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픽션
♬ 붉은 벽돌은 온화하게 냉기를 차단하고
붉- 은 노을은
은- 은하게 번지고, 그대는
벽- 을 두고도 경계를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돌- 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은- 유 같다. 너는
온- 전한 저녁, 그대에게
화- 려한 꽃말 맺힌다.
하- 품 하며 눈물 닦는 어느 늦은 오후, 한껏
게- 을러도 된다는 것에 안도하며
냉- 수를 들이킨다.
기- 세 좋았던 그때를
를- 그리워했던 것만은 아니다.
차- 편이 끊기던 시간에 습관처럼
단- 주를 다짐하고
하- 찮은 맹세는 반복적으로 파기되어, 늘 그렇듯
고- 유 번호를 잃었다.
√ 잃어버린 번호
도시의 끝자락, 낡은 전화 부스가 하나 서 있었다. 1980년대 디자인과 낡은 키패드가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품고 있는 전화 부스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물건처럼 보였다.
그저 한두 번 구경거리처럼 보다가 미소 지으며
거기서 멀어지곤 했다.
하지만 지아에겐 달랐다.
그녀는 가끔 그 전화 부스를 찾아갔다. 이제는 찾기도 어려운 전화 부스 하나를 발견하고는
예전을 떠올렸는지 반가워하더니 그 뒤로는 종종
전화부스로 가는 길을 산책하고는 했다.
레트로 감성의 카페에서
주민과 손님을 위해 비치해놓은 소품 중 하나였다.
실제로 전화가 걸리진 않았지만,
불 꺼진 부스 안에 들어서면 어릴 적 기억이 스치듯
떠오르곤 했다. 어렴풋한 희미함 속에서도 선명히
남아 있는 번호가 있었다.
오래전 누군가가 남긴 흔적, 친구의 생일이 3월 3일이고 이름도 삼삼이라 해서 도저히 잊히지 않듯이, 절로 기억하는 번호였지만
이제는 더 이상 연결되지 않는 번호였다.
그날 저녁에도 지아는 습관처럼 전화 부스를
찾아갔다. 우연히 걷다 보니
그리 되었다.
붉은 노을이 하늘 끝에서
은은하게 사라지는
시간이었다.
어둠이 천천히 번지며 거리를 감쌌고,
부스 안에서 그녀는 지친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자연스레 낡은 키패드 위를
맴돌았다.
익숙한 번호를 누르려다 멈췄다.
손가락에 익은 번호였다.
더 이상 연결되지 않는 번호라는 걸 알면서도,
누를 때마다 무언가 부서지는
기분이 들었다.
"왜 자꾸 여기로 오는 걸까."
그녀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부스 안에서 유리에 가로막힌 채로도
경계를 개의치 않는 듯한 기억들이 그녀에게로 쏟아져 들어오는 것 같았다.
문득 그녀는 손을 내려놓고 유리창
밖을 바라보았다. 저물어가는 하루는
엇비슷했지만, 그날은 장을 봐서 들어가려고 했다.
미리 사다둔 것 말고도 더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오래 전 아버지는
전어를 좋아했었으니까.
기일에 상에 올려놓는 음식에 가릴 것은 없을 테니까.
생전에 좋아하던 것을
이제는 좋아하지 않는다면
또 모를까.
오래 전 잃어버렸고
얼마 전에야 알아냈던 소식으로
이미 돌아가신
아버지를 그래도
만났으니까.
"온전한 저녁은 이런 거구나."
그녀는 작게 중얼거렸다.
전화 부스를 나선 그녀는 마트로 향했다. 한참을 걷다가 그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희미한 별 하나가 보였다.
"그래, 전화가 걸리지 않아도 그 번호는 잊어버리지 않을 거야."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발걸음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