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종이 비만 오면 땅을 판 까닭은?
비의 양 0.3cm의 차이로 벌을 내리라고 한 이유는?
일성록은 정조가 세손 시절부터 자신의 말과 행동, 학문을 기록한 일기인데, 정조 7년부터는 개인 일기에서 규장각 관리들이 작성하는 공식적인 국정 일기가 된 책이다. 1760년부터 1910년까지 151년간 쓰인 책이다.
일성록에 따르면 정조 2년 4월 1일에 정조는 기상을 담당하는 관상감 관리에게 어젯밤 내린 비의 양을 문제 삼아 조사할 것을 명령한다. 지난밤 내린 비의 양이 경기감영에서 측정했더니 4푼(1.2cm)이었고, 궁궐 관상감에서 측정한 양은 3푼(0.9cm)으로 차이가 나는 것은 말이 안 되니 조사를 하라는 내용이다. 그러자 4월 2일 관상감 관리가 1푼(0.3cm)이나 차이가 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으므로 그날 기록한 관리를 엄하게 처벌하라는 서류를 올린다. 도대체 비의 양 0.3cm의 차이가 무엇이라고 관리들에게 벌을 주라고 한 것일까?
그리고 어떻게, 무엇으로 측정하였길래 관상감의 관리는 경기감영과 관상감에서 그 적은 양의 차이를 말이 되지 않는다고 하였을까?
세종이 17년이나 세금제도를 계속 보완한 까닭은?
경기감영과 관상감에서 비의 양을 측정한 도구는 측우기이다. 세종 때 만들어진 그 측우기이다. 세종의 과학유산 중 측우기가 비의 양을 측정하는 도구라고는 다들 배웠지만, 이 측우기가 얼마나 많이 사용되었는지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시대 왕의 명령을 전달하던 승정원에서 매일매일 취급한 문서와 사건을 기록한 승정원일기는 현재 1623년부터 1894년까지의 기록이 남아있는데, 이 승정원 일기에서 '측우기'를 검색하면 8132건이 나온다. 왜 이렇게 측우기가 많이 나오는 것일까?
조선은 농업국가로 백성들의 대부분이 농사를 짓고 있었다. 당연히 국가 재정의 가장 큰 세금은 농산물에 대한 세금이었다. 고려 후기 이후 농업기술의 발달로 인한 생산량이 크게 늘었으나 세금은 예전과 같아서 새로운 세금제도를 만들 필요성을 가지게 되었다.
세종은 1430년에 전국적으로 관리, 일반 백성들을 대상으로 모든 땅에 일률적인 세금을 걷는 공법안에 대한 조사를 하게 된다. 찬성이 9만 8,657명, 반대가 7만 4,149명으로 찬성이 많았으나 세종은 반대 역시 많았다는 이유로 이 제도를 시행하지 않고 보완지시를 내린다. 수많은 조사와 시범 시행 끝에 1446년 토지의 비옥도를 6등급으로, 그 해 농사의 풍흉에 따라 9등급으로 나누어 세금을 매기게 하는 공법을 발표하게 된다. 무려 17년간에 걸쳐 제도를 수정 보완한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긴 시간을 들인 세종의 공법이 전국적으로 시행되는 것은 1489년이다. 세금을 거두어들일 토지의 비옥도와 매년 풍흉을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가 문제였으며, 특히 토지가 척박하여 매년 농사를 짓지 못하는 토지에 대한 정확한 조사도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문종이 비만 오면 땅을 판 까닭은?
세종과 신하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세금제도를 설문조사도 하고, 고민하고 보완했지만 이 제도를 확정하기 어려웠던 것 중 하나가 풍흉의 정도를 파악하는 것이다. 풍흉의 정도를 매년 일일이 파악하기도 힘들고, 지방관리들의 자의적인 해석에 따를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세종의 이런 고민을 해결한 사람은 문종이다.
문종은 세자 시절부터 과학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이 문제를 과학적으로 해결하려고 고민하다가 비만 오면 땅을 파기 시작했다. 당시 농사의 풍흉은 비가 오는 양에 따라 크게 차이가 났다. 그래서 비가 오는 양을 측정하여 측정하여 농사의 풍흉과의 관계를 비교하기 위해서였다. 땅을 파서 흙이 젖어 들어간 깊이를 보고 강수량을 측정하였다. 하지만 이 방법은 그리 정확하지 않았다. 그래서 비가 올 때 그릇에 비를 받아 그 양을 측정하였고, 이를 통한 실험이 어느 정도 이루어지자 세종에게 이 방법을 제시하였다.
세종은 장영실로 하여금 이 방법으로 전국 공통의 그릇인 측우기를 만들어 전국에 보내고 이를 비가 올 때마다 기록하여 보고하도록 하였다. 이 기록과 보고는 일본에 나라를 빼앗길 때까지 계속되었다. 톡히 승정원일기에 기록된 140년간의 서울 기록의 세계에서 가장 장기간의 강수량 기록이다.
또한 측우기의 제작과 사용은 세계에서 가장 일찍 일어난 것으로 1636년 로마에서 가스텔리가 처음 강우량을 측정했다고 하니 유럽보다 200년 정도 빠르다고 한다.
수확은 어떨지 미리 헤아릴 수는 없지만 백성들의 당장의 형편은 매우 안타깝다
<국조보감>은 조선 역대 국왕들의 업적을 기록한 책이다.
국조보감 정조 23년 5월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내가 실로 덕이 없어서 이렇게 가뭄을 부른 것이다. 주자(朱子)는, 해ㆍ달ㆍ별이 온전하고 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이 조화롭고 산이 벌거숭이가 되지 않고 못이 마르지 않는 것을 위육(位育)의 공이라고 하였으니, 이는 곧 나의 책임이다. 신해년 이후로 강수량을 반드시 기록해두게 했는데, 1년 치 통계를 내보았더니 작년 이달은 측우기의 수심이 한 자에 가까웠으나 올해 이달은 겨우 2치밖에 되지 않았다. 수확이 어떨지 미리 헤아릴 수는 없지만 백성들의 당장의 형편은 매우 안타깝다.”
흔히 조선을 당파싸움과 실제 생활과 상관없는 '명분'을 중시하는 나라라고 평가한다.
측우기 하나만을 바라봐도 과연 그렇게 평가할 수 있겠는가?
세종은 세금 제도 하나를 시행하기 위해 일반 백성부터 고위 관료에 이르기까지 17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에게 설문조사를 하고, 제도의 보완을 위해 17년의 시간을 들였으며, 이 제도를 전국으로 시행하는 데는 45년의 시간을 들였다.
문종은 비가 올 때마다 직접 땅을 파서 강수량을 측정해보고, 이를 보완하기 위한 방법을 시행하였다.
조선은 전국에 측우기를 보급하여 비가 올 때마다 기록하여 그 기록을 바탕으로 한 정치를 펼쳤으며, 기록의 정확성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경기감영과 관상감을 기록을 비교, 대조하였다.
정조는 매년 강수량 기록을 바탕으로 올해 흉년이 들 것임을 예상하고,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고민하였다.
세종의 공법과 문종의 측우기, 지속적인 기록과 이의 활용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준다.
과연 우리는 그리고 나는 주어진 문제에 대해 이렇게 자세하고 정확하게 기록하고 계획하고 실천하는가?
나를 되돌아본다.
* 이 글을 쓰기 위해 일성록, 국조보감, 승정원일기를 며칠을 찾았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바르게 전달하기 위해 사료가 정확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