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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리 (2/2)

연작소설

by 희원이

[목차]

◑ 구약의 말들이 죽지 않고 살아서

♬ 프롤로그

♬ 기이한 죽음

♬ 다시 돌아온 죽음

♬ 안팎의 고립

♬ 저주파의 교란

♬ 사교의 주술

♬ 탈출

♬ 격리

♬ 붕괴

♬ 피란

♬ 에필로그


* <격리> 줄거리

구요섭과 일행은 성을 탈출하기는 했지만 성 바깥의 정찰병들에게 발각되어 빈민촌의 공동 창고로 감금된다. 창고 안은 어둡고 음습한 분위기 속에서 서로를 의심하며 경계하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구요섭은 자신의 상처를 숨기려 노력하지만, 불신이 만연한 상황 속에서 점점 더 긴장감이 고조된다.

이후 신약을 가져온 한 남자가 등장하며, 구요섭은 이 신약이 괴질의 치료제가 될 수 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는 것을 안다. 사람들은 의심과 희망 사이에서 혼란에 빠지지만, 신약을 먹고 증세가 나아진 사람도 나타나면서 신약에 대한 믿음이 조금씩 싹트기 시작한다. 그러나 동시에 일부 환자들은 여전히 발병하거나 완치되지 못한 상태로 남아 있어, 사람들 사이에 불안과 공포가 지속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구요섭과 일행은 생존을 위해 버티며 끊임없는 의심과 두려움 속에서 하루하루를 견뎌낸다.





#4

신약을 가져온 자에 대한 이야기는 마을을 가로지르는 강물처럼 빠르게 퍼졌다. 사람들은 분분했다. 그가 역병의 해결책을 가져온 고마운 자라고 여기는 사람도 많았는데, 그러다 보면 어려운 시기에 종교처럼 믿고 의지하고 싶은 사람들의 심리가 작용했기 때문인지 조금은 신비로운 이야기도 곁들이곤 했다. 어찌 보면 좀 싱거운 이야기일 수도 있겠으나, 그들이 성문 밖으로 나오고 많은 사람을 안에 놓아둔 채 간신히 문을 닫았던 즈음, 또 간신히 방어 진지를 구축하고는 그곳에 경계를 섰던 때즈음, 사람들 사이에서는 반딧불이처럼 밤에 반짝거리는 존재를 발견했다는 것이었다.

정찰병이 누구냐고 물으면 그저 “나는 종이요”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종이? 페이퍼?’라고 생각하는 순간 바람에 흩날리는 종이가 공중에서 흩날리더라도 천천히 나풀거리다 너울너울 떨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걸 인근에서 바라보던 한 사내가 어디론가 사라지는데 어두운 상황에서도 그의 모습이 이상하게 선명하게 잘 보였다고 했다. 그런데 다음날부터 인근에는 이상한 자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들렸다는 것이다. 대체로 소문이 합리적인 구석이 생긴다거나, 정교해진다거나, 일치하는 면모를 보인다면 소문이 여러 가공을 거쳐 사람들의 입맛에 맞게 다듬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진실이 아니라고도 단정할 구석이 없을 때에야 비로소 소문은 끈질기게 살아남는다. 그리고 그러한 소문을 끝까지 믿지 못하게 하는 수많은 근거도 넘쳤으므로, 소문을 달가워하지 않는 사람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소문을 의심했다.

그리하여 소문의 중심에 선 사내가 역병의 해결책을 가져온 고마운 자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었지만, 더 많은 사람들은 그를 의심했다. 그의 눈빛은 예리하고도 불안정해 보였고, 미소는 어딘가 뒤틀린 듯했다고 주관적으로 말하곤 했다. 어떤 이들은 그가 단지 새로운 약을 팔아넘기려는 광기의 제약회사 연구원일 뿐이라고 속삭였다. 과학을 빙자해 위험천만한 실험을 벌이며, 사람들의 절박함을 이용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소문도 퍼졌다. 그의 손끝에서 건네지는 신약이라는 물건은 이 끔찍한 역병을 막기 위한 구원책인 동시에, 사람들을 더 큰 혼란으로 몰아넣는 음모의 도구처럼 보였다.

그는 자신이 만들어낸 이 약이야말로 ‘신약’이라며 절대적 신념을 갖고 있는 듯 보였다고 한다. 목격자들에 따르면 그의 말투에는 확신이 가득했고, 그의 행동에는 마치 자신이 구세주라도 된 듯한 태도가 엿보였다. 그는 한 손에 신약을 들고 군중 앞에 서서, 마치 종교적인 연설이라도 하듯 웅변을 늘어놓았다.

“이 약이야말로 여러분을 구원할 것입니다. 나을 자는 나을 것이요, 낫지 않을 자는 낫지 않을 것입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묘한 열정이 실려 있었다. 그것은 광신도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그는 신약을 나누어줄 때마다 사람들에게 다가가 묻곤 했다.

“당신은 믿습니까? 당신은 당신의 가족을 구원할 수 있는 이 약을 믿습니까?”

그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초조한 눈빛을 던졌고, 그 시선은 마치 비판적이고 불안한 무언가를 꿰뚫어보는 듯했다. 그의 태도는 어떤 의미에서는 위압적이기까지 했다. 그가 나누어주는 신약은 무료였지만, 사람들은 그것이 결국 나중에 독점적으로 높은 값에 팔아넘기기 위한 미끼일 뿐이라는 추측이 난무했다. 마약이 아닐까 염려한 셈이다. 어쩌면 그는 사기꾼이거나, 아니면 단지 약을 팔기 위해 이상한 실험을 벌이는 미친 과학자일 것으로 여긴 것이다. 그의 불안정한 눈빛과 광신적인 말투는 사람들의 마음에 더 큰 공포와 혼란을 심어주었고, 그가 반복해서 강조하는 신약의 효능을 그리 쉽게 믿지 못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차라리 사기꾼인 편이 나았다.


사람들은 갈등에 빠졌다. 그러나 그들의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언제 역병에 걸려 서서히 기이한 말처럼 변해갈지 모를 상황이었다.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그 자가 건네는 약을 삼켜야만 했다. 그에게 열광하는 자들조차 그 광기 어린 신념의 기저에 어떤 불안한 진실이 숨어 있을지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절망과 공포 속에서 그에게 매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설령 거짓 해결책이라도, 그게 해결책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그밖에 없었다. 그에게서 벗어날 길은 없었고, 그의 약을 마다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자도 많지 않았다.

물론, 정말로 그 약을 먹고 나은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신약을 가져온 자를 신뢰했고, 그의 말에 열광했다. 그러나 나아지지 않는 자들은 그를 비난하기 바빴다. "이건 다 거짓부렁이야."라고 외치며 약의 효능을 부정하려 했다. 분명 나았다고 하는 사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것이 모두 하나의 사기 행각이라고, 혹은 그 나았다는 사람들 또한 한통속이 아니냐며 온갖 욕설을 퍼부었다. 소란스러운 말다툼이 끝없이 이어졌다.

사람들은 갈등과 불신 속에 휩싸였다. 누군가는 “말이 말 같지 않은 말을 씨불이며 두 발로 걸어 다닌 것이 원래 인간을 흉내 내는 과정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고 중얼거렸다. 이게 다 원죄를 저질렀기에 말들이 나쁜 것만 보고 배운 것이라는 의미 같기도 했다.

한편, 신약을 가져온 자는 그저 담담히 “낫지 않는 자가 있을 것이요, 나을 자가 있으리니”라며 선문답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그 말은 마치 성경의 구약청사에서 "믿을 자가 있고, 믿지 않을 자가 있을 것"이라는 내용을 패러디한 것처럼 들렸다.


그의 소문을 듣고 구요섭은 어쩐지 그 자의 말을 온전히 믿기 어려웠다. 정말로 창고에서 탕약을 먹고 나은 자들이 있었고, 자신 역시 의심스러운 생채기가 단순 상처가 아니라 감염 부위라 해도 안심할 수 있게 되었지만, 실제로 발병 억제 및 치료 효과가 탕약 때문인 것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 알 길은 없었다. 그 자의 말이 지나치게 모호했기에 대충 끼워 맞추면 다 맞는 말 같았다. 그의 태도에는 알 수 없는 무책임함과 묘한 차가움이 섞여 있는 것 같았다. 그런 점 때문이었을까. 모두는 그를 믿으려 하면서 온전히 믿지 못하고, 여전히 인간적인 공포에 휩싸여 있었다.

구요섭으로서도 발병의 위험을 지닌 자들과 창고에서 지내는 것이 고역이었다. 매순간 그들의 상황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갑자기 밧줄을 끊어버리고 창고에 있는 다른 이들을 공격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람들이 격리자 모두를 뭉뚱그려서 창고에 격리해놓고 방치하는 게 옳은 결정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자는 존비병이 옮는 것을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 듯했다. 그냥 맨손으로 아주 보호장구 없이 그들 이마에 손을 얹고 기도를 했다. 또 탕약을 먹이기도 했다. 그럴 때면 존비병과 싸우는 자들도 잠잠해졌다. 실로 기이한 광경이었다.

“존귀한 것이나 비천한 것이나 죽음 앞에서는 매한가지니, 존재하는 것도 아니요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 저들은 부자든 평민이든 구별하지 않고 똑같구나.”

그자는 그 말들을 일컬어 ‘존비’라 하였다. 그럴 듯하였다.

물론 그의 말은 얼핏 들으면 맞는 말 같지만, 그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사람들은 이 상황을 믿고 싶지 않았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불안과 공포를 억누르며, 누군가에게 책임을 돌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다시 공격적인 말의 본능이 꿈틀거렸다.

그러자 그들에게 신약을 나누어주는 자,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자, 신뢰하기 힘든 자가 눈에 보였다. 그의 말은 일관된 면이 있었으나, 듣는 자들에 따라서는 날이 갈수록 이상한 소리로만 들렸다.

요지는, 성안에 있는 존비들도 나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약을 가져가서 탕약을 만들 때 겨자씨를 섞어 ‘미디움’ 불에 달여 먹이면, 나을 자는 나을 것이라 했다.

“낫고 싶은 자가 나을 것이니 그때의 신약은 그들에게 유익할 것이오.”

그가 이렇게 말할 때마다, 사람들은 그 무책임한 소리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 모두가 생쥐 신세 같아서 감히 그럴 수 없노라고 했다. 이제 겨우 살았는데 다시 사지로 들어갈 수 없다고도 했고, 누군가는 그것은 존비들도 원하지 않을 것이라 하였으며, 또 어떤 이는 존비들이 원하는지 모르더라도 그들을 가두고, 그들의 집으로 다시 함부로 들어가는 것도 예의는 아니라고 하였다. 이래저래 말 같은 말 사이로 말 같지도 않은 말들이 점점 늘었다. 현실을 보자면, 벽에 부딪히며 괴이한 포효를 하는 존비들의 몸부림으로 곧 대문과 벽이 무너지고 그들이 바깥으로 쏟아져 나올 것 같은 긴박한 상황에서, 한가로운 소리를 듣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러다 보면 여기저기서 논의의 맥락을 벗어난 신세한탄을 하기 마련이었다. 누군가 성경에 지금 들어가기는 싫지만, 이 사태가 진정되면 다시 그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하며 울먹인 게 발단이 되었다. 사실 많은 이들이 여러 이유로 많은 이들이 성경 근처에서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가족이나 친구를 남기도 왔다는 죄책감 때문에 그러는 이들도 있었지만, 어떤 이들은 다소 어처구니없는 이유를 들었다. 집안에 매우 비싼 물건, 문화재나 귀중품을 놓아두고 왔는데, 만일 사태가 정리되고 나면, 모조리 약탈될 것이 뻔하지 않겠느냐며 그것을 재빨리 챙기기 위해서 성경 앞에서 대기 중이라는 것이었다. 자신의 인생이 송두리째 날아갔다면서 울먹였다. 땅값 떨어질 것이라 슬퍼하는 이들도 있었다. 대통령 이름을 거론하며 그 사람 때문에 부동산 가격이 폭락해서 가뜩이나 마음 아팠는데, 이제는 아예 버러진 도시처럼 될 것이라며 부동산 투자의 실패를 곱씹으며 울먹였다. 그래도 너희는 땅이라도 가지고 있으니 낫다면서 건물이 붕괴되고 엉망이 되었으니, 수리비를 감당할 수 없노라며, 기껏해야 달랑 아파트 한 채 있는데 그동안의 인생이 수포로 돌아갔다면서 슬퍼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다 보면 갭투자가 갭투기와 무엇이 다른가를 두고 갑론을박을 하기도 하였다. 위기 속에서 부자들은 늘 기회를 잡았노라며 그런 난리통에도 강좌를 열어서 식량과 돈을 챙겨서 후일을 도모하려는 장삿꾼도 있었다. 심지어 아수라장이 상황에서도 그들을 지켜주겠노라며 자릿세를 받으려는 조폭도 있었다.

‘아직 진짜로 목숨을 잃을 것 같지는 않나 보네요. 하기야 난리를 겪고 재빨리 빠져나온 사람들이라면 아직은 무서운 이벤트 정도로만 보였겠죠.’

라며 이 사태와 토론의 풍경을 비평하면서 자신은 집이 없어 홀가분하다며, 인생사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라며, 어차피 갈 곳도 없는데 이곳에서 죽어도 여한이 없다면서, 그곳에 있던 직장이 사라지면 어차피 다른 데서는 취직도 못한다며, 사장님이 아직 살아있어야 가게도 접지 않을 것이라면서 울먹였다. 사실은 그 가게의 어디에 금고가 있는지 안다면서...


각설하고, 어쨌든 신약을 먹이려 그곳에 들어갈 만큼 용기 있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고, 당장 어디서 겨자씨를 구할 것이며, 다급한 상태에서 중불 상태인 ‘미디움’ 설정을 유지하는 건 쉽지 않았다.

‘한가롭게 겨자씨와 미디움이라니!’

사람들은 그의 말을 흘려들었다.




#5

“증세가 잦아들었어요, 정말로. 신약이 정말 효과가 있긴 하네요. 존비들에게도요.”

그 말을 하는 사람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지만, 거기에는 안도감이 깃들어 있었다. 모두가 긴장 속에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 앞에 묶여 있는 존비병 환자 구요섭은 이제야 겨우 고요한 모습을 되찾은 듯 보였다. 누군가는 그의 얼굴을 살피며 나지막이 기도문을 읊조렸고, 또 다른 이는 재빠르게 그의 손목을 살펴 맥박을 확인했다. 언제든 구요섭이 깰 수 있다는 것에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중증의 발작을 일으켰던 존비병 환자는 비틀어진 채로 의자에 묶여 있었다. 그의 피부는 창백하고 회색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입 주변이 약간씩 돌출되기 시작한 것이 외형적 변이가 빨리 오는 유형이었다. 격렬한 발작으로 피멍이 들고 긁힌 자국이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그의 눈은 이제 반쯤 감겨 있었고, 눈꺼풀 밑으로 흰자위가 조금씩 드러났다. 그토록 불규칙하게 떨리던 숨소리가 차츰 느려지고 깊어지면서, 그는 오랜 싸움 끝에 힘겹게 잠이 든 것처럼 보였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간신히 성 밖으로 뒤늦게 빠져나왔던 그였다. 사람들은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대개는 괜찮았지만, 정말로 사람들의 염려대로 발병 증세를 보이는 경우도 있기 마련이었다. 구요섭도 그랬다.


평소 말수가 적었던 그는 오전부터 식은땀을 흘리더니 방금 전 갑가지 온몸이 뒤틀리듯 경련을 일으키며 자극적인 포효를 내질렀다. 입에서는 거품이 섞인 침이 흘러나왔고, 혀는 마치 제멋대로 굴러가는 것처럼 입 밖으로 튀어나와 흔들렸다. 발목과 손목을 묶은 밧줄이 닿는 곳마다 깊게 파여 붉은 상처가 남아 있었고, 무언가가 그 속에서 부풀어 오르는 것 같았다. 미친 듯한 발광과 날카로운 울부짖음은 다른 격리자들을 한층 더 공포에 몰아넣었고, 모두가 그에게 물리지 않으려고 구석으로 가서 비명을 질렀다. 그곳을 열어야만 했다. 그러지 않으면 모두가 전염되고 말 것이었다. 판단을 하기에는 촉박한 시간밖에 없었다. 그를 붙잡아 놓은 사람들의 심장마저 얼어붙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제, 그의 몸은 싸움에 지쳐버린 듯 축 늘어져 있었다. 갈라진 입술 사이로 희미한 숨결이 새어나왔고, 이따금 깊은 숨을 들이마시는 순간에만 그의 몸이 조금씩 들썩였다. 피에 젖은 머리카락은 땀과 진흙으로 엉켜 있었고, 눈가와 볼 아래로는 핏줄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가 꾹 다문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낮고 길게 끄는 신음 소리가 이따금씩 격리된 창고 안을 채웠다.

누군가는 이 상황을 보고 “그가 진정되었다”며 안도의 눈빛을 보내지만, 다른 누군가는 여전히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잠든 것처럼 보이는 이 순간조차 언제 다시 발작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다. 그의 얼굴에는 광기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목구비는 긴장으로 일그러졌고, 이따금씩 얼굴 근육이 미세하게 떨리며 잠재된 공포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존비병 환자의 몸은 지금 고요한 정적 속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그 고요함 속에는 언제 다시 깨어날지 모르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모두가 한 걸음 떨어진 채 그의 숨소리를 지켜보며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그가 진정으로 나았다고, 다시는 발광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싶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여전히 떨리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며칠 전 발작 때처럼 갑자기 공격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때 물렸던 사람은 기둥에 결박된 채로 탕약을 먹고 있었다. 현재로선 탕약의 효능을 믿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존비병 환자들을 옆에 두고 사는 것은 너무도 불안했다. 창고 안에 있는 사람은 제발 좀 창고를 옮겨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사실 그 불안은 창고 안 사람들의 감정만이 아니었다. 창고를 지키는 사람들은 창고 산 사람들까지 그냥 격리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보였다. 이 과정이 되풀이될 때마다 사람들은 희망도 보았지만 여전히 의심을 놓지 못하는 자신들을 발견하곤 했다. 때때로 어떤 환자는 전혀 낫는 기색도 없었고, 재발병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나았다고 하지만 예전 같지 않아 모두에게서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더구나 그런 사례가 점점 느는 것 같았다. 존비병 바이러스가 신약에 면역력이 생겼다는 말도 돌았다. 돌연변이가 나왔다는 말도 돌았다. 그러자 사람들 사이에는, 이 병이 완전히 치유될 수 없다는 불안이 서서히 확산되었다.

존비뿐 아니라, 성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한 채 숨어 있다가 뒤늦게 탈출한 구약동 사람들은 그들에게 잠재적 존비나 다름없었다. 격리 구역에 머무르는 동안 그들은 의심의 대상이 되었다. 사실 최근에는 존비병 의심 환자를 좀 더 강경하게 관리하기 시작했다. 발병이 잦은 창고의 경우에는 격리 구역의 모두를 묶었고, 신약에 의존해 증세가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 시간이 얼마나 지속될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잠에 빠진 자들의 얼굴에는 여전히 광기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언제 다시 눈을 떠, 존비처럼 발광을 시작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또 누가 급작스럽게 발병할지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그럴 때는 기침도 조심해야 하는 법이었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구석에는 식은땀을 흘리며 부푼 배를 부여잡고 있는 여자가 있었다. 구요섭 일행보다 먼저 들어왔는데, 가장 먼저 도착한 무리 중 한 명이라는 말도 있었다. 그중에 몇 명은 발병해서 다른 곳에 따로 격리되어 있다고도 하고, 그들이 이상한 종교를 믿는 불순한 세력이었다는 소문도 돌았다. 그런 소문 때문인지 사람들은 그 여자를 의심했다. 어쩐지 발병 증상이 아니겠느냐는 것이었다. 사실 창고에 들어오면서부터 여자에 관한 소문이 돌았다. 어떻게 아는 것인지 그 여자가 일주일 만에 배가 불러온 이상한 징후를 보였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원래 남자관계에서 행실이 안 좋았지만, 그건 정말 비상식적인 일이라면서, 불길한 징후와 관련된 것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미혼모라고 손가락질했고, 원래 남정네들 사이에서 유명했다면서 저잣거리의 소문이 끌려와서는 부풀어졌다. 그런데 이제는 초자연적인 저주를 끌어온 것이다. 저것이 낳을 씨가 괴물로 변한 유다인의 자식이라면서 그가 자식을 찾으러 올 것이라는 말이었다. 그렇게 여자에게 시비를 걸던 한 남정네에게 갑자기 구요섭이 달려들면서 첫 발작 증세를 보였던 것이다. 간신히 떼어내기는 했지만, 그는 구요섭에게 물린 상태였다.


이제 격리된 자들은 긴장 속에 서로를 경계했다. 누군가가 불안한 신음을 내기 시작하면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불규칙한 호흡이 점점 거칠어지고, 손이 떨리기 시작하면, 그들 중 누군가가 발병했음을 의미했다. 이윽고 그 환자는 괴이한 소리와 함께 몸을 비틀며 발작을 일으켰고, 심장이 터질 듯한 고동 소리가 그 공간을 뒤덮었다. 발작이 시작되면 환자는 곧바로 묶였다. 고통에 찬 비명과 함께 파닥거리는 팔다리, 뒤틀리는 얼굴을 보고 있자면, 도망칠 길 없는 공포가 다시금 밀려들었다.

그들은 묶인 채로 격리 구역 한구석에 방치되었다. 한때는 사람이었으나 이제는 거의 괴물이 되어버린 자들을 묶어두고 사람들은 그들의 발작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흰자위가 뒤집힌 눈동자와 불규칙하게 떨리는 근육, 시뻘겋게 부풀어 오른 상처는 그들이 곧 인간이 아니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래도 아직은 시간이 있었다. 골든타임이었다. 사람들은 이때만큼은 물릴 것을 조심하면서도 그들에게 신약을 먹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물릴 위험보다는 그를 살릴 가능성이 더 높다고 믿었던 것이겠다.

신약이 투여되면, 그들은 차츰 진정되었다. 처음엔 몸의 경련이 조금씩 멎기 시작했고, 이내 뜨겁게 달아올랐던 눈빛도 흐릿해졌다. 그들의 호흡이 서서히 안정되었고, 몸부림치던 움직임도 점점 느려지더니, 마치 모든 힘이 빠져나가듯 몸이 축 늘어졌다. 그들은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보였지만, 곧 낮고 깊은 숨소리로 잠에 빠져들었다.

사람들은 그 환자들이 잠든 사이에야 가까스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만큼은 존비병의 발병으로 인한 혼돈과 공포가 멀어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알고 있었다. 그 불안은 잠깐의 휴식에 불과하다는 것을. 잠든 그들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신약의 효과를 눈앞에서 확인한 것처럼 보였지만, 언제 다시 발병할지 모르는 불안감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리고 신이 올 때까지 그 끔찍한 의심과 공포와 죽음과 고통이 무한하게 반복될 것이라는 암담한 좌절감마저 생겼다. 그런 상황에서도 먹고 자야 지킬 힘이 생겼고 일을 해서 무기를 마련해야 했다. 좋든 싫든 모두를 죽일 수도 없었으므로, 함께 버티고 서로를 저주하는 마음을 숨기고, 그것에서 의연해지고자 했다. 어찌 보면 모두가 살고자 버둥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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