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인문학 서적) 원전에 문제가 있었을지도...
학습을 위해 집어든 여러 인문학적 서적들을 읽을라치면 언제나(대부분) 맞닥뜨리는 문제가 있다.
어느 경우에는 문단 전체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정리가 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문해력 문제인지 아니면 선이해의 폭과 깊이가 너무 좁고 얕음에 기인한 것인지 좌절했다가도 그 문장들을 해체하여 재구조화 해보면 그다지 어렵지 않은 내용이었다는 것에 허탈해지기 일쑤이다. 물론 저자의 문제일 수도 혹은 번역자의 문제일 수도 있다는 말이겠다.
요즈음 읽고 있는 책의 경우에서도 위와 유사한 어려움에 빠진 적이 있다. 예문을 보자
가다머와 리쾨르를 포함해 철학적 해석학에 대한 대부분의 저술들이 취한 통상적 접근을 보면, 이들은 해석학을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1650)의 합리론과 데이비드 흄(David Hume, 1711-1776)의 경험론과 대체로 대립하는 것으로, 또는 이들과 상당한 간극을 가지는 것으로 파악함을 알 수 있다. 즉 해석학은 그 정신과 관점에 있어서 세속적 계몽주의의 합리론과 그것을 계승한 자연과학 즉 모든 인문적 지식을 통제하는 모형으로서의 자연과학의 신성화로부터 아주 멀리 벗어났다고 보고 있다. 우리는 철학적 해석학(또는 해석학적 철학)과, 이것보다 더 전통적인 방식으로 실행된 철학사이에 존재하는 몇 가지 특징적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확인할 수 있다.
1.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바와 같이 해석학적 탐구의 과정에는 합리적 차원이 남아 있는 반면, 한층 더 창조적인 해석학의 차원은 개방성을 가지고 경청하려고 하는 청자나 독자의 수용성에 더 근본적으로 의존한다. 민감한 감수성을 통해 우리가 이해하고자 추구하는 바를 느끼고 전유하는 행위가, 지각과 사유와 지식의 “대상”을 면밀하게 검토하는 전통적 방법보다 더 우선권을 가지는 것이다. 이런 "경청"의 차원은 더 이성적이고 인지적인 “설명”과 대조되는 “이해” 과정의 일부로서 기술된다. 제임스 로빈슨(James Robinson)을 위시한 몇몇 해석학자들은 이런 원리를 인식론이나 지식 이론에 내재하고 있던 “전통적 흐름의 전복”으로 본다. 데카르트의 합리론과 여타 합리론 철학자들에게 인간 자아는 능동적 주체로서, 인식하려 하는 수동적 대상을 세밀하게 검토하고 반성한다. 반면 해석학에서는 대부분의 경우 텍스트 자체(또는 누군가가 이해하려고 하는 것)가 실제적으로 능동적 주체로 작동한다. 즉 이 텍스트라는 능동적 주체가 탐구의 대상으로서의 인간 탐구자를 들추어내고 그에게 질문을 건네는 것이다.
에른스트 푹스(앞에 나왔던 상호적 이해 개념을 강조했다)는 이렇게 주장한다. "우리가 텍스트를 번역하기 전에 텍스트가 우리를 번역해야 한다." 해석자는 자연과학자나 경험론자가 서 있다고 가정되는 위치와 유사한 지위에 있는 중립적 관찰자가 아니다. 완전한 의미에서 이해는 참여(engagement)와 자기 개입(self-involvement)을 요구한다. 슐라이어마허와 딜타이에서 연원 하여 불트만과 푹스 같은 성경학자들에 의해 발전했으며 20세기 후반, 가다머와 리쾨르라는 위대한 해석학의 전형을 통해 가장 충실하게 드러난 현대 해석학의 주창자들은 대체로 이런 견해를 지지하고 있다.
위 문장이 포함된 전체 내용을 아마도 족히 대여섯 번은 읽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리가 되지 않아 나름 나의 방식으로 문장을 해체하여 재정리해 봤다.
저자가 주장하고 논증하고자 하는 바와 나의 읽기 방식에서 차이가 있을 수 있겠으나, 원문과 나의 재구조화 방식에서는 내용의 이해와 머릿속에 정리되어 기억되는 내용에는 그 차이가 매우 크다는 생각이다.
위의 원문 문장은 나로서는 도저히 기억하기 어렵다. 그 문장을 읽고 또 읽은 후에 아래의 방식으로 머릿속에 정리된 후에야 기억될 수 있다는 말이다. 글쓰기를 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정도의 최소한의 독자를 위한 서비스는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물론, 위의 이야기는 나에게도 해당되는 말일 것이다.
커버 이미지 : 이응노 화백의 군상, 1988, 한지에 수묵, 69.5×1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