, 그리고 끊임없이 주의를 분산시키는 매체로 변했다. 길게 집중하는 능력은 취약해지고 인지적 인내심을 서서히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인지적 인내심은 책들, 그리고 그 속에 거주하는 ‘친구들’의 삶과 감정들로 창조되는 수많은 세계에 우리 자신을 몰입시킬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물론 영화와 영상으로도 그런 몰입이 어느 정도는 가능하다. 하지만 글로 명료하게 표현된 타인의 생각 속으로 들어갔을 때만큼의 몰입에는 이르지 못한다. 젊은 독자들이 다른 누군가의 생각과 느낌을 접하거나 이해해본 적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평소에 자신이 알고 지내는 무리나 가족 외의 사람들과는 공감의 느낌이 단절되기 시작한 나이 많은 독자들에게는 또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럴 경우에는 십중팔구 무지와 오해에 이르게 된다. 그것은 호전적인 형태의 불관용으로 이어질 수도 있으며, 정치적 견해가 다른 사람을 사악한 적으로 보게 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다양한 문화의 시민들을 위한 나라라는 민주사회의 본래 이상은 변질될 것이다. 결국 인지적 인내심을 잃는다는 것은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의 상실로 의미하는 것이다.    


디지털 매체에 매몰되는 것은 우리의 주의와 공감능력을 떨어뜨리는 것 외에 다른 문제도 있다.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 필요한 배경지식을 얻을 기회도 박탈한다는 것이다. 디지털 매체는 지식의 원천을 일원화, 획일화 시킨다. 우리는 인터넷 서버에서만 정보와 지식을 얻는다. 이는 각자가 가진 배경지식과 생각이 다양해지지 못하고 비슷해지는 현실을 낳는다. 이렇게 되면, 어떤 지식이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하는 자신만의 판단체계와 비판적 분석을 사라지게 만들고 무분별한 수용만을 초래한다.     

반면에 깊이읽기는 어떠한가? 깊이읽기를 하는 과정은 일종의 과학에서 진리를 추론해나가는 과정과도 매우 비슷하다. 깊이읽기를 하는 독자도 책을 읽으며 유추와 유비적 사고를 하는데, 과학에서도 유추에 입각하여 타당한 명제(진리)를 추론하는 것이 중요하다. 적절한 예를 모범으로 하여 비슷한 사례를 찾고 그 다음에 명제를 끌어내는 것이다. ‘철수는 이랬어. 철수는 5살이고, 같은 5살인 영희도 이럴 거야. 그러니까 5살 어린이는 이래.’ 라는 식이다. 그리고 그 후에 ‘5살 어린이는 이래’라는 명제를 검증하고 예외 사례를 탐색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자료를 보고 항상 생각하고, 유추하고, 연역적 방식으로 추론해나가고, 예외를 생각해보고, 비판하는 ‘깊이 읽기’도 과학과 비슷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집 안의 코끼리는 점점 더 커지고 있다. 그러나 이제 그저 모른 척 하거나, 알면서도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해서는 안 된다. 디지털 매체의 부작용을 알고, 여기에 저항하고자 한다면 디지털 시대에 떠밀리듯이 살아가는 삶을 더 이상은 두고만 봐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주체적 삶이며, 주체적 삶은 디지털이라는 거대한 파도를 거스르는 것(또는  골치 아프기는 할지라도 집 안에서 코끼리를 빼내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책을 읽으며, 몇 가지 의문점이 드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과연 책만이 답인가? 디지털 만능주의를 비판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디지털을 그대로 책으로만 대체해 ‘책 만능주의’를 선포하는 것은 아닐까? 저자도 그러한 점을 우려한다. 그리고 자신의 의도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렇지만, 저자가 제시하는 자료들만 본다면 독자가 책만이 답이라는 결론에 빠지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이 아이 교육의 유일한 해법이며, 책을 읽지 않는다는 이유로 지식 격차에서 뒤쳐진다는 것은 너무 책으로만 환원하려는 설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 연예인을 밀착 취재해 그들의 일상생활을 담아내는 리얼리티 TV 프로그램 쇼에서 한 연예인이 출현했다. 그의 일과는 주로 게임과 TV시청으로 이루어졌다. 그렇지만 그는 TV와 게임에는 엄청난 집중력을 보이는 모습을 보였기에 일반 대중은 그가 주의가 산만하다거나 인내력이 없다는 느낌을 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또한 그는 대스타로 성공해 승승장구하고 있기에 책을 읽지 않으면 경제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처한다는 이 책 <다시, 책으로>의 내용에 어긋나는 듯 보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책을 읽지 않고 드라마나 게임 같은 디지털 매체를 이용하여 주변세계를 탐험하고 학습한 아이가 나중에 커서 더 성공한 경우는 어떻게 설명할 것일까? 그냥 예외 사례로 무시하기에는 그 사례가 너무 많지 않을까?     


 사실 답은 책과 디지털 사이의 중간쯤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책만이 답이고, 디지털만이 답인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렇기에 어느 한쪽만을 답으로 정한 뒤 자신이 생각한 답을 성급하게 선포하고 적용하는 것은 우리 사회에나 개인의 가정에나 너무 위험한 일이다. 그러니 우리는 디지털에 세뇌된 결과로 ‘빨리 빨리’만을 외치는 대신, 좀 더 천천히, 그리고 꾸준하게 답을 찾으려는 시도를 계속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디지털 문화의 ‘빨리 빨리’ 문화에 제동을 거는 이 책의 비판에서 가장 새겨들을만한 내용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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