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읽는 건, 되풀이되는 위협의 방지이자 앞으로 나아가고자 함이다.
과거의 경험을 현재와 미래의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고사로, 중국 한나라 초 정치사상가였던 가의(賈誼)가 쓴 신서(新書)에 나오는 “前事不忘 後事之師”(전사불망 후사지사)가 전해집니다.
평온함의 일상이 무너진 요즘입니다. 어떻게든 마음을 다잡고자 자꾸만 흩어지는 생각을 붙들어 읽기 시작한 것들이 있습니다. 그 첫 번째는 <동학농민혁명 시기 공주전투 연구>(정선원)였고, 두 번째는 광주 5월 민중항쟁의 기록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광주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이고, 셋째는 <6월 민주항쟁 전개와 의의>(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한국민주주의연구소)입니다. 12월 3일 이후 시민들의 보여준 혁명적 시민행동의 근원이 이들의 정신과 연결되는 지점이 있겠습니다.
그중에서 특히 광주 5월 민중항쟁의 기록을 반추해 볼 때, 만약 윤석열 일당 그들이 획책했던 대로 친위 쿠데타인 반란이 성공했었다면 우리의 민주주의가 어떻게 무너질지 그리고 우리들의 일상이 어찌 굴곡지게 되었을지가 끔찍한 모습으로 그려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아울러 점차 밝혀지고 있는 윤정권과 그 반란세력들이 어떤 방식으로 우리의 민주주의를 찬탈하여 군부와 더불어 영구집권하려 획책했었는지가 또한 유추됩니다.
이 시점에 생각해 보고자 했던 것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자력(自力)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힘을 결집하여 민주주의를 지키고 국가 안위를 지켜내지 못한다면, 결코 내일을 기약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반면교사를 삼아야 할 사례가 광주항쟁의 시기에 벌어집니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에 그 일단이 그려집니다. 우리의 전시작전권을 실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미국(구체적으로는 한미연합사령관이 전시작전통제권을 가지고 있음)의 태도와 유사시 행동의 근간에 무엇이 작동할 것인가를 그려볼 수 있는 사례입니다.
만약 이번 윤석열의 친위쿠데타가 성공했었더라면, 지금과 같은 목소리를 미국이 계속 내어 주었을지는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볼 때 비관적입니다. 광주항쟁의 기록에 의하면 12•12 군사반란 이후의 미국의 정치적 판단과 행동이 아주 명료하게 그려집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성공 가능성이 큰 쪽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행동합니다. 그것이 불법적 쿠데타일지라도 말입니다. 1980년 5월 7일 자 미국의 비밀전문과 5월 17일의 주한미대사와 관련한 미국비밀외교문서에 나타난 사례를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되겠습니다.
미국, 병력이동에 동의하다. (1980년 5월 7~8일, 미국 측 비밀전문에 나타난 내용을 중심으로)
5월 7일 워싱턴의 '체로키팀'에 한국으로부터 비밀 전문이 도착했다. 글라이스턴 주한 미 대사가 백악관에 보낸 전문의 제목은 '한국정부, 특전사 부대를 이동하다'였다. 신군부가 학생시위로 인한 우발적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2개 공수여단을 서울과 김포공항 지역으로 이동시킨다'는 사실을 주한미군 지휘관들에게 알려온 것이다. 12•12사태 이후 잠잠하던 군부대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신호였다. 주한미군 사령부와 미 대사관은 한국군 부대와 북한군의 움직임을 투명하게 들여다 보고 있었다." 비밀 전문은 한국 군부가 "5월 15일까지 계엄령이 해제되지 않으면 캠퍼스 밖으로 나와 시위를 벌이겠다는 대학생들의 선언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전했다. 또한 해병 1사단이 연합사의 작전통제권 아래 있으므로 병력이동에는 "미군 당국의 사전 승인이 필요하다"는 점을 상기시키면서, "한국 군부로부터 해병대 병력 이동에 대한 요청은 아직 없지만, 만일 그런 요청이 오면 미군 사령부는 동의할 것”이라고 했다.
7일 자의 또 다른 전문에서 글라이스틴은 "(전두환과-인용자) 대화하면서 어느 구석에서도 법과 질서 유지를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면, 한국정부가 군대를 투입해 경찰력을 강화하려는 비상계획을 미국정부가 반대한다는 암시를 주지 않을 것이다. 만약 내가 어떤 불만이라도 내보인다면 우리는 아마도 시민과 군부 지도자 내에서 우리의 친구를 모두 잃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고 자신의 판단을 전했다.
5월 8일 워런 크리스토퍼 국무차관이 곧바로 답신을 보내왔다.
"우리(미국정부-인용자)는 법과 질서 유지를 위한 한국정부의 비상계획에 반대해서는 안된다는 데 동의한다."
5월 9일 글라이스틴은 전두환을 만나 미국정부의 이런 뜻을 전했다. 글라이스틴은 외교관 특유의 우회적인 표현을 하였지만, 그 핵심은 '미국은 시위진압을 위한 군대 동원을 반대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또 다른 기록을 살펴봅니다.
정부 측 동향 (1980년 5월 18일, 미국 측 비밀외교문서에 나타난 내용을 중심으로)
18일 오후 4시 30분 최규하 대통령은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와 관련하여 대통령 특별성명을 발표했다. "국가를 보위하고 3700만 국민의 생존권을 수호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했다"고 하였다. 이 특별성명은 이날 오전 보안사에서 만들어준 초안을 기초로 청와대가 가다듬은 것이었다."
이날 새벽 1시 45분 국회가 계엄군에 의해 봉쇄됐다. 수도군단인 33사단 101연대 1대대 3중대가 국회의사당을 점령하고 국회의원들의 출입을 막았다. '포고령 10호'는 국회 활동을 정지시켰다. 18일 오전 10시 40분 계엄사 보도처는 22개 언론사 편집부장들을 불러 보도검열지침을 통보하였다.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18일 오전 8시 30분부터 계엄처 주관 계엄회의를 주재했다. 보안사, 중앙정보부, 치안본부, 내무부 등 치안관계자 모두가 참석하여 주요 현안을 보고하고 점검하는 회의였다." 이 회의에서 국가적 위기상황을 국민들에게 홍보하여 군이 나서서 사회질서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를 확산시키라고 지시했다.
오전 11시 30분부터 12시 55분까지 계엄사령관은 사무실에서 글라이스틴 주한 미 대사와 한미연합사령부 참모장을 접견했다. 글라이스틴은 "미국은 법과 질서를 유지하려는 한국정부의 노력에 반대하지 않는다" 며 계엄확대 조치에 대해 원칙적인 동의를 표명했다. 존 위컴 한미연합사 사령관은 18일 오후 5시 미국에서 급히 한국으로 돌아왔다. 위컴 사령관은 5월 14일 한반도 주변정세 등을 워싱턴 당국과 협의하기 위해 잠시 미국으로 갔었다. 당초 27일 돌아올 예정이었으나 사태가 심상치 않다고 판단한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대사의 요청으로 서둘러 한국에 돌아왔다.
이 문서에서 주목되는 대목이 있습니다. 미국의 태도 및 원칙과 관련한 아주 중요한 단서로 보입니다.
"(전두환과-인용자) 대화하면서 어느 구석에서도 법과 질서 유지를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면, 한국정부가 군대를 투입해 경찰력을 강화하려는 비상계획을 미국정부가 반대한다는 암시를 주지 않을 것이다. 만약 내가 어떤 불만이라도 내보인다면 우리는 아마도 시민과 군부 지도자 내에서 우리의 친구를 모두 잃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5월7일, 글라이스틴 대사)
"우리(미국정부-인용자)는 법과 질서 유지를 위한 한국정부의 비상계획에 반대해서는 안된다는 데 동의한다." (5월8일, 크리스토퍼 국무차관)
"미국은 법과 질서를 유지하려는 한국정부의 노력에 반대하지 않는다"며 계엄확대 조치에 대해 원칙적인 동의를 표명했다. (5월18일, 글라이스틴 대사)
당시 주한 미국대사와 국무부 차관의 말입니다.
어쩌면 (완전하게 저의 주관적 생각입니다만) 윤석열과 쿠데타 세력은 미국의 이런 태도를 기대하고(혹은 믿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각만으로도 끔찍하고 참담합니다만, 역사가 그렇게 기술하고 있으니 어쩌겠습니까?
수없이 많은 기록에서 나타나고 있고, 국회의장 및 야당국회의원 등의 회견등을 통해서도 나타났습니다만, 만약 12월 4일 새벽에 국회에서 비상계엄 해제요구 결의안이 통과되지 않았다면, 그 일이 가능하도록 그 밤에 시민들이 나서지 않았다면, 일부 계엄군들이 주춤거리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까를 생각해 보면 말 그대로 이 땅에 또 한 번의 지옥도가 그려졌을 것이라는 예상을 하고도 남습니다.
아직도 반란은 계속되고 있다는 증거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오로지 믿을 것은 우리의 시민의식이고 민주주의를 지키고자 하는 열망뿐일 것입니다. 더불어 이번기회를 빌어서라도 결단코 불법적 정권 찬탈 행위가 다시는 반복되지 못하도록 철저한 제도적 보완도 완비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지지하고 후원할 것이고, 또한 감시할 것입니다.
“前事不忘 後事之師”(전사불망 후사지사)
과거의 경험을 현재와 미래의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는 이 고사는, 반란을 획책한 세력에 의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 시대, 이 땅에서도 꼭 염두에 두고 고려해야 할 교훈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참고)
12•3 내외란 이후에 나온 미국의 반응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