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소설
[목차]
◑ 구약의 말들이 죽지 않고 살아서
♬ 프롤로그
♬ 기이한 죽음
♬ 다시 돌아온 죽음
♬ 안팎의 고립
♬ 저주파의 교란
♬ 사교의 주술
♬ 탈출
♬ 격리
♬ 붕괴
♬ 피란
♬ 에필로그
* <붕괴> 줄거리
존비들이 저주파에 반응해 성문을 공격하면서 성곽의 상황이 점점 악화되고 있다. 저주파는 존비뿐 아니라 사람들의 불안과 공포를 증폭시켰고, 사람들은 저주파의 영향을 받으며 의심과 분노로 혼란에 빠진다.
한편, 창고에서 이질적인 망아지가 태어났고, 신약을 든 사내가 이를 구하려 시도한다. 그즈음 유다인 이사장이 변한 괴수로 인해 성문이 무너지고, 그와 함께 거대한 괴수가 등장해 성곽을 파괴하며 대혼란을 일으킨다.
하지만 사내와 망아지는 혼돈 속에서도 조용히 성문 밖으로 향한다. 이후 망아지와 사내, 괴수가 빛과 함께 사라졌다는 전설이 남고, 마을 사람들은 그날의 사건을 기억하며 사내와 망아지와 괴수에 대해서는 모호한 소문만이 남는다.
#1
성문에서 쿵쿵, 저주파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는 멀리까지 닿지는 않았지만, 성 안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떠돌던 존비들은 그 진동을 느끼며 우왕좌왕했다. 마치 무언가를 찾으려는 듯, 혼란스러운 움직임이 이어졌고, 결국 그들은 성문 앞에 몰려들어 머리로 성문을 쿵쿵 찧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저주파가 더 강하게 발산되었기 때문이다. 저 멀리서 들리던 웅성거림을, 그들은 무언가 반응이 오는 것으로 착각한 듯했다.
존비들의 몸은 불규칙하게 비틀리고 떨렸으며, 각자 다른 속도로 움직였다. 그들의 눈은 비어 있었지만, 그 속에는 본능적인 욕구가 가득 차 있었다. 성문 근처로 몰려드는 과정에서 서로 부딪히기도 하고 밀쳐내기도 했으나, 이내 그들은 점차 하나의 집단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거대한 생명체의 일부가 된 듯, 존비들은 무언가에 이끌리듯 성문을 향해 머리를 찧었다. 쿵, 쿵, 소리는 점점 더 규칙적으로 변해갔다. 그 소리는 저주파와 합쳐져 한층 더 강력한 울림을 만들어냈고, 성 안쪽으로 깊숙이 퍼져 나갔다.
멀리 있는 사람들은 그 진동을 느끼지 못했지만, 성문 근처에 있던 정찰병들은 사정이 달랐다. 저주파가 주위 공기를 타고 퍼져나가자 그들의 마음은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한 명씩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고, 묘한 초조함이 그들 사이를 채웠다. 누군가는 고개를 젓고 혼잣말로 중얼거렸고, 다른 누군가는 손가락 끝을 떨기 시작했다. 뚜렷한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지만, 그 불안감은 마치 저주파가 직접 그들의 마음을 두드리는 것처럼 다가왔다. 저주파의 울림은 단순히 귀로 들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가슴 속 깊이 파고들어 정찰병들의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었다. 그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불안감을 억누르려 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의 얼굴에는 피로와 긴장감이 역력히 드러났다.
그러나 그 진동은 성곽을 넘어 촌락까지 미치지는 않았다. 촌락의 사람들은 그저 고요한 저녁을 맞고 있을 뿐, 성문 근처에서 벌어지는 일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들은 저녁 식사를 준비하거나 가족과 담소를 나누며 일상적인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마을의 아이들은 해가 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뛰놀며 웃음소리를 내었고, 어른들은 평화로운 일상 속에 잠시 안도하며 하루의 피로를 풀고 있었다. 그들은 성문 앞에서 벌어지는 불길한 일에 대해 전혀 감지하지 못한 채, 평화로운 저녁이 이어지기를 바랐다.
다만, 성문 앞에 고립된 존비들은 저주파에 민감하게 반응했고, 마치 그 진동을 무언가에 관한 메시지처럼 받아들였다. 그것은 간절한 신호였다. 존비들은 본능적으로 누군가와 연결되고자 했다. 그것은 그들이 찾고자 하는 사냥감일 수도 있고, 자신들의 영역을 확대해줄 동료의 신호일 수도 있었다. 그도 아니라면, 이 저주파가 그들이 잊힌 존재가 아니라는, 아직도 누군가 그들과 교감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마지막 끈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계속해서 성문을 찧었다. 연결을 갈망하며, 저주파에 반응하는 그 마지막 의지로 말이다. 그들에게도 실낱같은 희미한 의지라는 것이 있다면 말이다.
성문은 그들의 머리와 몸에 의해 점점 파손되고 있었다. 목제와 철제가 뒤섞인 문에 부딪힐 때마다 쇠가 울리는 소리와 함께 부서진 살점과 피가 튀지만, 존비들은 아픔을 느끼지 못한 채 계속해서 머리를 찧고 또 찧었다. 그들의 이마와 두개골이 부서져 피투성이가 되어도 멈추지 않았다. 그들에게 아픔은 이미 잊힌 감각이었다. 오직 저주파에 대한 반응, 그리고 그 진동을 향한 갈망만이 그들의 행동을 지배하고 있었다.
성문 바깥에서는 군인들이 성문에서 소음이 들리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손에 무기를 들고 경계를 늦추지 않았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지쳐갔다. 저주파가 그들의 정신을 잠식하듯 불안감을 키우고 있었고, 존비들의 끊임없는 머리 찧기는 그들에게 압박으로 다가왔다. 군인 중 몇몇은 서로 눈을 마주치며 불안한 표정을 감추려 애썼지만, 그들의 손끝은 점점 떨리고 있었다. 저주파의 영향은 단지 존비들만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성문 바깥에 살아 있는 사람들의 마음마저 흔들고 있었다.
성문을 사이에 두고 존비들과 인간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긴장이 점점 고조되었다. 존비들은 저주파를 따라 끊임없이 성문을 두드렸고, 인간들은 그 소리와 진동에 압도당하며 점점 초조해졌다. 그 순간, 성문이 조금이라도 흔들리는 듯한 느낌이 들자 정찰병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이대로 두면 안 됩니다.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해요!"
그러나 상관 안요섭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직 기다려. 성문이 버틸 수 있을 거야. 지금은 지켜보는 수밖에 없어."
그들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은 채, 성문을 부수려는 존비들의 소음을 관찰하고 있었다.
저주파는 그들에게 끊임없이 불안감을 불어넣었고, 존비들은 그 불안감 속에서도 오직 연결을 갈망하며 움직였다. 그들의 모습은 마치 버림받은 자들이 마지막 희망을 찾아가는 듯한 절박함이 느껴졌다. 성문 앞의 쿵쿵거림은 계속되었고, 그 소리는 점점 더 깊고 강하게 성 안과 바깥으로 퍼져나갔다. 인간과 존비 모두에게, 이 진동은 무시할 수 없는 무언가를 상징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연결, 그리고 존재의 증명. 그것은 성문 앞에서 울리는 저주파의 진동과 함께 어딘가로 이어지고 있었다.
#2
사실 그러한 저주파를 포착한 존재들이 있었다. 그들은 소문으로만 존재한 게 아니라 실제로 마을 창고에 갇힌 존비들이었다. 그들은 점점 말들을 닮아가고 있었지만, 원래는 인간이었던 것을 보여주듯 얼굴 부위에서 여전히 인간의 형상이 남아있었다. 그들의 눈동자에는 희미하지만 어딘가 인간적인 슬픔과 공포가 서려 있었고, 이는 그들의 과거를 암시하는 듯했다.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옛 모습을 느끼는 것이면서, 그 이유를 알지 못하는 답답함이 묻어난 것 같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슬픔의 출처는 때로는 부질없이 헛도는 고뇌이기도 하였다. 그러한 슬픈 감정은 곧 증발하기 마련이고, 곧장 자신의 일차적인 본능에 짓눌려 버리기 마련이었다. 마찬가지로 존비들도 본능적으로 저주파를 감지하고자 했다. 저주파는 그들에게 생명줄과도 같았고, 그것을 갈망하는 것은 그들의 본능이었다. 창고 안의 존비들 역시 저주파를 찾기 위해 예의 주시하면서 스스로도 저주파를 뿜어댔다. 사람들은 미처 몰랐지만, 그것은 모두의 마음을 이상하게 뒤틀리게 만들었고, 소소한 소문과 다툼으로 이어지곤 했다. 탕약을 먹어도 잠깐뿐이었다. 근원이 제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탕약이 효과가 없기 때문이라 믿었지만, 사실 사람의 마음이란 게 늘 아주 민감한 자극으로도 뒤틀어지기 마련이었다. 그런 자극이 너무도 많아서 탕약의 효과는 반감되기 마련이었고, 달리 보면, 그런 자극을 압도할 만한 효력은 아니었다고도 볼 수 있기에 ‘탕약이 효과 없다’고 흉보는 사람 말이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니었다. 마을 곳곳에서 퍼지는 불안감은 그저 탕약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을 정도로 깊이 자리 잡았다. 사람들은 불안의 근원을 알지 못한 채 서로를 탓하고, 불필요한 의심과 오해를 키워나갔다. 저주파 때문이라는 걸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 성문 안 존비들은 점점 더 선명하게 사방으로 저주파를 뿜어댔다. 그것은 희미한 듯 끝내는 지워지지 않는 끈질긴 냄새처럼 느릿느릿 마을로 퍼지고 있었다. 그것은 공기처럼 스며들어 사람들의 감각을 마비시키고, 그들을 점점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미처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저주파는 꽉 차서 일상의 파동처럼 너울거리며 사방에서 옥죄듯 좁혀 와서는 마을의 한 지점으로 스며들었다.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피로와 무력감에 빠져들었고, 이를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쳤지만 그럴수록 저주파는 더 강하게 그들을 억눌렀다.
사람들은 저주파의 존재를 모르더라도 막연하게나마 이 불길한 기운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창고의 존재 때문만은 아니었다. 존비들이 뿜어내는 저주파는 마을의 구석구석에까지 퍼져, 사람들의 심리를 교묘하게 흔들었다. 조용했던 집 안에서는 작은 다툼이 빈번해졌고, 이웃 간의 불신은 점점 커져만 갔다. 마을 회관에 모여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도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창고에 대한 이야기가 금기처럼 되어버렸다. 창고의 문이 언제 열린 적이 있었는지, 누군가 그곳을 드나들었던 것은 아닌지에 대한 의심은 점점 확산되었다. 그 누구도 직접 확인할 용기가 없었기에, 이러한 의심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만 했다. 사람들은 창고와 저주파에 대해 말하기를 피하며, 그것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더 큰 재앙을 불러올 것이라 믿었다.
진실을 확인할 용기를 가진 이는 없었다. 창고 근처에 다가가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해졌고, 그곳에서 새어나오는 냄새는 이내 사람들의 폐부 깊숙이 스며들어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탕약에 더욱 의존하게 되었고, 밤마다 불안에 떨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탕약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불길함은 여전히 마을을 휘감고 있었다. 그것은 점점 더 뚜렷해지는 저주파와 함께, 미지의 존재가 마을을 조종하려는 것처럼 끊임없이 사람들의 마음을 뒤틀고 있었다. 매일 밤 마을 곳곳에서 들려오는 신음 소리와 낮은 속삭임은 사람들의 불안감을 더욱 증폭시켰다. 그 속삭임은 존비들이 뿜어내는 저주파와 뒤섞여 사람들의 꿈속으로까지 스며들었고, 악몽에 시달리는 이들이 점점 늘어갔다.
사람들은 창고에서부터 시작된 저주파의 영향력이 점차 자신들을 잠식해 가는 것을 느꼈다. 더 이상 평화롭던 일상은 존재하지 않았다. 마을은 점점 공포와 불신의 공간으로 변해갔고,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저주파의 끈질긴 울림 속에서 서서히 붕괴되어 갔다. 가족 간에도 작은 불화가 잦아졌고, 친구였던 이웃들도 서로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적대감과 불신이 싹트고 있었다. 창고 주변을 지나는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두려움에 사로잡혀 걸음을 재촉했고, 저주파의 울림은 그들을 뒤쫓듯 점점 더 강해졌다.
마을의 아이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이들은 갑작스럽게 악몽에 시달리기 시작했고, 그중 일부는 잠에서 깨어나도 한동안 현실과 꿈을 구분하지 못했다. 부모들은 아이들을 달래려 했지만, 그들도 자신들의 불안을 숨길 수 없었다. 창고에서 비롯된 저주파는 사람들의 일상 깊숙이 파고들어, 마을 전체를 서서히 갉아먹고 있었다. 마을의 회관에서는 이러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논의가 이루어졌으나, 누구도 나서서 창고를 확인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사람들은 더욱더 탕약에 의지하며 불안함을 잠시나마 잊으려 했는데, 그건 일시적인 도피일 뿐이었다.
결국, 마을 사람들은 그들의 일상을 잠식해 오는 공포에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그들은 여전히 진실을 마주할 용기를 내지 못했고, 창고에 대한 이야기조차 입 밖에 내지 않으려 했다. 그저 불안에 떨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저주파는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끊임없이 마을을 휘감으며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스며들어 갔다. 그 울림은 마치 마을 전체가 서서히 미쳐가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점차 자신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는지조차 잊어갔다. 이제 마을에는 오직 저주파의 울림만이 가득했다.
그런 와중에 창고에서 발병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었다. 서로는 서로를 의심하여 생존을 위해 모두를 경계했다.
#3
성 바깥에서 감지되는 저주파의 출처를 찾기 위해 성곽 위로 올라온 말 한 마리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 눈동자가 흔들리며 공중을 더듬으려는 순간, 무언가에 홀린 듯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성곽 바깥으로 툭 떨어졌다. 경고도, 소리도 없이, 그저 무언가에 이끌린 듯 천천히 성곽 아래로 사라졌다. 순간적인 충격과 함께 둔탁한 낙하음이 성곽 아래에서 울려 퍼졌지만, 주위는 여전히 싸늘한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공기는 순간 얼어붙은 것처럼 차갑게 느껴졌고, 정찰병들은 숨을 죽인 채 그 장면을 지켜보았다. 말의 갑작스러운 낙하가 만들어낸 충격은 무언가 초자연적인 기운이 성곽 위에 드리워졌음을 암시했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지만, 누구도 말을 꺼내지 못했다.
숨 막히는 긴장감이 팽팽히 감도는 가운데, 또 다른 말 한 마리가 성곽을 배회하며 발걸음을 멈췄다. 눈빛은 텅 빈 채, 마치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듯 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그 순간, 마치 투명한 실에 의해 조종되듯, 말은 성곽 아래를 보려는 듯 천천히 몸을 기울였다. 결국 똑같은 방식으로 성곽 바깥으로 몸을 던졌다. 말이 낙하하는 순간, 그 주위의 공기는 다시 한번 차갑게 얼어붙었고, 시간마저 멈춘 듯했다. 곧이어 들려오는 또 한 번의 무거운 추락음이 정찰병들의 귓가를 자극했다. 그 소리는 성곽 아래의 어둠 속에서 울려 퍼졌고, 숨어 있는 정찰병들은 조롱받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정찰병들은 굳은 얼굴로 서로 눈을 마주쳤다. 그들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무기 손잡이에 얹혔다. 손가락이 무기를 꽉 쥐는 순간, 그들의 마음속에는 불안과 공포가 서서히 스며들었다. 저주파는 공기 중에 스며들어 육중한 기운으로 그들의 의식을 짓눌렀다. 말들이 보이지 않는 힘에 휘말린 것처럼, 이곳에는 단순한 이상 현상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깃들어 있음을 느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의식까지 흐릿해지는 착각에 빠졌다. 침묵 속에서 그들은 모두 직감했다. 그들 자신도,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어느새 정찰병들의 숨소리마저 희미해졌다. 그들은 말을 잃은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성곽 위를 감싸는 침묵은 더욱 짙어졌고, 바람조차 숨을 멈춘 듯했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금속의 감촉만이 그들에게 현실감을 주었지만, 그도 잠시뿐이었다. 눈앞에서 벌어진 이 기이한 광경이 그들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말들이 성곽 아래로 떨어지던 순간의 장면은 마치 그들에게 경고 같았다.
그들은 몰랐다. 저주파가 그들의 의식을 흐리게 만들었다는 것을, 그리고 말들을 미치게 했던 그 기운이 자신들에게도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성 밖도 더는 안전하지 않았다. 그들의 심장은 점점 더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정찰병들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두려움을 억누르려 애썼지만, 그것은 성곽 위의 어둠처럼 그들을 서서히 잠식하고 있었다.
그 순간, 멀리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조차 의미를 잃어버린 듯했다. 정찰병들은 다시 한번 주위를 살폈지만, 그 어디에서도 불길한 기운의 근원을 찾을 수 없었다. 그들이 느끼는 불안은 마치 성곽을 감싸고 있는 저주파와 함께 서서히 퍼져나가, 주변의 모두를 감염시킨 뒤 다시 돌아와서는 자신의 몸속 깊이 파고드는 것 같았다. 바람마저 멎은 정적 속에서, 저주파는 보이지 않는 손처럼 그들의 목을 서서히 조였다.
정찰병들 중 한 명인 안요섭이 무거운 침묵을 깨고 마침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떨렸고, 그 소리는 차갑고 고요한 밤공기 속에서 쉽게 사라졌다.
"우리가 뭔가를 해야 해... 그냥 이렇게 두고 볼 수는 없어."
그의 목소리에는 결의와 두려움이 뒤섞여 있었고, 다른 병사들도 그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무언가를 시도하는 것만으로 이 끔찍한 상황이 나아질지에 대한 확신은 누구도 할 수 없었다.
이윽고 또 다른 말 한 마리가 성곽을 따라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말의 발걸음 소리는 성곽 위에서 허공을 가르며 메아리쳤고, 정찰병들은 떨리는 눈으로 그 광경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손에 힘을 주며 무기를 더욱 굳게 쥐었지만, 그것이 그들에게 줄 수 있는 위안은 극히 미미했다. 그저 그 순간을 버티기 위한, 이를테면 작은 의지의 표명이었을 뿐이다.
말은 운명에 이끌리듯 또다시 성곽에서 위태롭게 걸었고, 정찰병들은 숨을 멈춘 채 그 장면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말은 발걸음을 멈추고, 성곽 아래로 천천히 몸을 기울였다. 떨어지는 말의 모습은 느릿하게 흘러가는 것 같았고, 그 낙하의 마지막 순간이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았다.
곧이어 들려오는 추락음이 성곽 위의 정적을 다시 한번 깨뜨렸다. 정찰병들은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듯 무거운 숨을 내쉬었다. 그들의 손끝은 차가운 땀으로 젖어 있었고, 심장은 빠르게 뛰고 있었다. 말들이 성곽 밖으로 떨어지며 남긴 그 불가해한 기억들은 그들에게 일종의 경고처럼 다가왔다.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이 그들 가까이에 있었고, 그들을 서서히 압박하며 다가오고 있었다. 성 안과 밖의 경계선은 불안으로 가득 찬,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장악된 공간이었다.
성곽 위의 무거운 공기는 오래도록 갇혀 있던 악몽이 깨어난 것처럼 느껴져, 질식할 듯했다. 정찰병들 중 한 명인 안요섭은 간신히 떨리는 손을 내리고, 희미한 목소리로 다른 이들에게 속삭였다.
"우리가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냥 있을 수만은 없는데, 뭘 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어."
그 말에 담긴 막막함은 주변의 병사들에게도 전달되었고,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을 다잡으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조차도 저주파의 영향력은 강력했다.
그들의 의식은 무겁게 짓눌려, 마치 깊은 물속에서 허우적대는 듯했다. 말들이 왜 이렇게 갑자기 성곽 아래로 몸을 던졌는지에 대한 의문이 그들의 마음속에 싹텄지만, 아무도 그 질문에 답할 수 없었다. 그 광경을 목격한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압도되고 있었다.
성곽 아래에서 들려오는 무거운 굉음이 다시 한번 그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이번에는 단순한 말의 추락이 아니었다.
"쿵!"
성곽을 뒤흔드는 거대한 충격음은 그동안 경계해 왔던 모든 공포가 현실로 드러나는 순간을 알리는 듯했다. 정찰병들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나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뭔가 거대한 것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성곽이 무너지고 있어!"
누군가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멀리서 전해져 오는 두 번째 굉음은 더욱 거세게 성곽을 흔들었다. 성문을 들이받는 소리였다. 엄청난 무언가가 성문에 부딪혀 거대한 힘으로 밀어붙이는 충격이 계속해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돌이 갈라지고 쇠가 휘는 소리가 이어졌고, 더는 버티지 못할 거라는 예감이 정찰병들의 가슴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성곽 위에는 여전히 저주파의 기운이 가득했다. 정찰병들은 그 속에서 필사적으로 희망을 찾으려 했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그들의 손은 떨리고 있었고, 심장은 빠르게 뛰고 있었다.
그 순간, 성곽을 뒤흔드는 굉음이 다시 한번 울려 퍼졌다. 거대한 존재가 성문을 부수고 밖으로 나오려는 듯했다. 시간은 멈춘 듯했고, 모든 소리가 사라진 순간이었다. 그리고 성곽을 뒤흔드는 또 한 번의 굉음이 울려 퍼졌다. 정찰병들은 무기를 꽉 쥐며, 마음을 다잡았다. 물러설 수도 없었다. 물러서려면 처음부터 멀리 도망쳤어야 했다. 그러지 않기로 했던 때부터 종종 이런 순간이 올 것이란 상상을 했다. 달갑지는 않지만 그런 순간이 왔다는 직감이 들었고, 그들은 끝까지 싸울 준비를 했다.