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시대.

사실, 이성 그리고 인간

by 갑자기 흰수염

상실의 시대.


신문 보는 일이 어렵다. 아침에 일어나 두러두런 볼 법도 하고 좁디좁은 대한민국 돌아가는 느낌만 알아두려면 제목만 읽어도 충분한 것을 결코 그렇게 하지 못했다. 단 한 번도 마음 편하게 기사 한 줄을 읽은 적이 없다.

기사는 사실을 전달하지 않는다. 애초에 사실이란 기사의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한 사람이 짧게는 3분에서 10분 내외로 쏟아낸 단어들 중에 기자들이 선택하는 ‘한 문장’은 다르다. 소위 말하는 진보, 중도, 보수 언론에서 동일한 사건을 갖고 쓴 기사를 봐야 그나마 ‘한 사람’이 말했던 말들이 모아진다. 적어도 같은 사안을 갖고 쓴 3개의 기사를 봐야 비로소 제목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여기까지 하는 것도 잡스런 일과에 속할 수 있어 안 하고 싶다. 뉴스를 소비하는 대중들이 자기 삶에 침묵하는 것도 힘든 마당에 남의 말 한마디 확인하려고 언론사를 찾아가며 기사 3개를 읽고 싶겠나.

아울러 3개의 기사를 봤다고 해서 ‘내가 이 사안을 정확하게 안다’고 말할 수 없다. 사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기사의 뼈대를 만드는 ‘그 사람’의 말이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알아야 한다. 정부 관계자, 정치인이 ‘그 날의 말’을 하기까지 어떤 시간을 보내왔는지 알아야 한다. 관련 사안은 언제부터 기자들의 관심을 받았는지, 그 과정에서 ‘그 사람’은 어떤 행동을 해왔는지 알아야 한다. 그래야 ‘그 날’의 문맥을 읽을 수 있다. 누군가 여기까지 했다면 ‘어느 정도’ 사실이라고 판단해도 되는가. 그렇지 않다. 사람을 알아야 한다. ‘그 날’과 관련된 주요한 사람들을 알아야 한다. 사람의 성향, 살아온 과정을 알아야 ‘그 사람’의 진실과 거짓을 가늠할 수 있게 된다. 진실된 표정 뒤에 숨은 거짓과 고집스런 얼굴 뒤에 숨은 고뇌를 얼핏 쳐다볼 수 있다. 여기까지 하더라도 사실은 알 수 없다. 사실은 시간의 흐름 속에 소용돌이치면서 우연히 마주친 불빛 하나에도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사실 탐구 과정이 이렇듯 복잡해 신문을 보는 일이 두렵다. 진실에 도달할 수 없는 시간을 매일 아침 맞이하는 게 버겁다.

그리하여 우악스럽게 침묵하게 된다. 사실을 알지 못하니 누군가 요구하는 나의 의사표현이 두렵다. 스쳐 지나가는 술자리에서든 가족과의 밥상머리에서든 누구나 편하게 이야기하는 대한민국 경제와 정치, 사회를 말하기 싫다. 사실을 모르는데 무슨 말을 할 것이냐. 끊어낼 수 없는 시간의 단편을 마치 툭 잘라 본 것처럼 오늘의 일로 어제를 논하고 어제의 일로 오늘을 평가하는 가벼운 말들이 천지삐까리니 내 목소리 얹을 자리는 이미 없다.

사실의 상실 시대에 사실로 너와 나를 겨눈다. TV, 신문 이외에 쏟아지는 인터넷 기사와 수많은 동영상 배출로 사실들이 각기 선명함을 뽐낸다. 이쪽에선 사실로 칼을 갈고 저쪽에선 사실로 칼을 벼른다. 사실들이 충돌하면 반드시 피를 본다. 누구 하나는 죽어야 사실이 선명해지는가. 피 묻은 사실로 너와 나를 각각 채워나간다. 다리에선 고름이 터지고 뱃가죽엔 상대가 쑤신 사실을 견뎌낸 내 사실이 보란 듯이 선명한 자국을 남긴다. 치열한 독립전쟁의 상흔은 사실로 살아간 이의 역사가 되고 누군가의 치욕이 된다.

선명해진 사실은 이성의 상실로 나아간다. 더 이상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그저 누군가 싫으면 된다. 그저 누군가 증오하면 된다. 왠지 저 새끼는 나랑 상종도 못한 존재가 되고 왠지 저 새끼는 나의 이성적 사실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도 아닌 존재가 된다. 그런 존재만 있으면 된다. 이성이 사라진 자리에 과학 따위는 발 들일 기회도 없다. 전 지구적 바이러스는 존재하지도 않는 것이며 어느 개 같은 놈들이 지금을 기회 삼아 나를 죽이려 한다는 확신에 사로 잡힌다. 나를 짓밟는 것은 신에 대한 모독이며 나를 억죄는 것은 영웅의 존재를 없애려는 시도이다. 사실의 상실은 인간 상실로 찬란하게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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