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율시 Mar 27. 2018

기억과 공간

변하는 공간에 남아 있는 기억

작은 집에 오랜만에 방문했다. 설이다.


시골에 오면 언제나 이곳에 오기를 학수고대하던 어릴 때의 나처럼 행동하곤 한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척 하고 있지만 사실 모든 게 많이 변했다. 사람들과의 관계, 나 자신, 이곳을 대할 때의 자세. 모두가.

어릴 때 이 공간에 오면 하루 종일 숨바꼭질을 했다. 경운기 뒤, 옥상, 옥상으로 가는 계단 밑, 쪽문 뒤...  모든 곳이 숨을 곳이었고, 뛰어다닐 곳이었다. 다소 정적으로 느릿느릿 걸으며 이 공간을 다시 보니 그때 생각이 났다.


지금 이 공간은 더 이상 숨바꼭질 할 공간은 아니다. 경운기가 서 있는 작은집, 친척들이 모이는 공간. 더 이상 쓰지 않은 간이 화장실과 올라갈 일 조차 없는 옥상. 같은 장소지만 더 이상 같은 곳일 수는 없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이미 변한 공간도 그곳에 방문하면 추억을 더욱 생생하고 특별하게 만든다. 마당 한 켠에 있는 이제 쓰지 않는 간이 화장실을 보는데, 나도 모르게 마치 어릴 적 그때에 와 있는 것처럼 웃음이 났다.


어릴 적 숨바꼭질을 할 때 남동생이 이곳에 숨은 적이 있었다. 너무 숨바꼭질에 심취하여, 술래에게 들킬까 안쪽으로 발을 계속 내딛던 동생은 그만 변기통에 발이 빠지고 말았고, 그 이야기는 몇 년 동안이나 시골에 올 때마다 회자되던 일화가 되었다.


한동안 잊고 있었는데, 이 장소에 오니 다시금 생각이 났다. 신발이 지저분해진 채 울던 남동생도, 그걸 보며 우스워 뒤로 넘어가려고 하던 나와 가족들도. 신나게 친척들과 이야기를 공유하던 그때의 모두가.


같은 공간이 언제까지나 같은 의미의 장소로 유지될 수는 없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 안의 추억들은 몇 년이 지나도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 같다.



설을 보냈던 2월에 썼던 글이다.

공간과, 현재의 나와, 과거의 시간 속 단편이 된 일화들.


공간은 그 안에 누가 어떤 관계로 존재하는지, 그리고 존재했는지에 따라 가장 크게 달라지는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창 밖이 바뀌는 순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