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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슬빛 Nov 17. 2019

커피 그라인더 이야기

상징물을 통해 본 <태고의 시간들>

 문득 떠오르는 질문. ‘태고’의 ‘시간’들. 작가는 제목을 왜 이렇게 추상적으로 지었을까? 태고는 일반적으로 아주 먼 옛날이라는 상당히 추상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단어이다. 그런데 동시에 이 태고는 한 시골마을의 이름이기도 하다. 이러한 추상적인 동시에 구체적인 ‘태고’라는 단어는 작품 전체가 구체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면서, 인류사 전반에 관한 추상적인 이야기를 다루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추상은 구체성, 특수성을 담고 있다는 말처럼.      


상징물 1. 커피그라인더

소설에 나오는 ‘커피 그라인더’의 장에서 작가는 이렇게 쓰고 있다. 그라인더는 돈다. 고로 존재한다. “어쩌면 그라인더는 현실의 축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그라인더 주위에서 돌고 진보해나가는 현실의 축. 그라인더는 이 세계에서 인간보다 더 중요한 존재일 수 있다. 나아가 미시아의 그라인더는 ‘태고’라고 불리는 것의 기둥일지도 모른다.” 세계의 중심이란 것은 애초에 자의적인 것이다. 인간이 어딘가를 중심으로 설정하느냐에 따라 세계의 중심축은 달라질 것이다. 그렇기에 어떠한 곳도 세계의 중심이 될 수 있고, 어떠한 곳도 세계의 중심이 아닐 수 있다.    


 태고도 마찬가지이다. 태고는 작은 시골마을에 불과하지만, 이 곳도 세계의 중심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소설은 보여준다. 소설은 이 곳, ‘태고’를 조망하는데 소설 내에서 모든 세계사적인 사건과 역사가 태고를 중심으로 하여 돌아간다. 그리하여, 이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는 거시적인 역사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 독일 군이 폴란드를 침공하여 유대인을 학살할 때도, 볼셰비키가 독일공습을 감행할 때도 태고마을 사람들은 그 역사의 현장에 있었고 이데올로기 전장 속에서 갈기갈기 찢겨진다. 우리가 알고 있는 거대한 세계사의 흐름들은 이러한 부분들이 씨줄과 날줄처럼 얽히고설켜 만들어진 것이며 ‘역사 속에 스러져간 익명의 존재인 개인의 무게’를 간과할 수만은 없다. 즉, 작가는 60개의 조각이야기라는 미시 서사 기법을 활용하여 태고라는 작은 마을 속에 거대 서사를 축소시켜 놓고 있는 것이다. 


상징물2. 카드와 서랍장

 이는 ‘미시아의 시간’이라는 장(p.76)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미시아는 주방 싱크대의 서랍 속에서 하나의 소우주를 발견하고, 그 작은 공간 속에 세계 전체가 들어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서랍 안에는 모든 것이 있었고, 온 세계가 있었다.” 미시아는 게임에 쓰는 카드 속에서도 얽히고설킨 인간관계와 그것으로 인해 촉발된 전쟁과 불화, 즉 거대한 역사가 들어 있음을 깨닫는다. “미시아가 카드를 뒤집자 초상화들이 나타났다. 그녀는 왕과 왕비의 얼굴을 하염없이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그들 사이의 관계를 알아내보려 했다. 서랍이 닫혀 있을 때면, 그들이 은밀하고도 긴 대화를 시작하는 게 아닌지, 가상의 왕국을 두고 서로 다투는 것이 아닌지 사뭇 의심스러웠다. 미시아가 가장 좋아하는 인물은 스페이드 여왕이었다. 미시아의 눈에 그녀는 가장 아름다웠지만, 가장 슬퍼보였다. 스페이드 여왕에게는 나쁜 남편이 있었다. 그녀에겐 또한 친구가 없었다. 그래서 매우 외로웠다.”    


 개개인을 초월하는 듯이 보이는 거대한 역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아무리 크고 웅장한 이야기도 작은 상징 속에 담을 수 있고, 크고 웅장한 이야기도 개인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때 작은 상징물과 거대한 역사 사이의 간격을 메워주는 것은 상상력일 것이다. 태고는 이때의 원형적인 상징과도 같은 의미를 지닌다.    


 각각의 이야기, 설화, 신화들을 관통하는 어떠한 원형신화 또는 원형서사가 존재한다면, 태고를 배경으로 한 특수한 이야기도 결코 태고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닌, 인류 전체의 보편적인 이야기를 담을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칼 융이 말했듯이 인간의 무의식은 원형 상징(시공간을 초월해 되풀이 되는 인류의 보편적 상징)들로 이루어져있기에 가능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상속자 포피엘스키의 게임의 배경이 되는 공간은 ‘태고’이며, ‘태고’가 이 게임의 가장 중심이 되는 공간이라고 게임 설명서는 말한다. 개임을 통해 등장하는 신의 모습 역시 우리에게 익숙한 성서의 일화들(욥의 수난기, 바벨탑 신화, 카인과 아벨 등)에 그 원형을 두고 있다.    


 그러나 작품은 단순히 기독교 신화에 그치지 않고, 기독교와 공통점을 갖고 있는 원형신화들을 차용한다. 술 취한 남자들에게 몸을 팔다가 숲속에서 홀로 아이를 낳은 뒤 영험한 능력을 얻게 된 크워스카는 모성을 상징하는 인물로, 그리스 신화 속 대지와 농업의 여신인 데메테르를 떠올리게 한다. 가슴에서 신비한 모유가 흘러나와 사람들의 상처와 질병을 치유하지만, 공교롭게도 그녀가 치유한 사람들은 모두 전쟁에서 죽게 된다. 이 과정에서 크워스카는 신의 섭리를 대변하고, 신의 뜻을 전하는 영매적 존재로 묘사된다. 소설에 등장하는 강의 존재도 배경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는 모든 문명의 시초가 강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떠올리게 한다. 로마를 건국한 로물루스도 마찬가지였는데, 그가 설립한 로마의 초기 근거지는 ‘결코 마르지 않는 도도한 물길로 쉼 없이 바다로 이어지는 강둑’에 세워졌다. 자연과 태고의 어머니로 상징되는 크워스카가 두 명의 아이를 낳았지만, 한명은 죽고 한명은 살아남았다는 것도 한명의 쌍둥이가 살해된 로마 신화를 원형으로 한다. 크워스카의 죽은 아이는 아버지도 불분명하고 악령이 되어 모든 생명을 빨아먹는다는 것도 태고가 위태로운 평화와 전쟁, 폭력 위에 기초한 마을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태고는 모든 문명의 축소판이자 원형이기에 전쟁은 모든 문명의 시작과 궤를 같이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태고를 모델로 한 게임 설명서가 카인이 아벨을 죽인 이야기, 형제 살해의 신화를 담고 있다는 데에서 더욱 명확해진다.     


 그렇지만 이러한 폭력과 전쟁 속에서도 작가는 사랑과 연민의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크워스카와 그녀의 딸 루타는 마을 밖 이방인이지만, 사람들은 그들을 따스한 시선으로 품어주고 함께 어울리는 것을 꺼려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미시아가 태고를 전쟁터로 만들어버린 러시아 군 장교의 무례함을 용서해주고, 포옹해주는 대목 또한 주목할 만하다. 미시아가 젊은 장교를 용서해줄 수 있었던 것은 떠나온 가족에 대한 사랑이라는 동질감을 공유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처럼 소설 전체는 인류가 타인에 대한 사랑과 연민 또한 지니고 있었음을 포착한다. 사실 이는 소설 전체에서 인간에게 소외당하고, 배신당할지언정 인간을 사랑하고 연민한 신의 시선과도 일치한다. 결국 신의 피조물인 인간에게 또한 이러한 신성이 깃들어있음을 소설은 말하고자 한다. 이를 표현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로서, 미하우 가족의 성인 ‘니에비스키’는 폴란드어로 ‘하늘의’, ‘천국의’를 뜻하는 형용사이며, 파베우 가족의 성인 ‘보스키’는 신의‘ 또는 신과 같은’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 그 밖의 태고주민들의 성인 헤루빈이나 세라핀 또한 천사의 이름으로 신성을 상징한다.      

상징물3. 버섯균

이러한 사랑이 있었기에 태고는 파멸하지만 다시 부활한다. 이는 ‘탄생-노화-죽음-탄생’이라는 신화적 원형이 지닌 순환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태고에서 자라나는 ‘버섯균의 시간’을 빌어서 잘 설명된다. 버섯균은 땅속에 배어들어 있는 즙 또는 썩거나 죽은 것들의 찌꺼기에 남아있는 즙을 빨아먹음으로서 존재한다. 즉, 죽음이 새로운 생을 낳는 것이다.(“버섯균은 죽음의 생이고, 부패의 생이며, 모든 죽은 것들의 생이다.”) 그리하여 버섯균은 새로운 자손들을 번식시킨다. 여름과 가을에 세상에 나오는 버섯들은 가장 아름다운 아이들이다. 사람들이 오가는 길가에는 가느다란 자루가 돋보이는 큰 낙엽버섯이 돋아나고, 거의 완벽에 가까운 형상의 먼지버섯과 황토색 어리알버섯이 초록빛 잔디에 새하얀 빛깔로 수를 놓는다. 비단그물버섯과 구멍장이 버섯은 부러진 나무들을 당당히 뒤덮는다. 숲은 노란색 살구버섯과 올리브빛 무당버섯, 스웨이드 빛깔의 그물버섯으로 가득 찬다. 이렇게 버섯균은 태고의 자연처럼 태고 마을 사람들도 전쟁의 아픔으로부터 서서히 회복할 것임을 암시한다.     

이는 소설의 마지막 장면, 고향을 떠나는 버스에 오른 아델카가 아버지 집에서 몰래 들고 나온, 어머니의 커피 그라인더를 꺼내어 천천히 돌리는 부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아델카의 이러한 행위는 미시아는 이제 늙었지만 그녀의 자손이 그 뒤를 잇고, 태고 마을의 시간도 계속될 것임을 보여준다. 이렇게 어머니라는 존재의 계승을 상징하는 이 장면은 게노베파의 시간이 미시아의 시간으로 이어지고, 그 시간이 다시 아델카에게로 연결되며 모든 것이 되풀이 되고 순환되면서 태고 마을의 삶, 즉 우리의 삶이 계속 될 것임을 보여준다.    

다시, 커피그라인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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