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돌.

by 갑자기 흰수염

충돌.


성 안 사람들은 공포로 얼어붙었다. 성벽에 선 이들은 수십 명의 병사를 제외하고는 노인과 소년이 전부였다. 손과 발이 오들거리는 겨울이었지만 이들의 몸은 성 밖 어둠 속에 있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휩싸였다. 입 밖으로 새어 나오는 입김은 공포를 더욱 짙게 만들었다. 초라한 횃불은 이들의 얼어붙은 눈동자만 빛나게 할 뿐이었다. 침묵보다 더 깊은 적막이 성 밖을 감싸고 어둠은 점점 성과 가까워졌다. 작은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 소리에도 눈과 귀가 요동치며 흔들렸다. 녹슨 칼과 부러진 창을 잡아내고 있는 손들이 더욱 덜덜거렸다.


진욱이 조급한 걸음으로 문밖을 서성거렸다. 성주가 문을 걸어 잠그고 수행에 들어간 지 벌써 3일이 지났다. 사흘 전에도 희망은 없었다. 느껴지는 절망이 죽음이라는 체념으로 변해갔다. 갑작스레 성주가 금단의 영역밖에 답이 없다고 말했다. 무관인 진욱이 이해할 수 없는 세계였지만 몇 차례 전장에서 인간의 것이라고 할 수 없는 성주의 능력을 봤다. 전투에 참가한 모든 병사가 봤던터라 성주에게 쏠리는 기대도 컸다. 성주는 자신의 능력에 대해 ‘작게나마 자신을 이해하면 가능한 일’이라고 설명했다. 진욱은 그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살아있는 이들을 살려내지 못하고 후퇴만 했다. 죽음이 계속 쌓여야 산 자는 뒤로 물러설 수 있었다. 살려내지 못하고 살아남지도 못하는 전투에서 성주의 능력은 죽음을 지연시켜줬다. 그랬던 성주가 궁지까지 몰린 성 안에서 돌연 문을 걸어잠그고 수행에 들어선 것이었다. 자신이 한번 죽어야 한다는 이상한 소리를 뒤로 하고 진욱에게 어느 누구의 방해도 막아달라는 부탁까지 한 터였다. 정작 문을 열고 성주를 끌어내고 싶은 이는 진욱이었지만 그래도 희망이 있다면 그건 성주 뿐이었다.


‘깨어있다’는 의식만 남았다. 몸에서 해방돼야 한다. 생각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온전하게 의식의 흐름에서 의식을 뛰어넘어야 한다. 성주는 그렇게 배웠다. 돌보다 단단한 신체와 아름드리나무를 훌쩍 뛰어넘었던 그 사람이 알려준 가르침이었다.

“의식에서 해방돼야 나약하다고 생각했던 몸뚱이도 의지대로 변할 것이다. 나로부터 해방돼야 바람과 하나 될 수 있고 지천에 널린 돌과 작은 꽃들이 나와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나는 여기까지 밖에 가지 못했다. 허나 이 단계 또한 넘어선다면 너는 더 이상 너라는 존재가 아니게 될 것이며 비로소 세상 만물과 통하게 될 것이다”

성주는 넘어서야 했다. 차분하게 앉아 수행할 시간 따위 없었다. 극단적으로 몸이든 정신이든 밀어붙여서 지금의 나를 뛰어넘어야 했다. 그 사람에 받아뒀던 약을 먹으니 ‘깨어있다’는 의식만 남았다. 숨도 쉬어지지 않았다. 심장을 인식하고 혈관을 흐르는 피를 느끼고 폐를 인지해서 의지로 움직여야 했다. 온몸을 둘러싼 신경을 인식해서 촉각도 되살려내야 했다. 눈꺼풀을 움직이는 작은 근육의 존재도 알아차려야 눈을 움직일 수 있었다. 머리카락부터 발끝까지 인식하고 통제가 가능해졌다. 전과 비교할 수 없는 신체능력을 갖게 된 성주는 눈을 뜨지 않고 내면을 들여다보았다. 신체로부터 자유로워졌으나 세상 만물을 이해하지는 못했다. 계속 파고들었다. 경험했으나 기억하지 못하는 성주의 시간들이 명확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시간을 뛰어넘기도 돌려보기도 했다. 성주가 속했던 장소 이외에도 다른 장소에서 벌어진 일들도 보였다. 성주 위주의 시간에서 시간 위주의 성주가 되었다. 흐르는 시간을 느낄 수 있게 되면서 성주라는 존재도 사라졌다. 성주는 흐름의 시간에서 보이지도 않는 점도 되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생과 소멸의 시작과 끝에 도달할 성 싶었다.


성주의 두 눈이 떠졌다. 컴컴한 방의 어둠이 성주에게는 방안 공기의 미세한 흐름, 방바닥과 벽을 만들 때 쓰인 뒤섞인 재료들의 본래 모습, 창틀로 쓰인 나무가 작은 씨앗을 틔우고 자라 여기까지 온 과정이 보였다. 성주가 자연스레 한 손을 들어 올리자 손 안에서 또 다른 손이 자라났다. 자라났던 손이 꽃으로, 나무로 변하고 이내 불꽃으로 활활 타오르다 물이 되더니 다시 원래의 손으로 돌아왔다. 성주가 일어섰다. 닫혔던 문이 열리고 성루 쪽을 바라보며 안절부절못하는 진욱의 뒷모습이 보였다.

“이제 가보세. 친구”

놀라 뒤를 돌아보는 진욱을 스쳐 지나가며 성주는 성벽으로 방향을 잡았다. 묻고 싶은게 많은 진욱의 얼굴이었지만 성주의 걸음을 따라가기도 버거워 보였다. 성주가 걷는 길에 떨어진 낙엽들이 뭉쳐지더니 이내 공중으로 떠올랐다. 성주의 작은 손짓에 뭉쳐진 낙엽이 활활 타오르면서 불새로 변했다. 불새는 곧장 성벽을 향해 날아갔다. 절망으로 짓눌린 성안에서 처음으로 빛이 타올랐다. 어둠 속에서 엄마의 젖만 빨고 있던 아이의 두 눈에 불새가 스쳐지나갔다. 성벽을 지키던 병사들은 어둠과 성벽 사이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새를 보자 바들거리던 손에 힘이 들어가는게 느껴졌다.


흠칫하는 어둠도 잠시, 어둠 속의 것들은 맹렬하게 성벽으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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