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독서 정리

그저 '일상을 살아내는' 사람들을 기억하며...

《기차의 꿈》 영화를 보고, 소설을 읽고 그리고 《폭삭》의 그들처럼...

by KEN

기록되지 않은 삶이라고 해서, 기억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는 아닐 터...


정년으로 모든 직책을 내려놓은 아내와 아침을 맞고, 함께 헬스장에서 땀을 흘리고, 다시 의복을 갖춰 입고 걸어서 집 근처 쌀국수집에서 점심을 먹습니다. 그리고는 그 주변의 수변공원을 돌아 다시 집으로 귀환하는 그저 평범한 일상...


그 소박한 일상 중에,

이제 태어난지 갓 보름을 넘긴 손녀딸 얘기며 날씨 얘기, 그리고 가끔 삶과 철학, 신앙에 대해 얘기를 건내며, 주변 사람들의 소소한 관심사를 나누는 그저 평범한 일상. 어쩌면 우리에게 있는 그런 평범함이 더 비범함은 아닐런지.


그렇게 평범한 행복을 그렇게도 갈망했던 한 남자의 고단한 삶을 그린 영화 《기차의 꿈》과 그 원작 소설을 읽으며, 다시금 그 '평범함'이 주는 감사의 의미를 생각합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하루가 사실은 가장 귀한 선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말입니다.


넷플릭스에서 스트리밍 중인 클린트 벤틀리 감독의 《기차의 꿈》은 그렇게 데니스 존슨의 소설을 영화화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보고 읽는 동안 줄곳 마음 한편이 아려왔던 건, 그렇게도 소망하던 일상이 무너진 그레이니어들이 어쩌면 너무나도 많았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들 때문이었습니다.


솔직히 말해 저는,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수많은 그레이니어들을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그들의 마음을 온전히 헤아린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시구절 몇 줄을 읽다 문득 울컥해지는 순간이 있을 뿐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우리 곁으로 슬픔이 착륙한다» _ 유병록

하늘 저편에서
네가 돌아오는 중이다


고도를 낮추고
활주로 미끄러져서

떠났던 곳으로
우리 곁으로
네가 도착할 것이다

너는 짐을 챙겨서
부지런히 걸어서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이다

여행 가방을 열면
우리를 위한 선물도
분명 들어 있을 것이다

선물이 비록 슬픔이어도
네가 주면 받아야지
기념품처럼 오래 간직해야지

고개 들어
하늘을 바라보면

저편에서
네가 계속 돌아오는 중이다

우리 여기 이렇게 마중 나왔으니


슬픔이 안전하게 착륙할 것이다

_ 제주항공 참사 1주기에 읊어진 추모시 중에서...


데니스 존슨의 소설 《기차의 꿈》과 클린트 벤틀리의 영화적 재해석에 관한 이야기



1.


21세기의 문턱에서 20세기 미국 서부를 되돌아보면, 우리는 흔히 산업화의 굉음과 정복의 신화가 떠오릅니다. 그러나 그 화려한 서사 뒤편에는 이름 없이 사라진 수많은 ‘보통 사람들’의 침묵과, 기차 레일 아래 묻힌 자연의 신음이 존재합니다.


바로 이 지점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작품이 《기차의 꿈》입니다. 미국의 데니스 존슨이 2011년에 발표한 이 중편소설과, 이를 2025년 스크린으로 옮긴 Train Dreams는 그렇게 발전의 서사 뒤에 감춰진 역사와 개인의 실존을 어떻게든 복원해 보려는 하나의 예술적 시도 아닐까 생각해 봤습니다.


영화와 소설 둘 다 주인공은 로버트 그레이니어입니다. 그는 결코 역사서사에서의 일반적인 영웅이 아닙니다. 그는 철도를 놓고, 나무를 베며, 역사의 거대한 수레바퀴 아래에서 묵묵히 살아간 한 사람의 노동자일 뿐입니다. 데니스 존슨은 불과 140쪽의 짧은 분량 속에 한 인간의 전 생애와 미국 서부의 흥망을 소위 미니어처식의 서사로 압축해 담아냈고, 클린트 벤틀리는 이를 빛과 침묵, 그리고 풍경이라는 영화적 언어로 보여주었습니다.


오늘 제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한 줄거리 비교만은 아닐겁니다. 이 작품이 이시대 관객과 독자에게 어떤 철학적 질문—즉 삶의 고독, 역사 속 개인의 자리, 자연과 인간의 관계—을 던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기차의 꿈은 단순히 과거의 역사를 회상하는 작품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삶을 되묻게 되는 현재진행형의 서사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2.

데니스 존슨의 원작 소설 《기차의 꿈》


자료를 찾아보니, 소설 《기차의 꿈》은 데니스 존슨의 문학적 이력에서 변곡점을 이루는 작품이라는 평가더군요. 2002년 "파리 리뷰(The Paris Review)" 여름호에 처음 발표되자마자 큰 반향을 일으켰고, 그해 '아가 칸 소설상'을 수상하며 작품성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는 평가입니다. 이후 2012년에는 퓰리처상 소설 부문 최종 후보(Finalist)에 오르며 문단의 중심에 다시 서게 되었답니다. 비록 그 해 수상작이 선정되지 않는 이례적 결정이 내려졌지만, 오히려 그 사건은 작품에 대한 논쟁과 관심을 폭발적으로 증폭시켰던 듯싶습니다.


《기차의 꿈》에서 그는 미국 서부의 역사, 자연의 장엄함을 다루면서도, 특유의 환상성과 간결하고 시적인 문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 비평가의 말처럼, 그레이니어의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빈 공간’이며, 독자는 그 공백을 인물과 함께 채워 나갑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존슨의 핵심을 봅니다. 기독교적 구원에 대한 갈망과 실존적 허무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던 그의 세계관이, 이 작품에서 가장 절제되고 정제된 형태로 드러난다는 것이죠. 그래서 《기차의 꿈》은 데니스 존슨 문학 전체를 응축해 보여주는 결정판이라는 평가를 받는 듯합니다.


잠시 소설의 서사구조를 요약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이 작품의 핵심은 한마디로 말해 비선형적 기억의 모자이크라고 어느 분이 쓰셨더군요. 공감이 됩니다.


소설의 배경은 20세기 초, 미국 아이다호와 워싱턴 주 접경의 아이다호 팬핸들 지역입니다. 주인공 로버트 그레이니어는 철도 노동자이자 벌목꾼, 짐마차꾼으로 살아가는 평범한 남성이지요. 그러나 그의 삶은 연대기적으로 정리되지 않습니다. 이야기는 기억이 떠오르듯, 이미지와 감정의 파편으로 전개됩니다. 이는 우리가 과거를 떠올릴 때 시간순이 아니라, 강렬한 장면 중심으로 재구성한다는 기억의 본질을 그대로 반영한 듯합니다.


1917년, 그레이니어는 동료들과 함께 중국인 노동자를 도둑으로 몰아 죽이려 합니다. 이 장면은 단순한 도입이 아니라, 서부 개척사에 내재된 인종적 폭력과 백인 노동자 계급의 불안을 응축한 죄의식의 기원입니다. 이후 그가 평생 느끼는 불안과 공포는 개인적 심리가 아니라, 시대적 업보로 제시됩니다.


이야기의 중심축은 역시 가족의 상실입니다. 산불로 인해 아내 글래디스와 딸 케이트가 흔적 없이 사라집니다.

그 상황을 예시라도 하듯, 수백년을 살아온 나무를 톱질로 베어내고 조용하던 숲에 나무 쓰러지는 소리가 울립니다.


"힘든 일이라 그래, 몸만이 아니라 영혼도 시달려
우린 여기서 500년을 산 나무들을 베어냈어

본인은 알아채지 못하더라도 영혼에 탈이 나…

세상은 얽히고 설켜 있어
실마리 하나를 당길 때마다 설계가 어떻게 무너질지 몰라

이 땅에서 우린 어린애에 불과해
신이라도 된 줄 알고
대관람차에서 볼트를 뽑아내지…

...

모든것은 연결되어 있어" _ 영화 대사 중에서


시신조차 확인되지 않는 이 죽음은 끝나지 않는 애도를 낳고, 그레이니어를 현실과 환상의 경계로 밀어 넣습니다. 그의 삶은 그 순간부터 ‘종결되지 않는 상실’ 위에서 지속됩니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늑대 소녀는 이 작품의 가장 상징적인 장면일 수 있습니다. 늑대와 함께 나타난 소녀를 그는 자신의 딸이라 확신하지만, 그녀는 다시 숲으로 사라집니다. 이 장면은 문명과 야생, 인간과 동물, 삶과 죽음의 경계가 무너지는 순간을 포착합니다. 그레이니어가 늑대와 함께 울부짖는 장면은, 그가 문명의 언어를 잃고 자연과 일체화되는 동시에 상실의 광기에 잠식되는 장면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종결적으로 그는 근대화의 목격자로 남습니다. 비행기, 전화기, 엘비스 프레슬리의 기차까지—20세기의 변화가 파편적으로 스쳐 지나가지만, 그는 언제나 역사의 주인공이 아니라 배경일뿐입니다. 1968년, 그의 죽음조차 계절이 바뀐 뒤에야 발견되지요.


결국 이 소설이 말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그레이니어는 자신의 삶을 말로 서술할 수 없는 사람이었지만, 바로 그 침묵과 흔적 없는 삶 자체가 하나의 역사였다는 것—이것이 《기차의 꿈》이 우리에게 건네는 서사적 통찰 아닐까 싶습니다.



3.

영화 《기차의 꿈》


영화로 옮겨진 《기차의 꿈》을 감상해 보겠습니다.

2025년 벽두에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영화 《기차의 꿈》은 클린트 벤틀리 감독과 그의 오랜 창작 파트너라는 그렉 퀘다라는 사람이 공동 각본을 맡아 완성했다고 전해집니다. 이 두 사람은 함께 작업해 온 작품들을 통해 소외된 남성들의 내면, 공동체의 윤리, 그리고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리얼리즘을 섬세하게 다뤄 온 작가주의 감독으로 평가받아 왔다는 평가들입니다.


감독과 극본가는 원작 소설의 느슨하고 파편적인 구조를 억지로 서사화하지 않습니다. 대신, 텍스트에 남아 있던 ‘여백’을 이미지와 침묵, 리듬으로 채우는 모양새입니다. 그래설까요. 아이다호와 워싱턴 주로 알려진 자연의 배경은 너무나도 아름답습니다.


영화는 보는 내내, 제게 이야기를 설명해 준다기보다, 마치 내가 그 세계 안에 머무르는 듯한 느낌을 주는 듯했습니다. 내 서재의 책상에 있는 5K 모니터를 통해 바로 눈앞에서 보이는 4:3 배율의 영상이어서 더 그런 느낌을 받았던 것이었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감독이 그려낸 영상은 충분히 몰입하기에 적당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발표된 지 며칠 되지 않았지만 특히 작품들에 대한 평가가 무척 흥미롭습니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원작 소설을 두고, "인간은 끝내 이해하지 못하는 꿈을 꾼다. 소설은 그 꿈이 지나간 자리, 설명되지 않은 삶의 잔상 위에 놓인다"라고 평하며 작품의 몽환적이고 실존적인 깊이를 언급했던 모양입니다. 또한 이동진은 그의 유튜브 《이동진의 빨간책방》 등을 통해 소설을 소개하면서 나름의 독자층이 형성된 듯합니다.


영화는 어땠을까요? 넷플릭스에 공개된 지 며칠 되지 않았습니다만 평점 9점짜리 작품이라는 평가가 뒤따르는 듯합니다. 특히 대사보다는 이미지와 분위기로 서사를 이끄는 방식이 나름의 팬층을 형성하고 좋은 리뷰를 만들어 내는데 강점으로 작용하나 봅니다. 물론 일부에서는 느린 호흡과 극적인 사건의 부재를 아쉬움으로 지적했지만, 다수의 관객은 이를 오히려 ‘힐링’과 ‘성찰’의 미덕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입니다.


"그러나 그 봄날
어디가 위인지 아래인지 감각이 사라졌던 그때
마침내 모든 것과 연결되었음을 느꼈다" _ 영화의 마지막 나레이션 대사 중에서
영화 《기차의 꿈》 영상 중에서


작품은 기저에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는 철학적 선언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과거에서 현재로 자연과 인간, 그리고 세상의 모든 것들이 서로 연결되어 작동하고 있음을 웅변합니다.


확실히《기차의 꿈》은 조용하지만 깊은 방식으로, 문학과 영화 양쪽에서 모두 천천히 스며드는 작품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정리하자면...


데니스 존슨의 소설 기차의 꿈과 클린트 벤틀리의 영화 기차의 꿈은 서로 다른 매체를 통해 같은 진실에 도달하는 모양새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이 본질적으로 미스터리이며, 우리는 끝내 우리 자신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는 웅변입니다.


소설은 생략과 압축으로 한 인간의 생을 승화시켰고, 영화는 빛과 풍경, 배우의 몸을 통해 그 신화를 감각의 현실로 되돌려 놓았습니다. 두 작품은 화려한 ‘아메리칸 드림’ 뒤편에 있었던 수많은 이름 없는 노동자들, 또 다른 로버트 그레이니어들을 조용히 증언합니다.


특히 영화는 가장 작은 삶조차 거대한 연결의 일부라는, 조용하지만 단단한 긍정을 남깁니다. 숲과 강과 기차의 소리가 하나로 겹쳐지는 마지막 장면은, 인간의 삶이 비록 찰나일지라도 그 울림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믿음을 우리에게 건넵니다.


그래서 2025년의 우리에게 《기차의 꿈》은 이렇게 다가옵니다.

잃어버린 느림, 침묵, 그리고 자연과의 교감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작품으로 말입니다.


당연하게도,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스러져 간 이땅의 많은 '일상인'들의 삶을 기억하며...

리뷰를 마칩니다.




<참고자료>

1. 소설 <기차의 꿈>, 데이스 존슨, 김승욱 역, 2025, 다산책방

2. 영화 <기차의 꿈>, 클린트 벤틀리 감독, 2026, 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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