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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방 바이허니 Sep 13. 2021

아이들, 도서관 귀신을 물리치다

'책세권' 입문기 1

  



굳게 닫힌 문을 노려보다가

     

  저는 1988년부터 2015년까지 국어교사였어요. 경북 봉화중학교에서 시작하여 울산 화봉고등학교에서 끝냈어요. 봉화에서 화봉이라, 글자 순서만 바뀐 게 꽤 재밌네요. 

  긴 세월 동안 돌고 돌아 원점으로 회귀했다는 느낌도 살짝 들지만, 그건 아니지요. 그동안 저의 내면이 만들어지거나 다듬어져갔고, 학교에서 만난 평생의 벗들이 생겼으며, 새롭게 하고 싶은 일도 찾게 되었으니까요.  


  2002년, 학교도서관은 질식 그 자체였어요. 어느 학교랄 거 없이 도서관은 끄트머리 구석진 곳에 있어서 아무도 찾지 않은 곳이었어요. 아이들 사이에 꽤 그럴듯한 도서관 귀신 이야기까지 나돌 정도였으니까요. 

  때로는 재밌고 때로는 그럴싸하기도 했지만, 국어교사인 저에게는 마음 아프고 부끄러운 이야기였답니다.

 

  어느 날 저는 굳게 닫힌 학교 도서관 문을 노려보았어요. 저 문을 열고 켜켜이 쌓인 서가 먼지를 털어내자 싶었어요. 오래된 전집류 대신 신간 도서를 비치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아이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위치, 아이들의 성장 과정에 적합한 책, 다양한 독서 활동으로 북적이는 도서관……. 머릿속으로 행복한 그림이 그려졌어요. 

  지금 생각하면 너무도 당연한 최소 조건인데 그때만해도 꿈같은 이야기였답니다.

바이허니에서 열린 울산국어교사모임의 <이내북콘서트>

  그런데 말이에요. 그게 저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어요. ‘학교 도서관을 살리는 전국교사모임’이란 게 꾸려지고 있더라고요. 이런 고마울 데가 있나! 울산의 국어 선생들도 모였답니다. 

  쏟아지는 새 책 중에서 우리가 직접 읽어보고 골라낸 걸 아이들에게 추천하자고요. 또, 추천만 하지 말고 아이들과 실제로 독서 활동도 해보자고요.

 

  그 마음들이 모여 <독.도랑 놀자(도서실에서 독서하며 놀자)>가 시작되었어요. 울산의 여러 학교 국어교사들이 격주마다 모여 읽은 책을 소개하고, 아이들과 나눌 독서 활동 내용을 의논했지요. 

  ‘지금, 여기’ 아이들의 삶을 다룬 청소년소설들을 소개하고 활동을 안내하는 자료집도 만들었고요. ‘노는 것처럼 즐겁게 책 읽는 학교 도서관 문화’를 꿈꾸며 서로를 다독이고 위안받는 동안 2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네요.

바이허니를 찾아준 신선여고 학생들

 



아이들과 마주한 ‘어린 나’들, 책으로 성장하기


  <독.도랑 놀자> 모임 초창기에는 주로 청소년소설을 읽었어요. 문제가 생기면 동굴 속으로 들어가 버리는 사춘기 아이들, 그 아이들에게 말이라도 붙여보려면 아이들을 알아야겠다는 절박함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청소년소설을 읽고 나누는 동안 전혀 예상치 못한, 뜻밖의 사태가 생겼어요. 


  저와 동료들의 사춘기가 꿈틀거리고 나오는 거예요. 어른, 게다가 선생이 된 여자들이 둘러앉아 어린 시절의 아버지와 엄마, 형제들에게 그때 왜 그랬냐고, 그때 섭섭했노라고 따져 물으며 울기도 했어요. 

  화내고 우는 선생에게, 과거에 받지 못했던 공감과 위로를 건네며 자기 이야기를 꺼내는 동료도 있었고요.


  우리는 각자의 내면에 똬리 틀고 있었던 ‘어린 나’를 비로소 보듬을 수 있었지요. 아울러 현재의 아이들을 조금씩 이해했으며, 동굴로 들어가는 아이들에게 진심을 건네는 연습도 할 수 있었답니다. 

  수업 시간, 상담 시간을 통해 아이들에게도 청소년 책을 권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끄집어내도록 했어요. 그러자 개인에게 맞는 책을 권할 수 있었고요. 아이들은 저마다의 취향과 목표에 따라 책을 찾아 고 또 책으로 길을 찾기도 하더군요.


  아이들과 책으로 성장한 이야기를 하려니 <독서·논술반> 동아리도 빼놓을 수 없겠네요. 논술고사가 대학 진학의 엘리베이터가 되기도 했던 시절이었지만 저는 독서 비중을 무겁게 했어요. 진정한 논술은 글쓰기 기능이 아니라 진심을 전달하는 힘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에요. 

  읽고 싶은 책을 두 주에 걸쳐 읽고, 셋째 주에는 글을 쓰고, 넷째 주엔 그 글을 돌려 읽고 짧은 의견을 달아주며 수업을 진행했어요. 교사는 물론 학생에게도 워낙 빡빡한 학교 일정상 제가 욕심낼 수 있는 최대치였답니다.


  동아리 시간은 늘 부족하고 아쉽게 흘러갔지만, 아이들은 시간이 쌓이는 만큼 성장해 나갔어요. 지금도 생각나는 학생이 있답니다. 

  지극히 평범하여서 한 학기 동안 이름 부를 기회가 거의 없었던 학생이었어요. 말수가 적긴 동아리 시간에도 마찬가지였으나 꼬박꼬박 책을 읽고 정성껏 글을 써내더군요.

 

  그래서였겠지요? 시간이 지나면서 저뿐 아니라 다른 학생들도 그 친구 글을 기다리게 되었어요. 그 학생은, 열심히 읽으니 쓸 거리가 있고 쓰는 과정을 통해 더 잘 읽어내는, 책과의 선순환을 경험하는 진정한 독자였어요. 언젠가 그 학생이 책으로 받은 위안, 책으로 자라난 자기 성장에 관한 글도 썼더군요. 


  존재감을 넘어 자존감이 점점 자라는 학생을 바라보는 제 마음 역시 뿌듯하더군요. 그 이후, 독서가 왜 필요한지 말해야 할 때, 저는 그 학생 글을 아이들에게 읽어주었어요. 

  저는 책의 힘을 믿는 교사로 지냈고요. 지금도 책방 바이허니에서 책으로 '놀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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