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부장이란 이름의 폭력 7
최근에야 할머니가 논과 밭을 정리해서 손이 필요 없지만, 한창 농사를 짓던 내 10대 중반까지만해도 거의 매주 주말마다 일손을 거들러 시골에 가야했다. 방학때면 우리를 시골에 오래도록 떼놓고 싶어 압박을 주는 아빠덕에 간혹 일주일씩 깡시골에서 할머니 말동무로 갇혀있기도 하고, 난감함을 온몸으로 표현하며 겨우 집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어린 우리는 고추를 따거나 집안 청소를 하고, 사과를 고르는 일 등을 했다. 그리고 할머니, 할아버지의 말동무를 하고, 윷놀이나 화투 상대를 해드리며 재롱을 떨어야했다. 아빠는 큰아빠, 작은 아빠와 시덥잖은 탁상정치를 펼치면서 보수당을 지지하는 대화나 하는 정도다. 그렇게 할머니, 할아버지 돌아가실 날이 얼마 안 남아 안타까운 양반이 그 양반들 비위 맞춰주며 재롱떠는 건 본적이 없다. 할머니한테 전화를 드리는 것도 엄마와 우리들에게 임무로 주어졌다. 엄마와 우리들이 아빠의 효도 대행인이었던 셈이다.
그 집에선 큰아빠, 작은아빠, 할머니, 할아버지가 벽지가 누레질 만큼 방안에서 담배를 펴댔다. 그 담배냄새가 너무 싫었다. 고등학교 때던가.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으로 담배 두 보루를 샀다. 그리고 할머니한테 내밀면서 "할머니, 담배 너무 많이 피지 마시고 건강하게 오래 사세요."하고 에둘러 말했다. 어른들한테 훈수두냐며 혼이 났다. 아이에 대한 배려라는 것을 모르는, 적어도 고작 딸년들한테까지 해야되는 줄은 모르는 어른들이었다.
일은 같이 했지만, 밥상은 따로였다. 할머니, 할아버지, 큰아빠, 작은아빠, 아빠는 식탁에서 먹고 우린 별도의 상을 꾸려 그 밑에 쪼그리고 앉아 먹었다. 고기반찬은 대체로 그 상에 먼저 올랐고, 거기서 먹다 남긴 것이 우리 상에 왔다. 그 상에 올라가고도 남을만큼 고기가 많을때에야 온전히 우리 상에 도달했다. 우리는 밥을 먹다가도 먼저 먹은 할머니, 큰아빠, 작은아빠, 아빠가 밥을 다 먹으면 커피를 타드려야했다. 엄마는 밥 먹는 중간에도 국이나 밥을 더 떠다주고, 반찬을 더 덜어다주곤 했다. 그들이 먹고 지나간 자리의 그릇들을 치워야 했다.
그집에 있으면 시종 잔소리가 이어졌다. "너랑 언니는 일찌감치 돈벌어서 동생들 뒷바라지해라. 안그럼 동생들 학비 누가 대주냐. 우린 그럴 돈 없다", "니들이 아빠 사업 도와줘야돼야.", "여자는 마캉 돈 많은 남자 만나서 시집 잘 가는 게 최고여". 일해주고 잔소리 들어먹으면서 유년시절의 주말과 방학을 보냈다. 이러니 누구도 시골에 가고 싶어하지 않았다. 하지만 ‘때리는 건 가르치는 방법이 아니라 길들이는 방법이다’ 편에서도 얘기했듯, 아빠의 물리적, 언어적 압박으로 인해 마지못해 갔다.
그런 이유가 아니라면 엄마를 위해서였다. 엄마는 30년 넘게 그 집에 제사와 차례를 지내러 간다. 김장을 하러 간다. 5남매인 그집의 모든 김장김치를 할머니가 스스로 맡고, 할머니의 진두지휘 아래 엄마가 김장을 한다. 2-300포기를 혼자 할 순 없다. 딸들이 둘, 셋씩 더 붙어도 꼭두새벽 시작한 김장은 밤이 되어야 끝나니까. 물론 그집딸들은 안 온다. 아빠도 김장을 돕진 않는다. 이러니 우리집 딸들은 엄마의 고생이 눈에 밟혀 내키지 않지만 가서 손을 거들게 된다. 어릴 땐 아빠가 무서워서, 크고나니 엄마가 불쌍해서 동생들은 여전히 당번처럼 시골에 간다.
여전히 시골에 가면 아빠는 주방에 밥 먹을 때 말곤 들어오지 않는다. 물도 한 컵 지 손으로 안 떠다 마신다. 할머니 앞에만 서면 유난히 더 뒷짐모드다. 본인이 가장으로 대우 받고 산다는 걸 보여주는 게 효도라고 생각하는 것도 같다. 아빠의 사업은 30년 넘게 말아먹었기에 할머니 드릴 용돈이 날 곳이 없다. 30년 넘게 집안 건사한 엄마가 할머니 용돈을 봉투에 담아 가져오면 아빠가 준다. 가장의 위세가 남아있다는 걸 그런식으로 증명하는 걸까. 본인 아들이 왜 남자로, 가장으로 모셔져야 한다고 생각하는건지, 왜 그 생각에 맞춰서 있지도 않는 가오를 세워대는건지. 심지어 아빠의 무능은 할머니가 더 잘 안다. 아빠가 집이며 차며 공장이며 날려먹은 것도 모자라서 선산까지 팔아먹었으니. 그런데도 여전히 할머니는 "너희가 집에서 큰소리를 내니까 아빠 사업이 안 되는거 아녀. 기지배들이 큰 소리 치면 못 써." 라거나, "너희들이 아빠 사업을 도와야지.", "남자는 기가 살아야돼." 같은 소리를 했다.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책에서 작가는 남자 기 살려줘야 한다는 말이 세상에서 제일 꼴보기 싫더라고 표현한다. 그 대목을 보고 어찌나 웃프던지. 세상 어디에도 이런 문화가 존재한다니, 이 큰 지구가 내가 사는 대한민국만큼 작아진 느낌이었다.
공자님의 말씀에 따라 여자가 집안 어른들(물론 남자의 집안 어른들이다)에 대한 예를 갖춰왔다. 유교의 좋은 교리들은 다 팔아먹고 여자가 대리효도 하라는 얘기만 어찌 그리 다들 숭배하는건지. 그렇게 유교타령 하는 인간치고 논어라도 제대로 읽은 인간을 못 봤다. 공자가 이 시대 태어났다면 외려 성평등을 외쳤을지 모른다. 공자는 자기 시대에서 최선을 고민한 사람이지, 세상 혼자 잘났다고 설친 사람이 결코 아니다.
실수를 부끄러워하지 말라
공부하고 생각하지 않는 것은 시간 낭비다
젊은이를 존중하라
(공자의 10가지 명언 중)
시대의 현인들은 그 시대에서 가장 훌륭한 말들을 해왔다. 그땐 상상도 못 했겠지만 지금은 여자나 남자나, 노인이나 젊은이나 똑같은 사람이란 걸 모르는 사람이 없지 않나. 정말 현인이라면 이런 시대의 흐름을 가장 먼저 캐치하고 '평등'을 설파했을것이다. 그러니 정말 유교를 따르겠다면 시대 뒤떨어진 유물 같은 논리들 말고, 자아성찰하라는 훌륭한 말씀들부터 받드는 것이 어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