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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 Nov 12. 2019

보증된 참신함을 찾아서

죄송하지만, 그런 건 없어요.

나는 얼마 전 새로운 직장에 취직을 했다. 단기로 했던 아르바이트를 제외하고는 두 번째 직장이다. 이전 직장의 퇴사 사유는 "회의가 아니라면 어디서, 지금이 아니라면 대체 언제?"에 나온대로, 지쳤다는 것. 열정이 활활 타오를 때는 주말을 통으로 반납하고, 1박 2일을 꼬박 새어 회의를 해도 괜찮았다. 일이 익을수록 나아질거라 생각했고, 지나가는 과정일뿐이라 생각했다. 지금 태우는 열정들이 언젠가 오색의 결실로 빛날거라 믿었다. 하지만 내 열정은 까만 재로만 남았고, 나의 기본적인 욕구들까지도 잠식해갔다. 아무런 욕구조차 없는 상태로, 인생에 대한 아무런 의지가 없는 상태로까지 소진되고나서야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렇게 지난 반 년간 새로운 직장을 갖지 않고 쉬었다. 반년동안 잃어버린 욕구를 회복하는 기간을 가졌다. 그러다보니 새로운 직장을 찾는 일이 훨씬 조심스러웠다. 내가 소진되지 않는 곳, 위계가 나를 찍어내리지 않는 곳, 내 신념을 저버리지 않아도 되는 곳, 최소한 생계를 유지할만한 임금이 보장되는 곳... 여러 기준들을 고려해서 지금의 직장에서 함께하게 됐다.


내가 있는 곳은 두달 째인 지금까지 야근을 거의 하지 않았다. 야근은 한두달전부터 정해져있어서 예측가능했다. 물론 내가 업무시간 내에 할 수 있는 범위의 일만을 하려고 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야근을 깔고 가는 곳은 아니기도 하다. 주말 근무는 당연히 없다. 주말 일정도 간혹 생길 수 있겠으나, 이것 또한 예측가능한 범위에서 발생할 것이라는 모종의 신뢰는 생겼다. 아르바이트를 포함해서 생각해보면 규모가 작은 직장은 작은대로, 크면 큰대로 위계가 있다. 코딱지만한 회사에서도 서로 위계를 엄청 나눈다. 이곳도 물론 공무원을 대하는 곳이기도하고, 전문가들의 집단이라 외부적으로 보이는 직함을 중시하긴 한다. 하지만 업무에 있어서 개인의 재량을 최대한 존중하고, 선배로서 혹은 선임으로서의 간섭에 대해 조심스럽게 생각한다. 적어도 그들의 동료라는 생각은 드는 것이다.


내가 이곳에 입사하고 처음 있었던 야근은 사무실 이전식이었다. 십여년간 오래된 연립주택에서 일하다 버젓한 사무실을 임대하게 되었다. 이 곳의 구성원들은 이전식에 힘을 쏟았다. 이전할 수 있도록 시간과 노력을 보태준 구성원들의 노고를 상호간에 치하하는 중요한 자리긴 했다. 하지만 식순과 준비사항 점검시트 등의 계획안을 보니 지나친 허례허식이었다. 기획자와 대표를 제외한 실무자들은 회의를 했고, 이건 좀 과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에따라 그 기획안을 축소하는 방향에서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점점 디데이가 다가왔다. 대표와 기획자가 포함된 카톡방이 갑자기 소란스럽다. 이건 되었느냐, 저건 누가 준비하고 있냐... 이건 생략하기로 했으며, 저건 00이 맡아서 하고 있노라, 그 외의 점검사항들도 공유했다. 디데이가 3일 정도 남았던가. 왜 이걸 생략하느냐, 이건 이정도는 준비해야한다, 저거 제대로 안 되고 있는 것 같다, 그래도 이건 해야한다... 몇 명의 사공이 제 자리의 노를 착착 저어가며 당일을 향해 나아갔는데, 별안간 뛰어든 사공들이 저마다의 방향으로 노를 젓기 시작한다. 


실무자들이 회의를 통해 정했던 간소화의 방향은 애당초 기획자의 의도에 따라 더이상 뭘 더 할 수 없을만큼의 기획으로 되돌아갔다. 실무자들은 안 그래도 외근과 밀린 일에 허덕이던 중이었는데, 해일을 만난 격이었다. 대표자와 기획자는 상근 인력이 아니라 만날 일이 없다. 상근을 하는 실무자들은 행사 당일에나 얼굴을 볼 사람들의 의견에 휘둘리느라 하청업체가 된 것 같다고 자조하기도 했다. 지나치게 관료적인 문화에 학을 떼다 온 곳이라 이런 일이 생긴 게 조금 당혹스러웠다. 그럼에도 내 생각에 동의되는 동료들이 있음은 분명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더 허탈했던 사건은 실무자간에 일어났다. 어쩌다보니 나는 기념품을 정하는 역할을 했다. 점심을 먹거나 함께 쉬는 시간을 가질때 어떤걸로 하면 좋겠느냐 의견을 나누었다. 몇날며칠을 얘기해도 결국 답은 수건뿐. 가성비나 실용성을 고려해서 여러 실무자들이 정리한 의견이다. 공식화하기 위해 실무자회의에서 운을 띄웠다. 이런저런 기념품들을 찾아서 고려해봤는데 가성비나 실용성, 의미 등을 살리기엔 수건만한게 없었노라고 했다. 상급자의 탄식. 좀 참신한거 없나? 좀 찾아봐주세요. 더 나은 대안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열심히 찾아봤다. 예산범위에도 맞아야하고, 날짜에 맞춰 물건이 나오기도해야한다. 빠듯한 시간안에 할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추려봤다. 수건, 소금, 수제청 정도. 상급자에게 보고를 했다. 결국 돌아온 답은 수건. 헛 수고를 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지만 뭐, 그럴 수 있다. 돌다리 두들겨 보고 건넌 셈.


그런데 내가 허탈했던 건 그 시간에 대한 게 아니다. 이 조직도 결국 가장 안전한 선택을 하는구나, 싶은거였다. 전에 있던 조직도 그랬다. 큰 행사를 앞두고 임원들은 항상 새로운 걸 주문했다. 좀 재밌고 참신한거 없나? 맨날 하던 거 말고 좀 새로운 걸 했으면 좋겠는데. 창의력을 좀 발휘해봐. 온갖 트렌디한것들, 신박한것들, 젊은 갬성의 것들을 의견으로 가져갔다. 그래봤자 하늘 아래 새로운 것 없다지만, 가능한 상상력의 범위에서 최대한 새로운 것들을 가져갔다. 그 새로운 아이템들이 인풋으로 들어가도 회의라는 지난한 프로세스를 거치고나면 아웃풋은 작년에 했던 것만 남았다. 이미 검증된 것들은 전혀 새롭지 않고, 검증되지 않은 것들은 위험해서 안된다. 새로운 아이디어들은 소거되고, 그 아이디어를 발굴하고 생각해내려 애쓴 노고는 제거되고, 열정은 소진된다. 


왜 그럼 애초에 사람들이 최대한 거부감 없고, 안정적으로 느낄만한 보수적인 선택을 하고싶다고 얘기하지 않는걸까? 결정권자들은 애초에 새로운 결정을 하지 못할 거면서, 본인이 그걸 모르지 않으면서, 왜 이번엔 다른 선택을 할 것처럼 얘기를 할까? 왜 실무자들이 헛된 희망을 품고 괜한 기대를 하게 만드는걸까.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그 사람은 말은 그렇게하지만, 결국 가장 안전한 결론을 내리게 될거야'라는 경험칙이 만들어진다. 하지만 그런 경험칙이 만들어질때쯤이면 경직된 조직의 문화에 상처받을만큼 받았을테고, 무력감에 지쳐 나가떨어진다. 새로움을 택하는 건 분명 용기가 필요하다. 새로운 걸 마주한 사람들의 반응이 마냥 좋을거라고 보장할 수가 없으니까. 낯설고 이질적인 시도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분명 있을 것이고, 평범한 선택을 했으면 굳이 마주하지 않았을 그 저항을 전면에서 맞게된다. 결코 쉬운일이 아니다. 


우리는 누구나 새로운 것들에 대한 열망과 비난받지 않을 안전한 선택을 해야한다는 강박을 가진다. 그럼 어쩔 수 없는걸까. 우린 가장 보통의, 평범하고도 무난한 선택만을 해야할까? 현상유지가 조직의 목표면 그래도 된다. 하지만 조직이 관성에 머무르지 않고 나아가기 위해선 새로운 결정을 해야만 한다. 시행착오를 겪을 수도 있고, 환영받을 수도 있고, 그건 예견할 수 없을테지만. 시행착오가 두려워 기성의 것들만 유지한다면 발전이 없는 조직이라는 것을 인정해야한다. 조직이 나아갈 방법이 명확한데 득은 탐나고 실은 회피하고자 그 선택을 외면한다면 결국 책임은 조직에게 돌아오지 않겠나. 최소한 도태되어 나가떨어지는 건 막아야한다. 적어도 발전을 꾀하는 조직이라면 새로운 시도를 지지하고, 그 낯섦에 대한 저항을 책임있게 마주해야한다. 그 용기에 대한 보상이 주어진다면 보람과 자긍심을 향유하면 되고, 행여 실패한다면 제대로 진단해서 나중에 더 나은 선택을 하면된다. 


관련영상: 놀이와 창의를 통한 새로운 사회변화활동(TED 강연)


비단 상사들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어떤 경우엔 자신과의 싸움이 되기도 하다. 새로운 것에 대한 지향과 저항이 맞닥뜨리는 순간 우린 어떻게 해야할까. 좀 더 용기내서 한 발 더 나갈지, 바람을 피해 한 걸음 물러날지 결국은 저마다의 선택에 달렸다. 누구도 등 떠밀 수 없고, 누구도 비난할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 인류는 새로운 것들을 창조하고 발견하며 진보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건 자명하다. 그래도 내가 처음이고 싶진 않아, 라는 생각이 든다면 기다리는 수 밖에. 누군가 앞서 비난받고 모진 바람을 정면으로 견딜때 손이라도 한 번 잡아주며 응원하는 수밖에. 그리고 그런 선택을 하기로했다면, 한 발 앞선 사람이 박수를 받는다고 해도 배아파하지 말자. High risk, High retu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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