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도서선정단 3-4차 대상 도서 독서 후기 및 평가
2년쯤 전의 일입니다. 남편의 알츠하이머 진단 이후, 두 발로 설 수 있을 때 떠나겠다는 남편의 뜻에 따라 스위스 디그니타스로 향한 동행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에이미 블룸(Amy Bloom)의 에세이, 《사랑을 담아》(In Love)였습니다. 당시 그 글을 읽으며, 생각보다는 심적으로 무척 힘들었던 기억이 또렷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한국 작가의 이야깁니다. 암으로 인한 고통을 끝내기 위해 스스로 스위스행을 결정한 엄마를 따라, 그 여정과 이후를 기록한 남유하의 《오늘이 내일이면 좋겠다》를 읽으면서는, 미리 예상했던 부담보다 훨씬 더 큰 심적 고통이 따랐던 듯합니다.
아무튼, 이제 그 책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읽는 동안 중간중간, 분명히 제 안의 에너지가 서서히 꺼져 가는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그럴 때면 작가처럼 책에서 인용한 이해인의 시를 다시 펼쳐 들었습니다. 혹시 그 시가, 이 무거운 읽기의 시간 속에서 제게도 작은 힘이 되어 주지 않을까 하는, 아주 소박한 희망을 품으면서 말입니다.
어떤 결심
이해인
마음이 많이 아플 때
꼭 하루씩만 살기로 했다
몸이 많이 아플 때
꼭 한순간씩만 살기로 했다
고마운 것만 기억하고
사랑한 일만 떠올리며
어떤 경우에도
남의 탓을 안 하기로 했다
고요히 나 자신만
들여다보기로 했다
내게 주어진 하루만이
전 생애라고 생각하니
저만치서 행복이
웃으며 걸어왔다
_ 책의 133쪽 중에서
남유하 에세이 ⟪오늘이 내일이면 좋겠다⟫
0.
죽음의 자기 결정권에 관해서.
죽음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그것은 늘 가장 확실한 미래이면서도 동시에 가장 알 수 없는 사건이라는 모순으로 다가옵니다. 한국 문학, 특히 에세이에서 죽음은 대개 투병의 고통이나 남겨진 이들의 애도, 혹은 삶의 허무를 말하는 방식으로 서술되어 왔지요.
그런데 ⟪오늘이 내일이면 좋겠다⟫를 읽으며 저는 전혀 다른 결의 이야기를 만났습니다. 장르 소설가로 활동해 온 남유하는 이 에세이에서, 수동적으로 맞이하는 죽음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고 준비하는 ‘자기 주도적 죽음’을 정면으로 다룹니다.
이 책은 그의 엄마, 故 조순복 씨가 스위스의 디그니타스에서 조력 사망을 선택하기까지의 과정을 기록한 개인적이면서도 낯선 증언입니다. 이 글은 흔히 말하는 임종기나 투병기가 아니라, 죽음을 삶의 마지막 결정으로 사유하려는 한 가족의 기록입니다. 이 텍스트는 분명하게, 그간 우리가 익숙하게 소비해 온 ‘죽음 이야기’의 문법을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흔들고 있음을 느낍니다.
1.
이 에세이를 읽으며 느낀 가장 인상적인 지점은, 화자—남유하—가 결코 단순한 관찰자로 머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엄마의 죽음을 돕는 공모자이자, 그 전 과정을 기록하는 서기이고, 동시에 남겨진 자로서 상주의 자리를 감당하는 인물이기도 하지요. 이 복수의 역할이 한 사람 안에 겹쳐 있다는 점이, 이 텍스트를 쉽게 감상적인 이야기로 흘러가지 않게 붙잡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릅니다.
작가는 감정을 과잉으로 밀어 올리기보다, 의도적으로 건조한 문체를 유지하려 애씁니다. 그래설까요 그 절제된 태도가 오히려 엄마가 보여주었던 “단호하고 가차 없는” 삶의 태도와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마음에 남는 대목은, 작가가 엄마를 “객관적인 편집자처럼 내 글을 읽어주던 독자”로 회상하는 장면입니다. 죽음이나 혹한 이야기조차 기꺼이 즐겨 읽어주고, 딸의 세계관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던 엄마. 이 관계를 보고 있자니, 이 에세이는 단순한 효심의 기록이라기보다 동지적 유대감에 기반한 하나의 공동 작업이었다는 느낌입니다.
엄마는 자신의 죽음을 다큐멘터리와 책으로 남기기를 원했고, 딸은 그 유지를 받아 이 책 ⟪오늘이 내일이면 좋겠다⟫를 완성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죽음을 다룬 에세이이면서 동시에, 모녀가 함께 수행한 마지막 창작 행위—말 그대로 인생의 마지막 공동 프로젝트였던 겁니다.
2.
《오늘이 내일이면 좋겠다》라는 제목을 곱씹다 보면, 저는 그 문장이 결코 평범한 희망의 표현이 아니라는 걸 곧 깨닫게 됩니다. 이 말은 스위스 취리히의 호텔에서 엄마 조순복 씨가 내뱉은 말이었다고 합니다. 겉으로는 “내일이 오면 좋겠다”는 소망처럼 들리지만, 그 ‘내일’이 의미하는 것은 미래의 삶이 아니라 예정된 죽음의 날이었던 겁니다.
보통 시한부 환자에게 내일은 하루라도 더 살고 싶은 희망의 시간일 텐데, 이 텍스트에서 상황은 전복됩니다. 엄마에게 ‘오늘’은 통증과 구토, 어떤 진통제로도 제어되지 않는 육체의 붕괴가 반복되는 시간이었던 겁니다. 지속되는 것 자체가 고문인 현재, 그래서 오늘은 그저 빨리 지나가야 할 시간일 뿐이었지요.
반대로 ‘내일’은 죽음이 예정된 날입니다. 소멸의 순간이자, 더 이상 고통이 존재하지 않는 시간.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간절히 도달하고 싶은 목적지이자 안식의 자리입니다. 이 지점에서 고통이 인간의 시간 감각을 어떻게 완전히 뒤틀어 놓을 수 있는지를 또렷하게 목도하게 됩니다.
이 한 문장은, 생명 연장을 선으로, 죽음을 악으로 규정해 온 익숙한 생명윤리를 조용히 전복합니다. 이 제목을 통해 작가는 엄마에게 삶이 더 이상 축복이 아니라 견뎌야 할 형벌이 되었고, 죽음만이 그 형벌을 끝내는 유일한 구원이었다는 사실을 독자에게 각인시킵니다. 그래서 이 말은 희망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재구성된 가장 비극적인—그러나 가장 정직한—소망처럼 제게 남는 것입니다.
—
이 텍스트가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말기 암 환자의 육체적 붕괴를 결코 미화하지 않고 끝까지 직시한다는 점입니다. 온몸으로 번진 암세포가 만들어내는 통증과, 더 이상 자신의 몸을 통제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서사 전체를 지배합니다. 그런데도 엄마는 그 패배한 육체 속에서, 정신의 존엄만큼은 끝까지 놓지 않으려 애씁니다.
가장 먼저 드러나는 것은 미학적 존엄입니다. “죽으면 입을 벌리고 있다는데, 나는 입을 다물고 있게 해 달라”는 엄마의 부탁은 사소해 보이지만, 죽음의 순간까지도 ‘나’로 남고 싶다는 강렬한 자의식의 표현처럼 다가옵니다. 마지막 장면조차 스스로 선택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더 깊게 다가오는 것은 수행적 존엄입니다. 디그니타스의 규정에 따라, 환자는 타인의 손이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약물을 복용해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숟가락을 들 기력조차 남지 않은 상태에서도, 엄마는 마지막 남은 힘을 끌어모아 스스로 죽음을 실행합니다. 그 행위는 죽음 이전의 마지막 선택이자, 마지막 주체적 행동이었던 겁니다.
이 지점에서 저는 이 책이 말하는 ‘존엄’의 의미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존엄은 누군가가 부여해 주는 상태가 아니라, 스스로 쟁취하는 태도라는 것. 그래서 작가는 엄마를, 누구보다 삶을 사랑했고, 고통 속에서도 웃었으며, 암과 함께 살아보려 했고, 끝내 고통을 멈출 시점을 스스로 결정한 용감한 사람으로 기억하는 겁니다.
결국 이 죽음의 선택은 삶을 포기한 결과가 아니라, 삶이 비참해지지 않도록 마지막 순간을 치열하게 디자인한 선택이었습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오늘이 내일이면 좋겠다⟫가 단순한 죽음의 기록이 아니라, 끝까지 인간으로 남고자 한 한 사람의 윤리적 초상이었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던 겁니다.
3.
이 에세이를 읽어가 보니, 이 이야기가 결국 공간의 이동에 관한 기록이라는 생각에 이릅니다. 서울에서 취리히까지의 8,770km는 단순한 거리 이동이 아니라, 죽음이 금기인 사회에서 죽음이 권리로 인정되는 사회로의 망명처럼 느껴집니다.
한국에서 말기 암 환자가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은 대개 병원 침상입니다. 콧줄과 기계에 의존한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시간만이 끝없이 늘어지는 장소인 것입니다. 그 시간은 환자에게도, 가족에게도 고통의 연장선상입니다. 반면 스위스의 디그니타스는 스스로 죽음을 택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함으로써, 환자를 다시 주체적인 인간으로 세워 놓습니다. 작가가 아픈 몸의 엄마를 이끌고 비행기에 오르는 과정을 집요하게 묘사하는 이유도, 이 여정이 존엄을 지키기 위한 절박한 탈출이었기 때문이었던 겁니다.
특히 디그니타스의 블루하우스. 그곳은 현실 안에 존재하지만, 생존과 연명의 규칙이 멈추고 죽음의 질서가 작동하는 다른 공간이죠. 그곳에서 엄마가 보낸 마지막 시간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평화롭고 생동감 있게 그려집니다. 고통을 끝낼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긴 순간, 오히려 삶을 지탱할 희망이 되살아난다는 역설 말입니다. 죽음의 가능성이 삶의 질을 높인다는 통찰이, 스위스의 오솔길과 블루하우스의 풍경 속에 조용히 스며 있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는 또 하나의 불편한 질문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스위스로의 조력 사망은 막대한 비용과 복잡한 절차, 최소한의 체력을 전제로 합니다. 작가의 사회경제적 자본과 정보력이 엄마의 선택을 가능하게 했다는 사실 역시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돈과 정보가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요. 대다수의 한국 사회 구성원에게 스위스행은 애초에 선택지가 되지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 ⟪오늘이 내일이면 좋겠다⟫를, 한 개인의 특별한 죽음에 관한 기록으로만 읽을 수 없었던 겁니다. 이 책은 조력 존엄사 논의가 윤리의 문제를 넘어, 의료 불평등과 계급의 문제로까지 확장되어야 한다는 질문을 우리 사회에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놓아두고 있는 것입니다.
4.
한국의 법과 통념 안에서 엄마의 선택은 자칫 자살이나 자살 방조로 불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작가는 단호하게 다른 이름을 붙입니다. 그것은 ‘존엄사’, 혹은 ‘의료 조력 사망’이라는 것입니다. 이 명명은 단순한 말 바꾸기가 아니라, 행위의 의미를 끝까지 지켜내려는 윤리적 선언처럼 느껴집니다.
작가는 엄마의 죽음이 생명을 가볍게 여긴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생명을 존중했기 때문에 내린 결단이었다고 거듭 웅변합니다. 고통 속에 방치되어 인간으로서의 존엄이 무너지는 것을 막는 것이야말로, 생명에 대한 예의라는 주장이지요. 그렇게 이 텍스트는 생명의 신성함보다 삶의 질이 우선될 수 있는가라는 생명윤리의 오래된 질문을, 추상적 논쟁이 아니라 한 사람의 서사로 우리 앞에 내놓습니다.
2026년 현재 한국의 연명의료결정법은 무의미한 연명을 중단하는 데까지만 허용할 뿐, 의식이 또렷한 말기 환자가 적극적으로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여전히 닫혀 있는 듯합니다. 바로 이 법적 공백이, 이 책을 개인적 기록을 넘어 사회적 텍스트로 만드는 모양샙니다.
작가는 엄마의 죽음을 사적인 비극으로 봉인하지 않습니다. 다큐멘터리 제작에 협조하고, 책을 출간함으로써 이 문제를 공적 담론의 장으로 끌어올립니다. 그래서 이 에세이는, 누군가의 말처럼 ‘하얀 가운의 신에게서 권력을 되찾아오는 투쟁기’로 읽혔던 겁니다. 생사의 결정권을 의학과 제도의 독점에서 떼어내, 환자 자신에게 돌려주려는 시도 말입니다.
결국 이 책은 한국 사회를 향해 조용하지만 날카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왜 우리는 고통받는 이들에게, 죽음조차 선택할 권리를 허락하지 않는가라고 말입니다.
작가는 언젠가 자신과 같은 사람들이 스위스가 아니라 이 땅에서, 가족의 배웅을 받으며 편안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기를 바라며 이 기록을 남겼다고 기록합니다. 그래서 이 책은 애도가 아니라, 아직 끝나지 않은 질문처럼 우리 앞에 남는 것이겠지요.
5.
엄마가 떠난 뒤에도, 딸의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흘러갑니다. 이 에세이에서 작가는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곧 삶을 생각하는 일”이라고 말하며, 엄마의 부재 속에서 자신의 삶을 다시 정렬해 나갑니다. 스위스에서 돌아온 이후 찾아온 상실과 그리움, 그리고 설명하기 어려운 안도감이 뒤섞인 감정들은, 말하자면 하나의 죽음 전환기처럼 느껴졌습니다.
이때 글쓰기는 작가에게 애도의 의식이 됩니다. 엄마를 부르고, 그녀의 선택과 용기를 기록하는 행위 속에서, 엄마는 텍스트 안에서 다시 숨을 쉽니다. “엄마의 이름을 불러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라는 문장은, 이 책이 정보를 전달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독자를 증인으로 초대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읽는 이들은 자연스럽게 조순복이라는 한 인간의 삶과 죽음을 기억하는 공동의 애도자가 됩니다.
작가는 개인의 슬픔을 넘어, 인간의 삶을 더 넓은 시야에서 바라봅니다. 어떤 서평들이 말하듯, 이 책은 인간의 역사를 반딧불이의 찰나 같은 빛에 비유하게 만듭니다. 윤동주의 시 〈반딧불〉이나 반딧불이의 묘를 떠올리게 하는 이 메타포는, 생명의 유한함을 비극이 아니라 서정으로 받아들이게 합니다.
사인해 주세요. 촬영을 마친 P 피디가 엄마에게 말했다. 자신이 손으로 쓴 엽서를 엄마에게 주었다. 엄마는 피디의 엽서를 읽다가 울었다. 뒷면에 쓴 윤동주의 「반딧불」이란 시도 소리 내어 읽었다.
반딧불
윤동주
가자 가자 가자
숲으로 가자
달 조각을 주우러
숲으로 가자.
그믐밤 반딧불은
부서진 달 조각,
가자 가자 가자
숲으로 가자
달 조각을 주우러
숲으로 가자.
_ 책 145-146쪽에서
마지막으로, 엄마의 유해가 스위스의 숲에 뿌려지는 장면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습니다. 병원의 차가운 영안실이나 납골당이 아니라, 숲과 바람 속으로 돌아가는 선택. 그것은 인간이 자연으로 회귀하는 가장 평온한 결말처럼 보입니다. 흙으로, 바람으로 스며들며 얻는 안식. 그 장면을 통해 작가는 죽음이 삶의 종착역이 아니라, 삶이라는 강의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맞이하는 하나의 과정임을 조용히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6.
결국 《오늘이 내일이면 좋겠다》를 덮으며 저는, 이 책이 한국 사회가 오래 붙들어 온 죽음에 대한 통념에 분명한 균열을 냈다는 생각을 합니다. 죽음을 패배나 금기로만 다뤄 온 사회에서, 작가는 엄마와의 스위스 동행을 통해 말합니다. 모든 죽음은 존엄하다는 말이 참이 되기 위해서는, 개인의 용기만이 아니라 사회적 합의와 제도가 함께 가야 한다고 말입니다.
책은 엄마 조순복이 딸에게 남긴 마지막 유산이자, 죽음을 앞에 둔 모든 이들에게 건네는 위로와 연대의 편지처럼 느껴집니다. 읽고 난 뒤, 죽음은 더 이상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삶의 마지막 문장을 완성하는 마침표라는 생각이 조용히 자리 잡습니다.
찬란한 오늘을 살라는 작가의 마지막 당부는, 죽음을 정면으로 목격한 사람만이 건넬 수 있는 가장 진실한 축복일 것입니다. 따라서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죽음을 배우면서 역설적으로 삶을 더 깊이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될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맺으며...
상담을 하는 아내가 곁에 있다 보니, 가끔 이런 말을 듣곤 합니다. “애도작업이 제대로 되어야 해.” 사랑하는 누군가를 떠나보낼 때야말로 그 애도작업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뜻이겠지요. 잘 헤어졌는가의 여부가, 결국 남겨진 사람의 지금과 앞으로의 삶의 질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말일 겁니다.
책 속에서도 작가는 스위스에서 돌아온 뒤, 아직 어머니를 온전히 떠나보내지 못한 자신의 상태를 기록합니다. 그 과정에서 병원을 찾고, 그곳에서 ‘애도작업의 필요성’을 상담받게 되지요. 장례식을 치르지 못했던 사실이, 결국 애도가 충분히 완결되지 못한 이유로 제시되는 대목에서는 쉽게 고개를 끄덕여졌습니다. 애도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과 의식, 그리고 사회적 형식을 필요로 하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다시 생각나게 했습니다.
—
이 책을 곱씹다 보니, 이 텍스트가 죽음에 관한 이야기이면서도 역설적으로 가장 강력한 삶의 지침을 얘기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엄마 조복순 씨가 보여준 태도는 분명합니다. 죽음의 방식까지 스스로 결정함으로써, 삶의 통제권을 마지막 순간까지 놓지 않았다는 것. 그 선택은 우리에게, 우리 사회에게 묵직한 질문을 남깁니다. "나는 내 삶을 어떻게 마무리할 것인가"라는 질문 말입니다.
아울러 한국 사회가 맞이한 초고령화의 현실 속에서, ‘죽을 권리’를 둘러싼 법과 제도는 과연 어디까지 와 있는가를 또한 묻습니다.
점차, 가까와지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답해야 할 때 아닌가 싶습니다.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적 합의에 따른 제도적 보완까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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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우리 시민들이 함께 읽고 생각하고 고민해 봐야 할 책이라는 판단입니다.
적극 추천해야 할 듯합니다.
문학적 혹은 서술적 문체 등등에 앞서, 우선은 주제가 주는 함의가 크다는 생각에섭니다.
[참고]
◻︎ 선정을 위한 (임시) 도서평가점수 = 96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