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땠어요?] 수많은 비극과 충돌이 한편의 시가 되는 순간 <미나리> 리
최근 <미나리>에 출연하신 윤여정 선생님의 수상 소식이 심상치가 않습니다. 해외 영화제 수상 소식이야 워낙 국내언론서 떠들썩하게 떠드는 경향이 있지만 평소보다 더 많은 소식이 들리는 것도 사실인데요. 배우조합과 전미비평가협회에서 상을 받았다는 소식은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단순히 윤여정 선생님 연기 뿐 아니라 작품 자체가 높은 평가를 받은 결과라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이네요. 많은 분들이 기다리신 만큼 저도 기다렸다가 서둘러 극장을 찾았습니다.
한 가족이 아칸소의 인적없는 도로를 달립니다. 아빠 제이콥(스티븐 연 분)은 왠지 모르게 들떠 보이고 엄마 모니카(한예리 분)는 내심 불안한 기색이죠. 가족들이 도착한 곳은 한적한 들판. 트레일러를 이어서 만든 간이주택이 보이고 의아해하는 모니카에게 제이콥은 자기가 말한 새 출발이 여기서 시작될 거라며 농장을 짓겠다는 계획을 자랑스레 이야기합니다. 첫째 딸 앤 (노엘 조 분)과 심장병을 앓고 있는 남동생 데이빗(앨런 김 분)은 묘하게 의견이 다른 엄마와 아빠의 눈치를 보면서도 금세 새 보금자리에 적응합니다. 모니카와 제이콥은 아이들 문제로 이견 조율 끝에 한국에서 모니카의 엄마 순자(윤여정 분)를 모셔오기로 하고 다섯 가족의 아칸소 생활이 그렇게 첫발을 내딛습니다.
<미나리>는 80년대 부푼 꿈을 안고 미국으로 이민을 간 가족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분명 시대적인 현상 중 하나였고 이를 다룰 수 있는 방식은 그만큼 다양하겠지만 영화는 가장 작고 가깝게 시선을 좁혀나갔습니다. 정이삭 감독의 경험이 담겨있다는 사실이 잘 알려졌지만 모든 자전적 이야기가 작고 세밀한 이야기로 표현되진 않습니다. 보통 우리가 미국의 풍경을 떠올릴때 생각하는 대도시나 황무지에서 끝없이 이어진 도로 같은 풍경은 온데간데없고 5명의 가족이 몸을 뉘이는 좁고 길쭉한 이동식 주택과 푸르른 들판이 전부죠. 그 안에서 인물들이 움직이는 공간과 감정을 드러내기 위해 많은 걸 덜어내고 조각해, 툭툭 관객에게 전달합니다. 모든 표현과 연출들이 워낙 자연스러워서 실제 공간 속에서 지켜보고 있다는 인상을 많이 받았습니다. 소설로 바꿔 말한다면 짧고 건조한 문장들이 이어진다고 생각하시면 될 거 같네요. 아주 좋은 방향으로 말이죠.
그리고 이런 커다란 연출의 방향성은 인물과 이야기를 구성하는 방식에도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미나리> 관련 평들에 커다란 스토리나 극적 전개가 없다는 이야기가 많은데 정말 그런지 의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느끼는 위기감이나 '극적인 감정'은 커다란 변화에서만 느껴지는 게 아닙니다. 먹고 싶지 않은 음식을 먹거나 침해받지 않아야 할 자신의 공간에 침범을 받거나, 사는 환경이 바뀌거나, 계획했던 하루일과가 틀어지거나 하는 남들이 보기엔 사소한 일들로 우린 쉬이 흔들리곤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미나리>가 가진 에피소드들은 충분히 '극적'입니다. 우리가 다른 작품들에 비해 이 영화를 그렇게 평가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건 아마 선명한 악역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 <미나리>에는 우리가 흔히 예상하는 악역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가족들의 모든 문제를 만들어 괴롭히고 그 하나의 턱만 넘어가면 모든 게 해결될 것만 같은 그 '대상'이 존재하지 않죠. 마왕이나 최종보스같은 마지막 문이 없습니다. 그저 우리가 매일매일 만나는 그 불편함과 만족감, 거리감과 포근함, 낯섦과 두근거림 같은 그 사소한 한 장 한 장이 잘 포개져 있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평가는 오히려 '현실적이다'라는 표현으로 정정하고 싶은 게 제 마음입니다.
제가 앞서 말씀드렸지만 '<미나리>가 현실적인 작품이다'라고만 딱 잘라 이야기하는 건 이 영화를 오히려 거칠게 묶어버리는 결과가 아닌가 걱정이 됩니다. 제가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이라고 생각했던 건 흔히 우리가 삶에서 만나는 크고 작은 비극과 충돌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일은 수많은 충돌을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많은 영화들은 그러한 비극들을 관객이 좋아할 만한 것을 골라 갈등을 만들고 해결하는 식으로 그 충돌을 풀어내죠. <미나리>는 그 많은 충돌들을 꾸역꾸역 전달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대신 아주 섬세한 손길로 인물들을 일으켜 관객의 품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도록 두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걸음걸이는 그 모든 충돌이 쌓이고 쌓여 무너지는 순간에 쿵쿵거리는 뜀박질로 속도를 높입니다. 그 달리기 끝에서 만나는 풍경이 어떤지에 대해선 그저 직접 확인하시라 권하는 거 외에는 드릴 말씀이 떠오르지 않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