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팸 세트.

by 갑자기 흰수염

버스를 탄 석진이 숨 막히는 마스크 사이로 목소리를 냈다.

“형님, 이제 곧 버스 내려요. 지하철 타면 늦어도 20분 안에는 도착할 거예요”

“어어, 그래 그럼 먼저 자리잡고 좌표 찍어줄게”

다한은 늘 석진을 챙겼다. 같은 직종에서 만난 사이일 뿐 친해질 꺼리가 없었지만 둘은 가까워졌다. 열 살 차이는 술자리의 깊은 대화로 사라졌다. 석진은 다한이 소개한 친구들과 자주 어울렸다. 같은 직종이 아닌 다한이 어렷을적부터 만나온 친구, 후배들을 심심찮게 봐왔다. 항상 챙기는 다한과 달리 석진은 자주 자기만의 세상에 갇혔다. 다한의 문자 씹기를 반복하다 뒤늦게 연락을 하며 변명거리를 늘어놓기 일 쑤였다. 이번에도 그랬다. 추석이 다가오기 2주전 다한에게 연락이 왔다.

“요새 뭐하고 사는거야. 이 새끼, 형은 일하느라 바쁘다치고 너는 집에 있으면서 왜 연락도 없냐”

석진은 문자를 보내지 않았다. 자기만의 세상에 갇힌다는건 몽상과 망상으로 시간을 때우는 것이기도 했지만 살갑게 대하는 사람들이 두려워서이기도 했다.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해 답답한 석진은 다른 사람을 만날 용기도 잃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다한의 계속되는 문자에 답하지 않는 것도 마음에 걸려 늦은 밤 미안한 마음을 표현하며 시간 괜찮을 때 무조건 나가겠다고 보냈다. 그리고 며칠 뒤 형의 호출로 버스에 탄 석진이였다.

다한은 시내 한복판 참치횟집에서 석진을 맞이했다. 닫힌 문을 열고 들어서자 다한과 그의 고등학교 동창 수창이 있었다.

“석진이 오랜만에 본다. 잘 지냈지?”

“저 새끼, 내 연락도 씹은 놈이야. 웃어주지마”

두 형은 동생을 반갑게 맞이했다. 석진은 고개를 넙죽 숙이고 비실비실 웃으며 시원하게 후레자(?) 3배를 마셨다. 서운함을 대놓고 드러내는 다한이었지만 눈빛에는 서운함보다 석진을 걱정하는 마음이 넘쳤다. 마흔 중반의 다한은 회사 내 입지로 고민이 많았다. 치고 나가는 후배와 경력 입사라는 약점을 가진 다한은 쉽게 뿌리내리지 못했다. 외부에서는 존중받았지만 회사 생활과 외부 업무는 엄연히 달랐다. 그런 고민을 비롯해 삶의 문제도 함께 나누는 다한과 석진이었다. 죽고 못 사는 사이는 아니여도 누군가 보고싶을 때, 퇴근길 텅빈 마음을 달래고 싶을 때 언제든 형과 동생은 서로를 만났다. 그런 동생을 위해 다한이 이날 정한 집이 참치회였다. 얇은 지갑을 채우려 로또에 희망을 거는 중년 다한이었지만 언제나 메뉴는 석진에게 먼저 물어봤다. 김치찌개에 소주나 한 잔해도 너무 좋다고 말하는 석진을 아끼며 회사 간부와 먹어봤다며 장어, 삼합, 스시 등 좋은 곳으로만 데리고 갔다. 술 값 한번 내겠다고 우기는 석진을 항상 나무라며 성공하면 사라고 말하는 다한이었다. 그런 다한이 하는 이야기를 석진은 말없이 앉아 조용히 듣곤 했다.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열 살 형의 삶의 무게를 이해하는 하기는 불가능했지만 좋아하는 사람이 힘겹게 내뱉는 말을 마음으로 듣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쉰을 바라보는 중년과 마흔을 기다리는 아저씨는 그렇게 몇 년을 함께한 사이였다.

수창이 부인의 전화를 받고나서 술자리는 급격하게 쪼그라들었다. 어색했던지 수창은 일장연설을 했다.

“잘 봐 석진아, 내가 지금 와이프한테 강남이라고 했거든. 근데 우린 광화문이잖아. 그러면 버스를 타고 집에 가는데 1시간 걸리니까 우리한테는 1시간 30분의 시간이 있는거야”

앞뒤 안 맞는 말을 누군가 지적할 필요는 없었다. 그저 수창의 아쉬운 마음을 알아주면 됐다. 짧은 마무리를 위해 근처 호프집으로 이동하려던 찰나 다한이 석진에게 종이 백을 건넸다.

“추석이다. 이거 가져가서 어머니 드려라. 어디서 받아왔다고 자랑해. 쭈그리처럼 있지말고”

석진은 머뭇거렸다. 참치횟집에서 나오기 전 다한이 종이 백 겉에 붙어있던 자기 이름을 떼는 것을 봤다. 명절 때가 되면 받는 스팸 선물세트였다.

“이거 떼면 티 안 나. 난 어차피 혼자 살아서 먹지도 않고 너 가져가”

석진은 계속 쭈뼛거렸다. 구차해서 받기 싫은 게 아니었다.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져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다한의 마음이 너무 무겁게 왔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석진이였지만 다한의 삶도 슬몃 봐 왔었다.

“형, 이건 못 받아요. 스팸이 너무 무거워요”

“뭐가 무거워 새끼야. 이렇게 가벼운데”

“저한테는 너무 무거워요. 형. 못 받겠어요”

“또 지랄한다. 좋은 말로 할 때 가져가서 어머니께 드려라. 얼른 호프집 가자”

던지듯 스팸세트를 석진에게 건넨 다한은 앞장서서 호프집으로 향했다. 바이러스가 세상을 멈추게 하던 시기라 장사하는 호프집이 없었다. 다한은 몇십보 앞장서서 계속 길거리를 걸었다. 석진은 몇십보 뒤쳐져서 무거운 종이 백을 든 채 다한의 등만 보며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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