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소설
[목차]
◑ 구약의 말들이 죽지 않고 살아서
♬ 프롤로그
♬ 기이한 죽음
♬ 다시 돌아온 죽음
♬ 안팎의 고립
♬ 저주파의 교란
♬ 사교의 주술
♬ 탈출
♬ 격리
♬ 붕괴
♬ 피란
♬ 에필로그
* <격리> 줄거리
구요섭과 일행은 성을 탈출하기는 했지만 성 바깥의 정찰병들에게 발각되어 빈민촌의 공동 창고로 감금된다. 창고 안은 어둡고 음습한 분위기 속에서 서로를 의심하며 경계하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구요섭은 자신의 상처를 숨기려 노력하지만, 불신이 만연한 상황 속에서 점점 더 긴장감이 고조된다.
이후 신약을 가져온 한 남자가 등장하며, 구요섭은 이 신약이 괴질의 치료제가 될 수 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는 것을 안다. 사람들은 의심과 희망 사이에서 혼란에 빠지지만, 신약을 먹고 증세가 나아진 사람도 나타나면서 신약에 대한 믿음이 조금씩 싹트기 시작한다. 그러나 동시에 일부 환자들은 여전히 발병하거나 완치되지 못한 상태로 남아 있어, 사람들 사이에 불안과 공포가 지속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구요섭과 일행은 생존을 위해 버티며 끊임없는 의심과 두려움 속에서 하루하루를 견뎌낸다.
#1
비밀 통로로 빠져나온 구요섭과 그 일행은 어둠 속을 숨죽이며 빠르게 움직였다. 한시라도 빨리 이 악몽 같은 성 안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절박한 마음으로 모두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의 앞을 막아선 것은 바깥을 지키던 정찰병들이었다. 그들은 성에서 얼마 전까지 시민으로 살던 자들이었지만, 이제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새로운 임무에 복무하는 자들처럼 보였다. 험악한 표정과 단단한 무장, 그리고 그들 사이에 흐르는 서늘한 기운은 경계심의 눈빛으로 드러났다.
정찰병들은 구요섭과 일행을 둘러싸며 거친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들은 언제든 무기를 꺼내 들 준비가 된 상태였고, 긴장감이 공기처럼 무겁게 내려앉았다. 아무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고, 그 침묵 속에서 일행의 심장은 급박하게 뛰기 시작했다.
“이상한 징후는… 아직 없는 것 같은데요. 그나저나 요즘 이 통로에서 계속 나오네요. 이러다 말들도 기어 나오는 거 아닐까요?”
정찰병들 중 한 명이 낮게 중얼거렸다. 그 말에 다른 이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일행을 살폈다. 그들은 이미 감염된 자들이나 괴생명체와 접촉한 흔적이 있는지 확인하려는 듯 가까이 다가와 각자를 샅샅이 조사했다. 상처, 피, 그리고 미세한 움직임 하나하나까지도 그들의 눈을 벗어날 수 없었다.
구요섭은 숨을 죽이며 그들의 시선에서 자신의 왼쪽 팔을 피했다. 그의 팔에 있는 5cm 길이의 생채기는 분명 의심을 살 만한 것이었다. 그 상처가 빌딩 파편에 긁힌 것인지, 아니면 더 불길한 원인 때문인지조차도 알 수 없었다. 다행히도 정찰병들은 그 상처를 주의 깊게 보지 않은 듯 보였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구요섭의 등줄기를 따라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정찰병 중 한 명이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너희는 어디서 온 거지? 안에서 나온 게 맞나?"
그 질문에 일행 중 한 사람이 나서서 말했다.
"우리는 성 안에서 탈출한 자들입니다. 더 이상 그곳에 있을 수 없었어요. 괴물들이 성을 뒤덮고 있습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두려움과 지친 기색이 묻어 있었다. 진심을 다해 말했지만, 그 말이 과연 정찰병들에게 얼마나 먹힐지 알 수 없었다. 정찰병들은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의 시선을 교환하며 잠시 머뭇거렸다. 그 사이에 구요섭은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도망칠 기회가 있을지, 아니면 이제 끝이 난 것인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집중했다. 그러나 그들의 움직임은 너무나도 기민했고, 탈출구는 보이지 않았다.
"상부의 지시를 기다리자."
정찰병 중 한 명이 말했다. 그 말에 일행을 둘러싼 경계는 여전했지만, 공격적으로 변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잠시 대기하며 다시 한번 일행을 확인했다. 괴생명체의 징후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안도했는지, 그들의 태도는 조금 누그러졌지만, 여전히 완벽한 신뢰를 주는 눈빛은 아니었다.
결국, 정찰병들은 일행의 하나하나를 가까이서 다시 확인했다. 그들의 손길이 얼굴과 팔을 스쳐 지나가며 숨겨진 상처나 의심스러운 흔적을 찾아냈다. 구요섭은 숨죽이며 그들이 자신의 상처를 넘어가길 바랐다. 불안하게 뛰는 심장 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모두 데려가자."
최종 지시가 내려지자, 정찰병들은 일행을 어딘가로 데려가기 시작했다. 그들이 데려가는 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지만, 구요섭은 자신이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놓였음을 직감했다.
그들이 당도한 곳은 빈민촌의 공동 창고였다. 그리고 마을에서 가장 큰 창고였다. 그곳에는 자신들이 먹는 음식보다는 성경으로 들여야 하는 물자가 잠시 머문 상태였다. 가난한 사람들이 지방에서 실어 나르다가 통행 시간에 걸려서 그곳에 잠시 맡겨두고는 다음날을 기약하곤 하였다. 때로는 누군가가 훔친 장물이 맡겨진 뒤 오래도록 찾지 않고 방치된 곳이기도 했다. 그런 것의 관리 책임을 맡은 이들은 으레 그곳의 규칙대로 빈민가 사람들 중 주먹 꽤나 쓴다는 이들에게 수고비를 치르고 맡겨놓곤 하였다. 그리고 이제는 일종의 수용소 기능을 했다.
구요섭 일행도 그곳에 감금되었다. 창고 문이 닫히고 어둠 위에 폐쇄적인 어둠이 한 번 더 깔렸다. 창고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구요섭은 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떨구었다. 허름한 건물 안, 벽에 기대어 숨을 고르는 그들의 모습은 모두가 지친 자들이었다. 비좁은 공간에 모여든 사람들의 거친 숨소리가 작은 울림처럼 들렸고, 긴장과 공포가 뒤섞인 공기가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그 누구도 말하지 않았다. 침묵 속에서 각자 무언가를 생각하며 서로를 경계했다. 구요섭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람들의 시선은 서로 엇갈리며 신경전을 벌였고, 작은 숨소리마저 불안한 공기를 더했다. 이들이 이곳에 모인 이유는 단 하나였다. 탈출에 성공한 자들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이들은 이제 서로가 적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항상 염두에 둬야 했다. 구요섭은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의심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모두들 서로를 불신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불신 속에서 무엇이든지 일어날 수 있었다.
구요섭은 왼쪽 팔을 본능적으로 움켜잡았다. 피가 마른 채 길게 그어진 생채기가 문제를 일으킨다면, 사람들은 더욱더 자신을 의심할 것이다.
‘우선은 말을 아껴야 한다.’
그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지금은 불필요한 말을 하거나, 자신을 드러낼 순간이 아니었다. 서로의 경계를 풀지 못하는 이 상황에서 그저 살아남기 위해, 서로를 적당히 경계하고 숨죽이며 기회를 엿보는 것이다.
사실 며칠 전 사다리로 성문 탈출을 시도한 다음에도 줄곧 있던 일이다. 급하게 마주친 이들과 몸을 숨겼을 때에도 누군가 갑자기 발작하듯 일어나서는 무리를 덮치는 경우는 항상 대비해야 했다. 그러다 보면 무리의 위치가 발각되고 모두가 위험에 처하곤 했다. 성 안에서 괴생명체의 먹이가 되어 뜯긴 후 죽지 못해 괴물로 사느니, 차라리 사람으로 죽는 편이 낫다는 생각을 했다.
#2
불과 며칠 전만 해도 구요섭은 배고픔이 죽음과 직결된다는 절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숨었던 빌딩에서 보이는 대로 무기가 될 만한 것들과 그곳에 있던 사다리를 준비해 놓았지만, 창밖으로 보이는 것은 오로지 황폐한 거리와 죽은 말과 사람들이었다. 더는 말일 수도 없고, 사람일 수도 없는 존재들이 곳곳에 위험이 도사린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곳에서 도망쳐 나가 성문까지 달려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세상은 그저 죽음으로 채워진 듯했고, 그 죽음은 무리를 분열시키려 들었다. 저주파에 휘말려 서로에게 소리치며 싸울 뻔한 적도 있었다. 모든 것이 아슬아슬했다.
빌딩 깊숙한 곳으로 몸을 숨겼지만, 공포는 피할 수 없었다. 높은 곳이 비교적 안전하다는 걸 알았지만, 식량이 문제였다. 아껴 먹는다는 것은 희망이 아니라 공포를 조금씩 연장하는 일에 불과했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몰랐고, 매일 밤 식량이 떨어진다는 생각에 잠을 설치곤 했다. 그런 날들 속에서, 일행은 2인 1조를 편성해 편의점이나 식당에 잠입해 음식을 가져오는 시도를 했다. 그중 누구도 다음 날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오늘 함께한 사람이 내일도 같은 모습일지, 아니면 거리의 배회자로 변해버릴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식량이 부족해질수록 사람들의 신경은 예민해졌다. 서로를 의심하고 불신하는 눈빛이 점점 늘어갔다. 모든 것이 끝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차라리 밖으로 나가 싸우다 죽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하지만 그렇게 결심이 서려 할 때마다 거리에서 울려 퍼지는 비명 소리가 그 마지막 용기를 짓밟았다. 그 소리는 처절하고, 고통스럽고, 끝이 보이지 않는 절망 그 자체였다.
그들이 가졌던 용기는 그 비명 소리와 함께 공중에 떠돌다 소리 없이 죽어갔다. 이미 죽은 자들이 다시 돌아다니듯, 희망도 죽음에 매달려 허공을 배회했다. 이 싸움에서 어떤 결말을 맞이할지, 누구도 확신하지 못했다. 죽음은 머리 위에서 맴돌며, 마치 기다리기라도 하듯 언제고 다가올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즈음 구요섭은 기현상을 목격하게 되었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기이한 광경에 숨을 삼켰다. 죽은 말과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먹고 먹히는 참담한 살육상이었다. 서로를 물어뜯고 잡아먹는 현장은 그 어떤 상상보다도 끔찍했다. 광란의 현장에는 더 많은 죽은 말과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기어코 그들끼리 먹고 먹히다가 쓰러지는 시체들이 있었다. 시체들 사이를 헤치며 그 틈을 찾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 틈새를 찾기는 어려워서 여전히 쉽지 않았지만, 무리 중 한 명은 꽤 먼 곳에서 사람인지 모를 존재들이 차를 몰고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는 주장도 했다. 사람인지 확실치 않았으나, 그들이 차를 몰고 지나갈 때 말들이 한 시간 정도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반수면 상태에 빠지거나, 길바닥에 잠시라도 쓰러져 있는 것 같았다. 그 말들이 멈춰 있는 시간은 그들의 유일한 기회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성급히 움직이기에는 그들을 자극해 말들이 깨어날 위험이 있었다. 성문까지 가기에는 너무 멀었다.
하루 이틀을 지켜보면서도 성문으로 향할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말들이 깨어나기 전에 도착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도중에 말들이 갑자기 공격해 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들의 마음을 짓눌렀다. 모든 것이 불확실했고, 실패한다면 그들의 운명은 참혹할 것이었다.
그때 갑자기 먼 곳, 처음으로 말이 하늘에서 떨어져서 죽었다는 지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갑자기 엄청난 파괴음이 들렸다. 구요섭은 눈을 크게 뜨고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거대한 괴수가 빌딩을 무너뜨리며 천천히 어딘가로 움직이고 있었다. 괴수의 몸짓 하나에 바닥이 쿵 하고 진동했고, 그 진동은 마치 폭탄이 터지는 것처럼 땅을 울렸다.
거리에서는 혼란이 극에 달했다. 말들이 일제히 놀라 깨어나서는 우왕좌왕하다가, 거대한 괴수가 있는 쪽으로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움직임은 공포에 질린 짐승의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구요섭 일행은 숨어서 그 장면을 긴장한 채 바라보았다. 성문 쪽으로 달려오는 말들의 숫자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성문 근처에는 그들을 위협할 말들이 거의 없었다. 성문이 닫히던 날, 성문을 빠져나가지 못한 사람들이 성경 중심으로 도망쳤고, 구요섭 일행도 그 흐름에 따라 이 빌딩에 몸을 숨기게 된 것이었다. 그러니 말들도 그때 이미 성경 중심 쪽으로 이동한 상태였고, 그러니 말들도 중심 방향을 향해서 배회했던 셈이다. 성문 근처에는 지금도 숫자가 적겠지만, 괴수의 거대한 움직임에 반응하여 그마저도 중심을 향해 달려온 셈이다. 모두가 거대한 괴수의 인력에 빨려 들어가듯이 그쪽으로만 몰려들고 있었다.
구요섭의 머리에는 지금이 기회라는 생각이 고였다. 지체 없이 성문으로 가야 했다. 공포와 혼란 속에서 잠시나마 판단의 틈을 찾은 그는 스스로에게 결단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 순간을 놓친다면 더 이상 기회는 없을지도 몰랐다.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평소에 준비해두었던 식량과 사다리와 밧줄과 무기를 챙겼다. 혹시 실패할 수도 있으니, 그 근처 빌딩의 위치를 기억해 두었다. 구요섭과 일행은 먹구름으로 가득한 짙은 회색의 어둠 속에서 숨을 죽인 채 성문을 향해 움직였다. 상황에 따라서는 안쪽 성벽에 사다리를 대고 밧줄을 타고 일단 성곽에 오르고, 다시 밧줄로 성문 바깥의 벽을 타는 시나리오가 있었다. 계단으로 오르는 것이 가능하다면 성곽에서 바깥으로 사다리를 내리고, 길이가 짧아 여의치 않는다면 밧줄을 타고 내려간다는 안도 있었다. 상황은 알 수 없었다. 닥쳐봐야 아는 것이 상황이었다. 그들의 목표는 단 하나,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시도는 처참하게 실패로 돌아갔다. 사다리는 무너지고,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성벽 바깥을 보지도 못했다. 혼란 속에서 누구도 서로를 돌볼 여유가 없었다. 그곳에는 예상보다 많은 말의 무리가 중심으로 달려가지 못했다. 길을 찾지 못하고 허둥대던 죽은 말들이 산 사람을 보고 그제야 반응했던 것이다. 조금 일찍 나왔던 사람들이 탈출 중도에 말들에게 덜미를 잡힌 셈이다. 성문 앞에서는 이미 끔찍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괴생명체들이 그곳을 지키고 있었고, 몇몇은 성곽까지 오를 뻔했지만 계단에서 잡아 끌려내려오고 말았다. 간신히 성곽에 오른 몇몇 역시 그곳에서 괴생명체가 되고 말았다. 성곽에 오른 몇몇의 괴이한 말들은 한동안 그곳에서 내려오지 못했다. 성곽에서 떨어져서 바닥에 떨어져 팔이든 목이든 어딘가 부러진 채로 다시 저주 받은 기계처럼 죽지 못해 일어서는 경우를 제외한다면.
성문으로 다가서던 구요섭 일행은 이 광경을 보고는 사다리를 내려놓은 채 무기와 식량을 챙겨서 다른 길로 빠져나가려고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성문 앞에서 목표를 상실하고 흩어진 채 각자 살길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성벽 근처로 도망친 자들마저 결국 그들의 저주파에 걸리고 말았다. 그 소리, 마음을 불안하게 하면서 절망적인 분노를 치밀어 오르게 했다. 저주파가 귓속을 강타할 때마다 이성이 흐려졌다. 그게 저주파 때문인지도 모르는 경우도 있었다. 그 주파수에 잠식된 이들은 그 자리에 멈춰 서더니, 곧바로 괴물에게 달려들어 승산 없는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그들의 눈은 초점이 흐려지고, 입에서는 비인간적인 소리가 터져 나왔다.
구요섭은 다급히 주변을 살폈다. 그 순간, 무너진 성벽 아래에 작은 틈새가 보였다. 구요섭의 눈에 그것은 마치 구원의 통로처럼 보였다. 그는 무심코 그곳으로 몸을 던졌다. 그를 따라서 숨은 일행도 있었지만 무리에서 멀어진 몇몇은 다른 곳에 가까스로 몸을 숨겼지만, 그마저도 오래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저주파가 그들을 따라잡고 있었다. 불안한 공기가 그들을 감싸고, 눈앞이 어둠으로 가득 찼다. 구요섭은 점점 더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그냥 은신처에서 좀 더 추이를 살필 걸 그랬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그러면서도 뒤에서 공격을 당하지나 않을까 해서 좌우사방을 살폈다.
그런데 운이 좋게도, 그곳은 성벽 아래로 이어지는 작은 지하 통로로 연결되어 있었다. 구요섭 일행은 그곳에 무엇이 있을지 몰라 두려웠지만, 그렇다고 다시 바깥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일단 그곳에서 멀어져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흩어진 일행 중 일부도 그 틈새를 발견하고 구요섭을 따라 들어왔다. 좁고 습기 찬 공간이었지만, 더 이상 무슨 위험이 있을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일단 그곳은 안전해 보였다.
그들은 숨을 고르며, 지하 통로를 통해 천천히 바깥으로 나아갔다. 이곳에서조차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지만, 바깥에 대한 희망은 여전히 그들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들은 지하에서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방향을 찾으려고 맴돌던 말과 맞닥뜨리기도 했다. 구요섭 무리는 그 순간 숨을 죽였다. 숨소리 하나도 낼 수 없을 만큼 긴박한 상황이었다. 한 마리라 대적하면 어떻게든 감당할 수 있을 듯했다. 급작스러운 공격 성향도 알고 어떤 것을 조심해야 하는지도 대충은 알았다. 여차 하면 싸움을 해야 할 상황이었지만, 다행히 말은 반응하지 않았다. 무리는 말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매우 천천히 이동했다. 말이 다른 곳으로 천천히 배회하여 멀어지고 있었다. 구요섭 일행이 지하를 지나 바깥으로 빠져나왔을 때, 차가운 밤공기가 밀려왔다. 그들은 경계를 늦추지 않으면서도 나지막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주변을 찬찬히 살필 때, 누군가 환호의 탄성을 내뱉으려다가 입을 막았다. 성곽 밖이었다.
#3
창고 안은 어둡고 습하고 조용할 뿐이었지만, 주변이 너무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고 앞으로 어찌될지 모르던 사람들로서는 마치 지옥의 전초전처럼, 혼란과 경계가 뒤섞인 장소로만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어둡고 음습한 창고 안에는 몇 명의 사람들이 벽에 기대어 결박당한 채로 있었다. 다음날 아침이 되어 햇살이 스며들자 창고 안의 상황이 좀 더 또렷해졌다. 일부의 손목은 거칠게 묶여 있었고, 땀과 먼지로 얼룩진 얼굴에는 깊은 공포와 체념이 서려 있었다. 그들의 눈동자는 억눌린 두려움과, 저 멀리서 무언가를 쫓는 맹목적인 광기가 동시에 번뜩였다.
결박되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결박당한 자들 곁에 서서 서로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었다. 누구도 큰 소리로 말하지 않았고, 대신 침묵 속에서 서로를 지켜보며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결박당하지 않은 이들의 눈에도 불안과 공포가 깃들어 있었지만, 결박된 자들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경계심과 혐오가 번갈아 섞여 있었다. 마치 결박된 자들이 이미 인간이 아닌, 언젠가는 꼭 배신할 괴물인 양 대하는 태도였다.
구요섭은 창고 한구석에서 이 장면을 지켜보았다. 그가 느끼는 불안감은 몸 전체를 타고 흐르는 싸늘한 기운처럼 점점 더 커져갔다. 저들이 왜 결박당한 것인지, 이유를 묻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그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이곳에서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 살아남는 것뿐이었다.
결박당한 자들 중 몇은 미동조차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들의 상태는 무언가 잘못된 것이 분명해 보였다. 구요섭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들을 바라봤다. 그들의 팔뚝이나 손목 어디선가 상처가 발견될까 걱정이 되었다.
‘만약 그들 중 한 명이라도 감염된 자라면…’
그게 자신일 수도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충분히 끔찍했다.
"언제부터 그들을 결박했나?"
구요섭은 저 멀리서 속삭이는 목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대신, 결박당하지 않은 자들 중 하나가 슬그머니 다가가, 결박된 자의 목을 확인하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그가 휴대용 손전등으로 그들의 살을 비추자, 창백하게 빛나는 피부 아래로 긁힌 상처가 드러났다. 짧게 갈라진 상처는 무언가 날카로운 것으로 그어져 있었다.
“상처가 깊지 않아서, 그래도 발병 속도가 늦어지는 건가?”
결박당한 자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순간 으르렁거리려다가 간신히 참고는, 오해 받지 않으려는지 눈을 감고 고개를 다시 숙였다.
그때 창고의 무거운 철문이 삐걱거리며 열렸다. 어둠 속에서 들어온 자들은 차갑고 조용했다. 그들은 준비해온 커다란 약탕기를 들고 결박당한 자에게 다가가, 무심하게 그가 있는 곳에 탕약을 앉혔다. 창고 안에 가득하게 탕약 냄새가 진동했다. 두꺼운 천으로 꽁꽁 묶인 채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던 그는 약간의 저항조차 하지 못했다. 그들은 아무런 말없이 그에게 탕약을 떠먹였다. 그 와중에 물리지 않으려는지 두꺼운 장갑을 끼고 팔뚝을 비롯한 상반신 곳곳에 보호 장구를 착용했다. 한 모금, 또 한 모금. 탕약이 입을 통해 그의 목을 타고 천천히 흘러내렸다.
그는 매일, 하루에 세 번씩 그 탕약을 꼬박꼬박 마셔야 했다. 시커멓고 불길해 보이는 그 탕약이 그의 몸속에 퍼져 나갔다. 무엇을 위한 약인지, 그 약이 어떤 변화를 일으킬지는 아무도 몰랐다. 다만 그가 예전의 자신과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들끓던 분노도 욕설도 잦아들고, 이제는 자신의 감정과 행동을 추스를 정도까지 되었다고 했다.
나머지 사람들도 하루에 한 번씩 탕약을 마셨다. 그들 사이에서는 탕약이 무슨 역할을 하는지, 혹은 누구를 위한 것인지 추측만이 오갔다. 누군가는 탕약이 신약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것이 누구에게 좋은 약일지, 아니면 그들 모두에게 서서히 독이 되는 것인지 아무도 확실히 알지 못했다.
삼일 건너 한 번씩 한두 명이든 여러 명이든 창고로 새로 들어왔다. 각자도생으로 성을 탈출하려던 사람 중에서 운이 좋게도 부서진 비밀 통로를 발견한 자들이었다. 그들도 구요섭 일행처럼 묶였다.
그러나 거기서도 제외되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을 사람이라고 해야 할지, 말이라고 해야 할지 이상한 존재들이었다. 이미 그들의 입 주변, 주둥이라고 해야 할 부위는 말의 형상처럼 자라고 있었다. 아직은 사람이라고 해야 하는데,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얼굴의 변형이 너무 심했던 것이다. 다리가 말의 뒷다리처럼 변형되어 굳어버린 경우도 있었다. 분명 그들은 죽은 자들이었다. 말에게 물렸지만, 조용히 움직이며 공격성을 크게 띠지 않는 편에 속하였고, 때로는 말수가 적은 사람처럼 보였다. 그런 이가 비밀 통로에서 저주파를 주고받으며 자신의 포악성을 끌어내지 못한 상태로 발병 속도가 늦어져서는 죽은 말과 함께 어디로도 빠져나가지 못하고 통로에서 맴돌았던 경우였다. 분명 죽은 자였지만, 완전히 발병을 하지 않고도 이미 외적으로 뒤틀림이 생겨서 오히려 형태적으로 말에 가까워지는 증상을 보이는 자들이었다. 그들이 우연히 무리의 끝에 서서는, 어두운 가운데 사람으로 착각했던 탈출자들을 따라서 성 밖으로 빠져나오는 경우가 생겼던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괴생명체를 따라서 다른 말들도 따라 나올 수 있다는 것이라, 비밀 통로 주변으로 경계가 강화되기 시작했다. 무방비로 이곳을 배회하던 말 한 마리 정도는 여럿의 인간이 제압 가능했다. 인간들은 여럿이서 상대의 뇌관을 제거하는 작업을 했다. 그들의 목을 잘라, 먹을 수 없게 되면, 서서히 기능을 멈추었다. 설령 한동안 움직여도 제대로 방향조차 잡지 못했다. 그러다 차츰 바닥을 뒤구르다가 기능을 멈추었다. 성 밖으로 이탈한 말을 간신히 죽이면, 혹시나 다시 살아날까 두려워 꽁꽁 묶어서 태우기까지 했다. 그러고도 두려워 그것을 땅에 묻고, 주변을 지키게 했다. 보름이 지나도 아무 낌새가 없을 때에만 경계를 늦추었다. 어째서 보름인지는 알 길이 없었지만, 일종의 미신이라고 해두자. 그때까지 만일 그것들이 영영 되살아나지 않는다면, 생명이 땅의 기운에 묶여서 순리를 거스르려는 모든 가능성이 사라진다는 것이었다. 공포를 제거하려는 노력을 하면서도, 정찰병들 역시 찜찜했다. 여전히 그것들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살아있을 때는 말이었고, 사람이었으며, 때때로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물론, 그렇게까지 감상적으로 생각하기 전에 없애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사방을 돌아다니는 예측 불가능한 폭탄으로 둘 수는 없었다. 모두가 숫자가 늘 이들을 관리하기도 버거웠고, 말의 형상의 한 괴물일 뿐이었다. 그 중에 한두 마리 정도만이 비밀리에 마을의 창고 어딘가에 철저한 감시 속에서 감금되어 있다는 소문도 돌았다. 탕약의 효능을 실험하기 위한 것이라는 말도 있고, 그들이 이 모든 사태를 일으킨 사교의 신도라는 소문도 돌았다. 그들은 다른 창고에 갇혀 있다는데,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창고에는 구요섭 일행만 있지는 않았고, 조금씩 늘다 보니, 여기에도 이런저런 말이 보태어진 것이다. 말이 돌 만큼 약간의 여유는 생겼다는 의미였다. 눈에 띄게 압도적인 절망에서는 벗어나고 있었다. 당장 포탄이 떨어지지 않는 전장에서는 그래도 여전히 먹고 살기 위해 사람들이 분주하듯이.
그렇다고 감금자들에 대한 시선이 쉽게 온정적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너무도 믿기지 않은 사건을 겪은 지는 모두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러니 격리를 철저했다.
창고에 갇힌 사람들은 격리 기간이 어느 정도 되면 창고를 이동해야 했다. 무조건 발병자끼리만 묶어두지도 않았다. 시기에 따라 나누고, 발병자와 감염의심자 등을 세분화한 뒤, 이들을 비감염이 확실한 탈출자와 비율을 적절히 섞어주는 듯했다. 그래야 발병자들이 광란의 발병을 할 때 주변에서 수적 우위를 점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발병을 자극한 미끼가 되어서 쉽게 강력하게 결박해야 할 이들을 찾아내기도 했다. 그럴수록 발병자와 함께 지냈다는 이유로 또 다시 잠재적 발병자로 분류되어 격리 기간이 길어졌다. 정확히 어느 정도 지났을 때 병이 끝나는지 확실치 않기 때문이었다. 충분히 지난 뒤에야 비감염이 확실한 사람들을 묶어서 마지막 격리를 시킨 뒤, 그 기간이 지나고서야 비로소 일정한 지역에서 머물 수 있었다. 그들에게 한 가지 유일한 혜택이라면, 탕약을 먼저 마실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아직 약의 안전성을 담보하지 못했으므로 피실험체인 것이기도 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