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의 길 - 에필로그(Epilogue)
이른 아침
아침 미사에 참석한 후 다시금 오늘 할 계획에 대하여 고민하기 시작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의 여정이 끝났지만 오랜 뜀걸음 같은 이 코스에서 마지막 쿨다운 같은 시간을 갖고자 피스테라에 갔다.
순례자의 길 완주의 감동이 가득한 지금. 지금이 아니고서야 생에 피스테라를 방문할 일이 있을까 하는 의구심에서 시작된 결과였다.
과거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가 아닌 이 땅끝마을을 순례자의 길 시작지로 삼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이러나저러나 나 또한 이곳을 종착지 삼아 방문하고 여행하길 원했으며, 이미 만신창이가 된 발로는 더 이상 걸어갈 용기는 없었기에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이동하기로 한다.
버스를 타고 터미널까지는 어렵지 않게 도착을 하였다. 이후 창구에서 티켓을 발권하고 20분 정도 기다렸을까 버스 도착시간보다 15분 밖에 늦지 않았으며 이 정도면 선방한 듯하다.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알 것이다. 연착이 되지 않는 경우가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것을...
그렇게 버스를 타고 한 시간 조금 넘게 이동했고 도착해 보니 하늘에 구름이 가득했다.
안 그래도 요 근래 들어 태풍주의보가 연달아 있었고 과거 세상의 끝이라 불리던 이 피스테라 역시 좋지 않은 날씨였다.
때마침 비가 잠시 멎은 이 순간에 버스에 내리자마자 마을에 있는 알베르게에 방문해서 짐을 풀었고 우선적으로 순례자 사무실에 들렀다.
도착해서 보니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온 인원은 별도로 증명서가 발급되었으며 차량을 이용해 방문한 순례자는 도장만 찍어줬다.
아쉽지만 이 상황에서는 더 걷기 힘들었기에 버스를 타고 왔다고 말하고 순례자 여권에 스탬프만 받았다.
하필 내 앞에 인증서를 받은 순례자는 자전거를 타고 이 빗길을 뚫고 왔다는데 몰골만 봐도 이 길이 험난했음을 의심할 수 없었다.
비바람을 뚫어가며 자전거를 타고 왔다는 순례자를 보니 대단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비를 맞아 세탁기에 넣고 돌린 거 같은 너덜너덜해진 순례자여권과 땀인지 비인지 모를 정도로 젖어있는 저 모습을 보고 있자면 버스를 타고 왔다는 안도감과 저 순례자에 대한 경원감이 복합적으로 들었다.
짧은 대기로 인해 금세 도장을 발급받고 마을에 있는 식당에서 간단하게 이른 점심을 먹었고 바로 피스테라 등대까지 걷기로 한다.
구글맵으로 경로를 검색해 보니 3-4킬로 되는 거리로 나왔으며 이제 이 정도 거리면 가벼운 식 후 운동과 같았다.
적어도 이 길은 걷자 하며 버스를 타지 않고 걸었다.
그렇게 버스정류장을 지나쳐 1킬로쯤 걸었을까? 슬슬 비가 투둑투둑 내리기 시작한다.
혹시 몰라 챙겨 온 우비를 입고 마저 걷는데 빗방울은 점점 굵어지고 바람 또한 거세진다.
하필 옆으로 지나가는 버스는 나를 애처롭게 만들기 충분했다.
이미 돌아가긴 애매한 절반의 지점
변덕스러운 이 날씨에 달관했다는 듯 그냥 묵묵히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도착해서 보니 탁 트인 바다와 함께 멀리서 하얀 등대가 보인다.
가는 길목에 순례자의 길 비석이 보이며 0.00km라는 설레는 숫자가 명확히 보인다.
누군가는 이곳이 출발점이 되어 산티아고에 가고 누군가는 이 장소가 도착지점이 되는 양면적인 장소이다.
시작과 끝인 이곳을 기념하기 위해 사진을 찍고 등대에 가서 탁 트인 바다와 유명한 조각상을 찾았다.
강풍주의보가 내린 등대 주위는 비바람이 거세게 다가왔고 얼굴에 맞는 빗방울조차 따갑게 느껴졌다.
여기서부터는 우의에 의미가 없을 정도로 심하게 펄럭였으며 몸이 휘청거림이 느껴질 정도의 강품이 불었기에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다소 위험한 환경이었기에 빠르게 기념사진을 찍고 해안절벽을 벗어났다.
기념품가게 앞에는 강풍과 우천으로 인해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이 북새통이었으며 이 인파를 헤치고 버스를 탈 자신이 없었기에 다시 걸어서 내려가는 걸 선택하였다.
이미 맞아버린 비였기에 내려올 때도 비를 맞고 내려왔다.
그렇게 비 맞은 패잔병의 몰골으로 알베르게에 도착해 샤워를 하니 살 것만 같다.
그리고는 생장부터 피스테라까지의 완주소식을 어머니께 보이스톡을 걸어 간략하고 덤덤히 고했다.
기왕 간 거 너 스스로 배움이 있기를 바라며 마음속에 잘 간직하란 말과 함께 고생했다는 격려를 끝으로 통화는 짧게 끝났다.
나 또한 알게 모르게 이 길에서 배워가는 게 많았기에 논어 학이편에 나오는 학이시습지 불역열호(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기쁘지 아니한가)가 연상되는 조언은 여행 내내 마음에 남았다.
때마침 비는 그쳤고 가벼워진 마음에 순례자의 길 중간중간 경치 좋은 곳에서 식사를 할 때처럼 이곳에서도 그렇게 식사를 하기로 하고 바로 마트에 갔다.
외지라 그런지 평소 가던 과일가게들보다는 조금 상태는 아쉬웠지만 여전히 과일 가격들은 저렴했으며 항상 만만한 납작 복숭아와 라즈베리 그리고 통조림 문어와 구운 파프리카와 작은 트러플 그리고 화이트와인을 구매하였고 에코백에 담아 미리 봐둔 경치 좋은 곳을 향해 이동했다.
이동할 때까지는 날씨가 드문드문 햇빛이 비추는 맑음이었으나 자리를 펴고 식사를 하려니 아이러니하게도 빗방울이 점점 떨어지며 이내 굵은 빗줄기로 바뀐다.
차린게 아쉬워 자리에서 버티고 버티다 결국 잔에 따른 와인에서 비맛이 느껴질 때쯤 짐을 정리하고 철수하였다.
다시 돌아와서 샤워를 마치고 동네를 걷다 보니 다시금 허기가 진다.
아까 마트에서 샀던 빠에야와 맥주로 가볍게 저녁을 먹고서는 잠에 들었다.
이튿날
아침 일찍 일어나 다시 산티아고에 돌아갈 준비를 한다.
알베르게에서 빠르게 배낭을 싸고 나왔으며 산티아고행 버스정류장 맞은편 카페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가볍게 조식을 먹기로 한다.
카페에 들어와 주문을 마치고 밖을 내다보니 한적한 해안가의 마을어귀에서 어부로 보이는 중년의 남성이 보였으며, 카페 안에는 관광객들에 섞이지 않고 구석자리에서 커피 한잔과 신문을 보는 노년의 신사분이 포근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게 꽤나 이국적인 모습으로 다가온다.
주위를 둘러보니 동양인은 없었기에 나 홀로 이방인임을 느꼈는지 왠지 모를 거리감이 다가왔으나 그와 동시에 이국적임에 취하는 듯하였다.
약 4주간의 나의 행군이 마무리되는 장소.
카페에 머무르는 사람들에게서는 상기된 얼굴과 후련함이 묻어 나오는 듯하였다. 나 또한 그들 중 하나였으며 상기됨과 안도감을 느끼며 긴 호흡과 동시에 의자 등받이에 몸을 완전히 기대어본다.
고요한 아침
포근한 분위기의 아침 카페에서 이렇게 나의 순례자의 길 여정이 차분히 마무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