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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리스티나 Dec 19. 2020

아름답고, 설레고, 아프다.  그 여자의 사랑.

<그 남자네 집_박완서 장편소설>

올해 읽은 책 중에 가장 좋았던 책, 한 권을 꼽으라면? 나는 망설임 없이 [그 남자네 집]을 선택할 것이다.


자극적이고 폭력적인 소재가 넘쳐나는 요즘, 박완서 작가의 소박하지만 아름다운, 그리고 진실한 이야기는 내 마음을 진하게 흔들어 놓았다.


시댁에서 추석 차례를 지낸 후, 남편이 결혼 전 쓰던 방에서 잠시 쉴 때였다. 방 안에 가득한 그의 옛 흔적을 눈으로 훑으며, 자연스럽게 조금은 낡은 그러나 정겨운 책꽂이에 시선이 멈추었다. 여러 책들 가운데 유난히 눈에 띄었던 책이 [그 남자네 집]이었다. 남편과는 어울리지 않는 제목의 책. 지금은 고인이 된 박완서 작가의 책이었다.    


호기심에 책을 꺼내어 집에 가져가도 되는지 물어보자, 남편은 흔쾌히 그렇게 하라고 했다. 그 책은 시어머님이 읽으셨던 책이라 했다. 그러자 나도 모르게 한 여자의 풋풋했던 첫 사랑에 관한 책은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하게 되었다.


"첫사랑이란 말이 스칠 때마다 지루한 시간은 맥박 치며 빛났다."
 - <그 남자네 집> 중


하지만 이 책을 다 읽고 난 후엔 그 생각이 달라졌다. 6.25 전쟁 후 피폐했던 서울, 누구나 어렵고 힘들었던 그 시절을 살아낸 우리 할머니들과 엄마들의 이야기였다. 내가 살아온 기억들과는 많이 다른 시대지만, 박완서 작가의 세밀한 묘사는 마치 그 시대를 멀리서 지켜보는 듯한 착각을 할 정도로 생생했다.


이야기의 시작은 나이를 먹은 현재의 주인공이 후배의 집이 있는 돈암동을 찾아가면서 시작된다. 그녀가 50년 전 살았던 동네. 그 남자의 집이 있던 곳이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만큼, 그녀가 살던 곳은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는 걸 찾기 힘든 서운한 장소가 되었지만, 그 남자에 대한 기억은 아직도 같은 곳에 건재하게 남아 있는 그 남자네 집처럼 그대로였다.  


만일 그 시절에 그 남자를 만나지 못했다면 내 인생은 뭐가 되었을까. 청춘이 생략된 인생, 그건 생각만 해도 그 무의미에 진저리가 처졌다. 그러나 내가 그토록 감사하며 탐닉하고 있는 건 추억이지 현실이 아니었다. 나는 이미 그 한가운데 있지 않았다. 행복을 과장하고 싶을 때는 이미 행복을 통과한 후이다.
- <그 남자네 집> 중  


6.25 전쟁 때 이웃집의 고발로 인해 빨갱이로 몰려 아버지와 오빠를 모두 다 잃고,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에 들어간 그녀는 가난 때문에 미군부대에서 일하게 된다. 여자가 미군부대에서 일하는 걸 수치로 알던, 그녀의 엄마조차 그 사실을 숨기고 싶던 시절이었다. 그 힘든 시절에 주인공은 먼 외가친척뻘 되는 그 남자를 만났다. 관옥같던 그 청년과의 설레는 시간은 고단했던 그녀의 젊은 시절을 지탱해 주었다. 그러나 그녀가 끝내 선택한 삶은 생활이 안정적일 것 같은 은행원과 결혼이었다.


홀어머니에 외아들인 남편과의 결혼생활은 그녀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랐다. 오로지 아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해먹이는 것이 인생의 낙인 시어머니와 박수무당에게 돈을 바치는 시집의 미신에 의지한 전통, 팍팍한 살림살이는 그녀를 숨막히게 했다.


그녀의 삶이 완전한 암흑이라 느껴졌을 때, 그 남자는 봄처럼 다시 나타나 그녀를 환하게 했다.  


그 남자가 나에게 해준 최초의 찬사는 구슬 같다는 것이었다. 나는 다시 한 번 구슬 같은 처녀이고 싶었다.
- <그 남자네 집> 중


그 남자와의 시간은 그녀가 장보기 위해 시장에 가는 동안의 짧은 시간 뿐이었고, 둘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시장의 가게를 구경하며 이것저것 맛난 걸 사먹는게 고작이었다. 소박하지만 그녀에겐 봄바람이었고 지루한 일상을 벗어나게 해주는 탈출구였다.


그와의 만남이 잦아질수록 그녀는 안정적인것으로부터 일탈을 꿈꾸지만, 그 남자에게 불행이 닥치며 그 와의 꿈같은 시간도 끝이 나게 된다.  


일상으로 다시 돌아간 그녀는 또 다시 그녀의 삶을 살아냈다. 남편과의 결혼생활을 지속하며 아이를 낳고, 기와집에서 2층으로 된 양옥집으로 살림을 키워 이사가고, 주변의 사람들을 하나, 둘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며.. 그녀도 세월의 무게를 버텨냈다.  


혼외정사보다는 아새끼를 야단치고 사람 되라고 설교하는 게 나에게 익숙한 정서가 되어 있었다. 그 남자는 시력을 잃고 나는 귀여움을 잃었다. 나의 첫사랑은 이렇게 작살이 났다.
- <그 남자네 집> 중


그녀의 첫사랑은 아름답고 설레였지만, 6.25 전후 피폐한 일상과 고단한 현실을 살아야 했던 그 시대 여성들의 사랑은 가슴 찡하게 아프다.


이 책의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나는 그녀의 삶에 현재의 나를 겹쳐 보았다. 시대가 달라졌다고 문학의 언어가 보여준 문제 의식이 크게 달라진 것 같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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